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파리, 퐁피두 센터
독일 거장 베르너 슈레이터 회고전에 이어, 올해 파리의 퐁피두 센터는 <우리 시대의 시네아스트(Cin astes de notre temps) > 전작을 꼼꼼히 들여다볼 수 있는 드문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1964년, 비평가 고(故) 앙드레 바쟁의 부인 자닌 바쟁과 앙드레 라바르트에 의해 당시의 뉴 미디어 텔레비전을 위해 기획 구상된 이 영화 에세이 시리즈는 <루이스 브뉘엘 : 우리 시대의 시네아스트 >와 <누벨바그에 의한 누벨바그>를 필두로 아벨 강스, 칼 드레이어, 막스 오퓔스, 로베르 브레송, 존 카사베츠, 니코 파파타키스, 후 샤오시엔, 다르덴 형제 등 세계 유수의 영화 작가들 초상을 <카이에 뒤 시네마 > 식의 인터뷰 대화와 시네마 베리테, 혹은 픽션 장치를 빌려 자유분방하게 표현하고 있다.
1975년 11월 이후 오랜 공백기를 갖게 되나 1988년 아르테 방송사를 통해 재개된 이래 현재까지, <우리 시대의 시네아스트>는 영화 작가들의 살아 있는 흔적과 사유를 창조적이며 예기치 않은 형식으로 기록 보관하는, 세계 영화사의 비주얼 아카이브 기능을 하고 있다.
영화라는 매체의 근원을 고민하다
자크 로지에, 에릭 로메르, 장 두쉐, 장-루이 코몰리, 장-앙드레 피에스키, 알렉상드르 아스트뤽, 노엘 버치 등 영화 비평가와 후배 시네아스트들로 이루어진 감독진의 면면을 통해, 예컨대 <파트롱 장 르누아르>는 그의 명실상부한 후계자 자크 리베트에 의해 기술되는 식인데, 영화사적 계보학의 진정성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영화 작가들이 직면하는 미학적이며 존재론적인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는 영화적 에세이로서 그리스 어원 ‘아르케(arch )’의 의미를 따라 영화라는 매체의 ‘근원’에 대해 추궁하는 아카이브의 기능을 충실히 한다.
한편, 퐁피두 센터에서 <우리 시대의 시네아스트> 시리즈를 상영하는 것은 의미심장한데, 이 장소는 또한 엄밀한 의미에서 실험영화의 아카이브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간헐적으로 또는 주기적으로 실험영화를 상영하는 것에 그치는 루브르 미술관이나 프랑스 시네마테크와는 달리, 미래를 예견하는 현재진행형의 실험영화들을 직접 보관하고 열람하는 저장의 장소로서 퐁피두 센터는 특별하고 귀중한 문화 유산임에도 불구하고 자주 간과되어왔던 이러한 영화들의 아카이빙 문제를 1970년대 중반 센터 창립 준비기부터 체계적으로 고민해왔다.
현대 문화의 하이퍼마켓
실험영화 아카이브로서의 퐁피두 센터의 역사는 뉴욕의 앤솔로지 필름 아카이브(Anthology Film Archives)의 역사와 맞물린다. 1969년, 조나스 메카스, 제롬 힐과 아담스 시트니에 의해 설립된 앤솔로지 필름 아카이브는 1970년대 ‘외설’이라는 명목으로 경찰의 감시, 검열과 법정 투쟁에 시달리면서 분투해왔는데, 지금까지 작가영화만이 아니라 무명의 독립영화까지 방대한 양의 실험영화를 소장하고 배급, 상영하는 중요한 역할을 책임지고 있다.
1976년, 퐁피두 센터의 첫 관장 폰터스 훌텐은 앤솔로지 필름 아카이브의 설립에 적극 참여해왔던 오스트리아 빈의 시네아스트 피터 쿠벨카에게 센터의 실험영화 컬렉션과 회고전 <어떤 영화사(Une Histoire du cin ma)>의 기획을 맡긴다. 쿠벨카가 추구하고 있기도 한 ‘예술로서의 영화’의 기원에서 1970년대 후반까지 유럽과 미국에서 작품화된 300여 편의 실험영화로 구성된 이 회고전은 실제로 영화사의 중대한 사건으로 차세대 프랑스 실험영화 감독들의 작품활동에 장기적인 관점에서 간과할 수 없는 영향력을 끼치게 된다.
이 사건을 기점으로 퐁피두 센터는 실험영화 아카이빙 작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는데, 영화사학적인 접근법에 따라 정기적이며 체계적인 상영전을 제공하는 것 외에도, 실험영화를 중심으로 한 대규모 전시회와 출판 활동을 통해, 장 보드리야르의 표현처럼 현대 문화의 하이퍼마켓이라는 센터의 위상에 걸맞는, 대중에게 가깝게 접근할 수 있는 정책을 함께 고민한다.
새로운 영화 역사에 대한 고찰
퐁피두 센터는 렌조 피아노와 리처드 로저스에 의해 설계된 혁신적인 현대식 건물 5층에 ‘뉴미디어/영화 컬렉션 공간(Espace des Collections Nouveaux M dias et Film) ’을 열어두고 있는데, 2,000여 편의 작품을 디지털 형식으로 손쉽게 열람할 수 있다. 지난 40여 년간 현대예술에서 거의 필수불가결한 구성요소가 되어온 시청각 이미지의 역사적 기억을 저장하고 있는 뉴미디어 컬렉션은 고전적인 의미의 영화사를 넘어서는 우리 시대의 영화사, 그 근본적으로 다른 형태로 인해 ‘포스트 시네마’라고도 할 수 있을 새로운 영화의 역사를 연구 고찰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하고 있다.
늘 수많은 관광객이 모여드는, 파리라는 국제도시의 중심가에 위치한 이 대중적인 기억의 장소는, 상업영화 주변부에서 힘들게 자생해온 실험영화에서부터 백남준의 설치예술, 장-뤽 고다르의 비디오, 크리스 마르케의 시디롬이나 피터 그린어웨이의 인터랙티브 인터넷 사이트까지, 오늘날 더욱 그 진정한 동시대성을 평가받는 기억을 평등하게 보관하고 분배하는, 우리 시대의 유용한 영화 아카이브로서 자리매김한다.
by.여선정(파리 3대학 영화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