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가을이 깊어지면 영화 <만추>의 추억이 되살아난다.
# 낙엽이 휘날리는 창경원 낡은 벤치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여인의 표정은 점점 초초해진다. 1년 전 이맘때였다. 모범수로 가석방되어 어머니의 무덤을 찾아가던 기차 안에서 앞자리에 앉은 한 청년과의 우연한 만남, 그리고 뜨거웠던 사흘간의 사랑, 목마른 낙타 우리, 박제가 된 동물 표본실, 인적 없는 삭막한 갯벌을 헤매면서 그들은 고갈된 영혼으로 서로가 애타게 구원을 갈구했다.
# 휴가를 마치고 교도소로 다시 돌아가는 길목의 우동집에서 여인을 웃기려는 남자의 몸짓도 이별의 슬픔을 달래기에는 어림도 없었다. 가슴이 찡해지는 명장면이었다.
# 남자가 사온 속옷 한 벌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형기를 마친 1년 후, 창경원에서 다시 만나기로 약속한 여인은 무거운 발걸음으로 교도소 철문 안으로 사라졌다. 기다리고 있던 형사들은 청년의 손목에 수갑을 채운다. 청년은 위조지폐범으로 수배를 받아왔던 것이다.
# 다시 창경원. 남자는 끝내 나타나지 않는다. 여인의 애잔한 심정을 상징하듯 바람이 거세지면서 낙엽이 난무한다. 철장 안에 갇혀 몸부림치는 청년의 몸짓과 커트백되는 장면에 이르러 관객의 눈시울이 촉촉이 젖어가는 듯했다.
40여 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나에게 <만추>는 결코 잊을 수 없는 추억의 영화다. <만추>가 태어난 과정과 이후의 일들에 대해 회고해보기로 한다.
갑자기 찾아온 이만희 감독, “모범여죄수의 사흘을 영화로 만들어봅시다!”
1965년 늦여름으로 기억한다. <날개부인>(김수용, 1965)과 <갯마을>(김수용, 1965)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새 작품을 구상하고 있었다. 어느 날 이만희 감독이 예고도 없이 찾아왔다. 평소 인사 정도는 나누고 있었지만 단둘이 만난 것은 처음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 감독의 영화를 거의 다 보아왔고 주목하고 있었다. 한국의 감독 중 개성과 감성이 가장 뚜렷한 영상파로 대성하리라고 기대하는 감독이었다. 이 감독은 가식이 없는 사람 같았다. 앉자마자 단도직입적으로 “좋은 영화감이 있어 만나러 왔다.”며 말문을 열었다. 모범여죄수의 사흘간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고 싶다고 덧붙였다. 순간 머리를 번쩍 스치는 영감 같은 것을 느꼈다. 특이하고 흥미를 끄는 소재라고 생각했다. 나는 평소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소재’라고 생각했다. 드라마는 꾸미기에 달렸다. 맛없는 생선은 아무리 다듬고 요리를 해도 한계가 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이 감독이 나를 찾은 이유를 알았기에 즉시 악수를 청하면서 “우리 멋진 영화 한 편 만들어보자.”고 응수했다.
이렇게 <만추>는 탄생했다. 서둘러 김지헌 시나리오 작가를 만나 시나리오를 부탁했다. 김지헌 작가 역시 그 소재에 영감을 느낀 듯했다. 3주 정도의 고투 끝에 시나리오가 탈고되었다. 난 단숨에 읽었다. 구성이 썩 잘된 것 같았다. 이 시나리오에 이 감독의 감각이 가미되면 좋은 영화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갯마을>처럼 단순하면서도 정감과 감동을 느낄 수 있는 영화를 기대했다. 셋이 합의해 영화의 제목을 <만추>로 결정했다. 나는 어릴 때부터 만추의 계절을 좋아했다. 계절의 정취도 아름답지만 사람의 마음을 조용히 가라앉히는 이 계절의 묘미에 끌렸다. 또 이 영화를 만들고 개봉하는 시기가 늦가을이기 때문에 관객이 더욱 정감을 느끼리라 기대했다.
촬영은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다. 이 영화는 <갯마을>과 같이 번거로운 세트나 많은 배우가 필요 없다는 이 감독의 말에 제작비도 적게 들 것이라 생각했다. 3주 정도의 촬영이 끝나고 편집과 녹음 등 후반작업에 들어갔다. 이 감독과 호흡을 같이 해온 시나리오 작가 백결 씨가 가세했다. 백결 씨의 시나리오는 대사가 극도로 정제되어 영상으로 말하는 시나리오를 주로 쓰는 작가였다. 이만희 감독 역시 영상으로 말하는 영상파 감독이었다. 녹음을 마치고 기술시사가 열렸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가라앉히면서 스크린에 몰입했다. 영화는 나무랄 데 없이 완성도가 높았다.
