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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창화]정창화가 정창화를 말한다
나에 대한 얘기는 이미 회고록의 형태로 한국일보에 연재된 바가 있으나 그것의 상당 부분은 내가 통과한 시대와 그 시대를 함께 살았던 동시대인과 그 주변 풍광에 대한 서술이었다. 직접적으로 나에 대해 얘기하는 것에 집중해야 하는 요청은 새삼스럽게 다시 묵직한 부담감을 준다. 일종의 ‘고백록’에 가까운 글을 써야 할 것 같은 심정적 압박 때문일 것이다.
더구나 내가 나에 대해 그 속내를 끌어올리는 과정에서 내밀함과 객관적인 자평 사이에 일정한 거리를 두고 얘기해야 하나 자칫 그 균형감각을 상실함으로써 천하의 팔불출이 되지 않을까 두렵다. 나에 대한 개인사는 이미 회고록에 쓴 바 있으나 읽지 못한 독자를 위해 중복되는 부분은 회고록 글을 인용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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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서 예술을 발견하다
1928년 11월에 서울에서 나고 자랐다. 영흥실업주식회사라는 무역회사를 운영하셨던 부친(정위영)은 한국독립당 중앙위원으로서 김구 선생을 모시며 혼란기 한국정치사를 통해 올곧은 역사관과 정치적 이념을 실현하고자 하셨다. 정치와 사업을 병행하시던 아버님의 팽팽하게 긴장된 삶 속에서 장손인 나는 마땅히 가정의 안정을 위해 아버님의 사업을 조속히 이어받아야 했고, 이를 위해 경기공립상업학교를 졸업했다. 2남3녀의 맏아들이자 존경하는 아버님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던 나는 막중한 책임감에도 불구하고, 상업보다는 예술 쪽에 더 마음이 기울어 갈등해야 했다. 예나 지금이나 집안에서 거는 기대와 개인 자신이 원하는 소위 ‘자아실현’의 간극이 클수록 그 압박감은 그만큼 버거워진다. 나 역시 결단을 해야 했다. 결국, 부친을 설득해 서울음악학교에 입학했다. 당시로는 상업이 아닌 대안은 음악뿐이었고 감수성이 펄떡이면 그쪽을 향해 갈 뿐이었다.
2학년 재학 중 최인규 감독의 <자유만세>(1946)를 보면서 ‘나도 감독을 해봐야겠다’며 뜻을 세운다. 음악적 리듬은 이미 영화 속에 넘쳐나고 있었고 추상적인 음악이 보다 현실적이고 구체적으로 영화 속에 구현되어 있었다. 영화에서 내가 진정 원하는 ‘예술’을 발견한 것이다.
최인규 감독은 이미 한국영화에 있어 독보적인 존재였고, 당시 대학에 영화학과가 전무했기 때문에 내가 영화감독이 되기 위해 선택한 최선의 방법은 최인규 감독 문하생으로 들어가 현장교육을 받는 것뿐이었다. 최인규 감독에게 연출수업을 받은 4년여의 조감독 생활을 마치고 부친을 설득해서 제작비를 지원받아 김성민 각본, 신현호 촬영으로 첫 영화 <유혹의 거리>(1953)를 연출했으나 6・25전쟁 중 포탄을 맞아 전소돼버리고 말아 지금도 가슴에 품은 첫 자식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불행 중 다행으로 이후 <장화홍련전>(1956), <햇빛 쏟아지는 벌판>(1960), <노다지>(1961), <장희빈>(1961), <지평선>(1961), <사르빈강에 노을이 진다>(1965), <순간은 영원히>(1966), <황혼의 검객> (1967) 등을 비롯한 영화를 통해 한국영화의 태동기부터 중흥기에 걸쳐 영화 연출의 꿈을 펼칠 수 있었다.
실험을 거듭해 만든 ‘정창화식’ 영화
나는 암울한 시대의 관객에게 뭔가 활력을 주고 싶었고 일본영화의 영향을 받은 소시민 영화, 소위 대사 위주의 멜로드라마보다는 스펙터클하고 빠른 템포의 미국영화를 모델 텍스트로 하고 싶었다. 당대의 열악한 한계 내에서 그만큼 더 창조적이어야 했고 당연히 저예산이어야 했으며 한국 관객의 발길을 끌어들여야 했다. 그러던 중 조지 스티븐슨 감독의 <셰인>(1953)을 보게 되었다. <셰인>은 몽타주 기법을 사용해 박진감 넘치는 총격전, 스피디한 격투 장면을 표현했으며 그런 새로운 형식에 강한 콘트라스트로 대비될 만한 서정적이고 서사시적인 내러티브(narrative)를 잔잔히 그려내고 있었다. 이런 비견될 만한 형식과 서사적인 완성도를 통해 감독이 말하고 싶은 메시지나 주제의식을 모두 전달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이 영화에 완전히 매혹되었다. 소규모, 저예산에도 불구하고 빠른 템포와 완성도 높은 주제의식으로 감명을 준 <셰인>을 통해 하나의 이정표를 발견한 것이다.
