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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어린아이의 ‘노스탤지어’가 되기를
<영화천국>을 창간하던 2008년, 한국영상자료원 개관기념영화제에서 1934년 제작된 우리 영화 <청춘의 십자로>를 발굴하고 복원해 변사 공연과 함께 상영했다. 그리고 중학교 시절 나의 우상이었던 <고교얄개>를 비롯, 개봉 영화는 모두 다 보고 다녔던 대학시절의 <바보선언>, <고래사냥>, <외인구단>, <칠수와 만수> 모두 영상자료원 시네마테크에서 다시 만났다. <칠수와 만수>는 포스터 3종 중 하나를 당시 내 남자친구와 아르바이트로 디자인했더랬다. 이 영화들에 얽힌 나의 개인사는 나에게 모두 또 다른 ‘영화 한 편’들이다. 나에게 인생의 어떤 시기는 특정한 영화들과, 영화와의 인연으로 남아 있는 것 같다.
아주 어린 시절에는 명화극장이 있었다. 어린 시절(우리 집에 TV 생긴 것이 초등학교 1학년 때이니 여덟 살이다) 부터 나는 일요일 늦은 밤 TV에 방송되던 ‘명화극장’ 팬이었다. 사실 ‘명화극장’에서 한국영화는 거의 보기 힘들었고 그래서 나는 말하자면 ‘할리우드 키드’인 셈이다. 지금은 타계하신 정영일 씨 영화평도 놓치지 않고 꼬박꼬박 챙겨 보았다. 떠오르는 그림은, 야단치다 포기하고 먼저 주무시는 부모님 사이에서(안방에 TV가 있었다) 어둠 속에 훌쩍이며 앉아 TV 볼륨 낮추고 맘 졸이며 영화 보던 어린 나다. 그 어린애가 영화가 뭔지 알았던 건 아니고 그저 ‘이야기’가 재미있었던 거겠지…. 그 시절 나는 <스미스씨 워싱턴에 가다>의 주인공이었던 1930, 40년대 미국 백인 중산층을 대표하는 배우, 정말 마음 좋게 생긴 제임스 스튜어트 아저씨를 제일 좋아했다.
이렇게 영화를 좋아했지만 원래 나의 꿈은 ‘화가’였고 결국 디자인을 전공하게 되었다. 대학 졸업 후 한참 편집디자이너로 책을 만들다가 아무래도 영화를 만들어야겠다 싶어 시나리오 공부를 위해 유학을 결심하고 잘 다니던 출판사를 그만두었다. 그리고 유학 준비에 정신 없을 때 우연히 한겨레신문사 영화잡지 창간 이야기를 들었다. 그야말로 이건 나의 일이라고 생각했고 무작정 달려가 대한민국에 이 잡지 만들 사람 나밖에 없다 큰소리 쳐서 결국 난 <씨네21> 창간 디자인 작업에 참여했고 그 후 11년 동안 만들었다.
그리고 <영화천국>을 창간하고 계속 디자인하고 있다. 한국영상자료원 영화잡지 창간 또한 그저 ‘그건 당연히 내가 해야 할 일’이라 생각했다. 주로 신작들을 다루던 <씨네21>을 만들 때와는 달리 오래된 한국영화들을 다루는 <영화천국>을 만들면서는 종종 지난 날들을 떠올리게 된다. 이것이 <영화천국>을 통해 맺은 영상자료원과의 인연이 고맙고 반가운 이유다.
1989년 내가 처음 미국에 갔을 때 거기엔 이미100개도 넘는 TV 채널이 있었고 그중에 옛날 흑백영화를 종일 방송하는 ‘노스탤지어’라는 채널이 있었다. 그 ‘노스탤지어’에서 나의 제임스 스튜어트 아저씨 영화들을 다시 보았다, 울면서. 지금 어느 어린아이가 우리 영화들을 보며 자라서 어른이 되어 문득 여기 영상자료원에서 와 다시 그 영화들을 보며 울지도 모른다. 내가 미국의 TV채널 ‘노스탤지어’에서 내 어릴 적 추억을 보며 울었던 것처럼.
by.
신지희(영화천국 아트디렉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