<만추> 20만 관객동원, 최고 흥행작이 되다
이후 일반 관객을 대상으로 하는 공개 시사회가 열렸다. 이 시사회는 매우 중요했다. 첫 손님들의 반응과 입선전이 흥행 성공을 가늠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기존의 한국영화 관객보다 다소 지적 수준이 높은 관객을 대상으로 승부를 내야 할 것으로 판단했다. 당시 한국영화에 대한 선호도는 매우 까다로웠다. 첫 시사회 손님들은 영화기자, 전문비평가, 작가, 각 문화예술 분야에서 활동하는 예술가들이었다. 이분들은 내가 10여 년 동안 문화부 기자로 있을 때 친숙해진 분들이어서 나의 우군과 같았고 나의 초대에 흔쾌히 응해주었다. 시사회가 끝나고 손님들은 힘차게 박수를 치고 아무런 말 없이 시사회장을 빠져나갔다. 영화에 몰입하고 난 뒤 영화에서 느낀 감명이나 감동을 천천히 되새기는 듯했다. 시사실을 나가면서 힘주어 악수하는 손님도 많았다. 나는 시사회가 성공했음을 직감했다. 1966년 12월 초, <만추>는 명보극장에서 개봉됐다. 첫날부터 표가 매진되어 흥행 관례대로 ‘만원사례’ 봉투를 받았다. <만추>는 명보극장의 마지막 연말 프로였다. 결과는 20만에 가까운 관객을 동원했다. 당시의 20만 관객 동원은 최상급 흥행이었다. 대구, 부산 등지의 지방 흥행도 기세가 높았다. 흥행계에서는 대박이라고 부러워했다. <만추>는 국내의 영화상을 휩쓸다시피 했고 독일, 스페인, 미국, 홍콩 등 해외에도 수출되었다. 특히 일본의 신진감독이 이 영화를 리메이크해 당해 연말 결산 때 ‘영화 베스트 5’안에 진입하는 등 외국에서도 <만추>의 인지도가 높아졌다. 그 후 김기영, 김수용 감독에 의해 각각 리메이크되고 최근에는 김태용이라는 신진감독이 리메이크해 지난 2010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하는 등 명성이 사그라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이만희 감독의 <만추>는 네거필름도 없어지고 프린트 한 조각도 다시 볼 수 없어 ‘환상의 영화’가 되었다.
‘환상’이 되어버린 명작 <만추>
<만추>의 네거필름과 프린트가 없어진 것은 전적으로 나의 무관심과 실수 때문이다. <만추>를 스페인에서 사겠다고 해 네거필름을 빌려달라는 요청을 거절하지 못한 것이다. 네거필름은 다시 돌아왔으나 세관에서는 세금을 내라고 했다. 세관의 요청에 응하지 못하고 차일피일 미루다 세금을 마련해 다시 세관에 갔더니 담당자는 기한이 지나 법대로 네거필름을 한강변에서 소각해버렸다고 했다. 영화도 일종의 문화재인데 그러는 법이 어디 있는가? 난 강하게 항변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단 한 벌의 네거필름이 사라진 것이다! 땅을 치고 후회할 일이었다. 다행히 베를린 영화제에서 상영하고 반납된 프린트 한 벌이 나에게 있었다. 얼마 후 <만추>를 재상영하겠다는 사람이 있어 계약금 20만원을 받고 프린트를 내주었다. 당시 마지막으로 만든 <창공에 산다>(이만희, 1968)의 흥행 실패로 엉망이 된 시기였다. 그런데 프린트를 가지고 간 H사장은 잔금도 주지 않은 채 오리발을 내밀었다. 프린트는 자신에게도 없다고 했다. 결국 이 프린트 한 벌마저 실종되고 말았다.
부산국제영화제 측에서 <만추> 찾기에 나섰다. 미국 LA에 사는 교포 K씨가 프린트 한 벌을 사간 일이 생각나 수소문해 그에게 물어봤는데 그는 영화 장사를 하는 B씨가 잠깐 빌려달라고 해서 프린트를 주었는데 그 후 소식이 없어 지금도 그 사람을 찾는 중이라고 답했다. <만추>를 스페인에 수출할 때 도움을 준 마드리드 방송국에 근무하던 전직 외교관을 찾아 스페인 창고 어딘가에 이 영화가 남아 있지 않을까 물었다. 그는 스페인에 알아봤으나 세월이 너무 지나 찾을 길이 없다는 답변을 들었다. 이후 북에서 돌아온 신상옥 감독이 평양에서 이만희의 <만추>를 보았다는 누군가에게서 말을 들어 신상옥 감독에게 확인하려 했으나 와병 중이어서 만나지 못하고 이후 신상옥 감독은 세상을 떠났다.