이후 난 빠른 템포의 촬영과 편집으로 관객의 눈과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정표를 세워놓고 그 위에 새로운 영화적 실험을 거듭하면서 정창화식 영화를 만들다 보니 박진감 있는 영상의 대명사인 액션물이 내 영화의 대표성이 되지 않았나 싶다.
역사극을 통해 새로운 한국적 미장센을 시도했던 <장화홍련전> <장희빈> <황혼의 검객>이나 만주대륙물의 시대를 열었던 <지평선>, 인간의 탐욕을 심층적으로 분석해본 <햇빛 쏟아지는 벌판>, 트램펄린을 이용해 빠른 액션을 모색한 <황혼의 검객>, 줌렌즈로 다큐멘터리처럼 촬영해 사실성과 현장감을 높인 현대액션물의 새로운 시도 <순간은 영원히>까지 참으로 다양한 시도와 보람이 있었던 열정적인 시절이었다.
그러나 1960년대 후반, 군사정권이 들어서면서 창작자로서 숨 막히는 압박과 억압을 참아내기 힘들었고, 때마침 현대액션물의 성공적 시도였던 <순간은 영원히>를 눈여겨보았던 홍콩 쇼브라더스의 란란쇼 사장의 스카우트 제안이 있었으므로 난 기나긴 이방인의 길에 들어서게 된다. <천면마녀>(1969) <여협매인두> <아랑곡>(1970) <래여풍>(1971) 등 쇼브라더스에서 만든 작품들은 속속 흥행과 작품성에서 인정을 받았으며 그 절정에 <죽음의 다섯 손가락>(1972)이 있었다.
한국영화의 살아 있는 역사이자 이방인
<죽음의 다섯 손가락>은 2005년 칸영화제 클래식 부문에 초청되면서 다시 주목받은 바 있으나, 사실 1972년에 홍콩에서 제작된 후 73년에 미국에서 개봉될 당시부터 아시아 영화 중 최초로 미국 박스오피스 정상을 차지했던 영화로 미국이나 홍콩에서는 이미 꽤 유명해진 영화였다. 칸 초청 상영회와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베스트 영화로 재평가받으면서 그의 영화 <킬빌>의 오마주 영화로 떠오른 <죽음의 다섯 손가락>은 뒤늦게나마 한국에서도 제대로 평가받는 영화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으나 한국영화팬의 기억 속에는 내가 만든 <죽음의 다섯 손가락>이 아니라 한국에서 수입하는 과정에 제멋대로 난도질하고 재편집한 다른 형태, 다른 이름 <철인>으로 평가절하된 영화로 남아 있을 뿐이다. 단, 기억에라도 남았다면 말이다.
늘 기억에 남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던 내게 한국 평단은 흥행 액션영화 감독이라는 평가 외에는 별반 후한 점수도, 감독상도 주지 않았는데, 칸에서는 내 영화를 클래식 반열에 올려주었으니 칸은 그 역사나 명성 때문이 아니라 내 영화 인생에서 상징적인 이중적 정체성을 함축했기에 난 칸으로 인해 다시 태어난 듯 가슴이 먹먹했다.
돌이켜 보면, 한국영화 초창기의 척박한 터전에서 한국영화의 다양성을 모색한 나는 한국의 영화감독이었지만 늘 이방인들이 먼저 손을 내밀어준 또 다른 이방인이기도 했다. 내가 영화를 시작한 그 무렵은 한국영화 초창기라고 할 수 있다. 나는 한국영화 초창기의 역사 속에 등장하는 소수의 ‘전설적인 웰메이드(well-made) 감독(이렇게 자평하자니 좀 머쓱하지만)’이었지만, 영화의 암흑기라는 70년대에는 홍콩에서 영화를 만들었고 칸이 영화 역사 속에 다시 길어 올려주었으며 지금은 미국 샌디에이고에서 ‘LA 한국영화제’를 통해 한국영화의 할리우드 진출을 돕고 싶어 하는, 어찌 보면 한국영화의 살아 있는 역사이자 반평생을 한국 바깥에서 이방인으로 살아온 아웃사이더이기도 하다.