이 원고를 쓰면서 최은희 여사에게 확인을 했다. 최은희 여사는 분명히 신 감독과 함께 평양에서 <만추>를 보았다고 확인해주었다. 2010년 12월 10일이었다. 나는 <만추>를 북한에 판 일도 없고 준 일도 없었다. 어찌하여 이 영화가 평양에 있을까? 김정일은 영화광이어서 세계의 이름난 영화를 수집하고 있다고 귀띔해준 사람은 일본 마이니치 신문사 출신이며 도쿄국제영화제의 디렉터로 활동하며 동유럽 영화계에 정통한 구시가베규시로 씨였다. 그는 평양에도 다녀왔고 북에 간 신상옥 감독의 소재를 처음으로 확인해준 사람이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김정일은 유명한 일본영화도 상당히 많이 가지고 있는데 절차를 통해 모은 것이 아니라 조총련 공작원들을 동원해 영화를 수집했을 것이라고 했다. 이로 미루어 북에는 한국의 이름 있는 영화도 많이 남아 있을 것이라 추측된다. 홍콩 등지에서 한국영화의 복사 프린트를 모았을 것이라 짐작된다. <만추>도 그랬을 것이다.
영상자료원 재임 시절 그리스 아테네에서 열린 국제영상자료원연맹 총회에 갔을 때의 일이다. 북에서 온 대표는 자기들은 세계영화를 연구하는 그룹을 만들고 세계영화를 연구한다고 자랑스럽게 말하는 것을 들은 일이 있다. 사실은 김정일에게 외국에서 비공식적으로 입수한 영화를 바치기도 하지만 영화를 통해 정보를 수집하고 공작용으로 활용하는 목적이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제2, 제3의 <만추>가 나오지 않길
영화도 어엿한 문화재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네거필름이나 프린트를 소중하게 보존하는 일에 소홀했다. 1974년 문공부 윤주영 장관의 부름을 받아 새로 창설된 영화진흥공사의 이사직을 맡았을 때였다. 당시 영화진흥공사 설립 정관에도 영화를 보존하는 사업이 있었지만 실행되지 않고 있었다. 나는 우선 흩어진 영화의 네거필름과 프린트를 모아야겠다고 생각해 민간 현상소에서 녹슨 채 방치되어 있는 필름들을 모으기 위해 현상소를 찾았다. 그것들은 현상료를 내지 못하거나 무관심 때문에 방치된 필름이었다. 난 그곳에서 필름을 있는 대로 얻어와 사직동에 있는 영화진흥공사 지하실을 급조해 간이칸막이를 설치하고 환풍기를 달아 보관창고를 만들었다. 아주 원시적인 시설이었지만 그것이 필름 수집의 시작이었고 동시에 영상자료원의 시작이었다. 1989년 이어령 문화부장관의 부름으로 한국필름보관소(지금의 한국영상자료원) 이사장직을 맡게 되었다. 3년 임기의 무보수 비상임 직책이었으나 나는 만족했다.
필름보관소는 당시 영화진흥공사 사무실에 있었고 출근을 해보니 5평 남짓한 사무실에 네 명의 직원이 앉아 있었다. 나아진 것이 없었다. 녹슨 필름캔만 쌓여 있었다. 이후 공식 명칭이 한국영상자료원으로 바뀌고 서초동 예술의전당으로 옮겨지며 다른 나라 영화보존고와 같이 현대화된 시설을 갖추게 되었다. 직원도 늘었고 시네마테크 사업도 시작했다. 무엇보다 필름 보존 사업을 위한 예산을 증액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만추> 필름을 잃어버렸다는 자괴감이 들어 영화 보존 사업에 대한 기초를 닦는 데 최선을 다했다. 언젠가 유럽 여행 때 프랑스 파리에 있는 시네마테크 프랑세즈를 방문한 적이 있다. 이곳은 앙리 랑글루아가 자신의 사재를 털어 자국의 초기 영화들을 모으고 보존하며 발전시킨 곳이다. 드골 정부가 이 사업에 욕심을 내 권력으로 접수하려 할 때에도 프랑스의 많은 유명 영화인이 나서서 강력히 저항하고 지켜냈다는 유명한 일화도 있다. 나도 앙리 랑글루아를 본받고 싶었다.
지금의 상황은 다르다. 새로 만든 필름의 프린트를 영상자료원에 제출해야 하는 ‘영화필름 제출제도’를 통해 현재 만들어지는 거의 모든 필름이 영상자료원에 들어와 안전하게 보존되고 있다. 영상자료원의 통계에 따르면 현재 한국에서 보유하고 있는 영화는 4,451편이라고 한다. 광복 전부터의 제작편수는 6,229편이고 미보유 영화는 1,778편이니 보유율이 71.48%인 것이다. 내가 영상자료원을 맡았을 때보다 상당히 발전한 상태다. 그러나 잃어버린 영화를 찾기 위한 노력은 계속되어야 한다. 여전히 1920년대 영화 보유율은 0%이고 1930년대는 6.8%에 불과하다. 영상자료원에 재직할 때의 일이다. 서울 변방에 사는 한 주부로부터 헌 프린트가 고물장수에게 팔려가고 있다는 제보전화를 받았다. 이런 사람도 있는데… 당시 난 <만추>를 잃어버린 자책감에 또 한번 가슴이 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