열정을 가로막는 현실의 벽
<죽음의 다섯 손가락>이 국제적으로 성공을 거둘 무렵, 란란쇼가 그동안 제작 총지휘를 했던 레이몬드 초우를 밀어내고 란란쇼의 후실이자 가수 출신의 40대 여성인 모나팡을 그 자리에 앉혔다. 제작비 절약 차원에서, 설정된 검과 의상까지 없애버릴 정도로 무지한 모나팡이 영입되면서 나를 비롯한 쇼브라더스의 대표감독들이 자리를 옮겼고, 나는 모나팡한테 밀려나 골든 하베스트를 세운 레이몬드 초우와 일하게 되었다.
<흑야괴객>(1973), <귀계쌍웅>(1976) 등이 골든 하베스트 시절에 만들어졌다. 새로운 것을 추구한다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던 이소룡, 골든 하베스트가 발굴하고 키웠던 이소룡과 새롭고 멋진 작품을 만들어보자고 의기투합한 시점에 안타깝게도 이소룡은 요절하고 만다.
이소룡의 죽음과 이후의 여러 가지 크고 작은 일들을 겪으면서 골든 하베스트와 레이몬드 초우에게 환멸을 느끼던 차에 한국의 상황도 급변하고 있었으며 돌아와달라는 한국 정부 쪽 요청도 동인이 되어 나는 10여 년의 홍콩 시절을 뒤로하고 그리운 조국 한국으로 귀향한다. 그러나 그동안 홍콩에서 쌓은 합리적 영화제작•연출 시스템 운영에 대한 경험을 한국적 현실에 적합하도록 적용하고 현실화하는 데 있어 뜻밖의 문제들에 봉착하게 되었고, 정치꾼과 장사꾼들의 야합으로 철옹성이 되어 있는 현실의 거칠고 단단한 벽은 생각보다 너무 가혹하고 높았다.
달걀로 바위를 치던 열정은 부메랑처럼 내 정신과 육체를 쳐 내렸고 난 극도로 쇠약해져 더 이상 영화에 대한 열정을 불사르는 영화청년이기 어려웠다. 모든 것을 손에서 놓고 쉬고 싶었다. 아내의 권유로 미국의 휴양도시 샌디에이고로 도망치듯 거처를 옮기게 되니 다시 <망향>(1958, 한홍합작영화)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다시 태어나도 영화감독으로
우울증에 대인기피증까진 참을 수 있으나 내가 영화기피증까지 앓게 되었으니 문제는 심각했다. 몇 년간을 영화, 심지어는 드라마 등 어떤 영상매체와도 담을 쌓고 살다가 국내외의 영화제와 회고전, 후배들의 간곡한 진언 등에 힘입어 영화감독으로서의 자존감을 겨우 회복할 수 있게 되었다.
난 종적으로는 일제강점기와 6・25전쟁, 군사정권 시절 등 격동적인 한국근대사를 살아왔고 횡적으로는 한국과 홍콩, 미국을 넘나들며 영화를 통해 내 80평생을 말 그대로 종횡무진 살아오며 단 한순간도 영화를 위한 열정과 창조성, 도전정신을 놓은 적이 없다고 생각한다. 최소한 우울한 초기 미국생활 기간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난 군사정권에 야합하기에는 대쪽처럼 강직했고, 흐느적거리며 내 영화청년 정신을 소모하기에는 너무 고지식했다. 그보다는 새로움을 향한 도전에 단 한 번뿐인 내 인생을 소진하고 싶었다.
지금까지 내가 걸어온 영화 인생, 여러 가지 어려운 고비도 있었고 화려한 시기도 있었지만 내 자신이 영화를 했다는 것에 대해서는 단 한 번도 후회하지 않았으며 보람을 느끼고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다시 태어난다고 해도 나는 또 영화를 할 것이다. 영화는 내 생명이고 천직이다. 열악한 환경에서도 지금과 같은 한국영화를 만들어내게 된 것은, 한국인 특유의 노력과 근성, 내 몸 속에 흐르는 한국의 유구한 문화 역사가 아니면 불가능했으리라. 이제 우리 영화인의 저력이 좁은 한국 땅에서 벗어나 세계를 무대로 거침없이 뻗어나가길 기원하며 또다시 뜨거운 마음으로 ‘LA 한국 영화제’를 통해 내 소망의 씨앗을 심어본다.
by.
정창화(영화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