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지숙의 시간에서 품고 있었던 의혹이 상권의 시간 속에서 자연스럽게 풀리는 것을 찾아내는 데 성공한다면 당신은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영화적 재미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한국영화 중 하나인 <강원도의 힘> 전단지에 쓰여 있는 문구다. 그렇다. 나는 저 문구에 현혹되어 홍상수 감독의 두 번째 영화인 <강원도의 힘>을 만나게 되었다. 영퀴방 사람들이 다 좋다던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에 큰 감흥이 없었던 나는 <강원도의 힘>을 보고 마침내 홍상수 감독의 영화적 재미를 경험하게 되었고, 지금까지도 그의 매력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두 개의 시간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들은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 있었다는 특이한 구성이 마음에 들었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 촘촘히 세워가지고 빠닥빠닥 붙여놓으면 한 백만 안 들어갈 것 같아?”. “형, 저거 한순간이다. 저 사람들은 저게 얼마나 위험한지 모르나봐?” 같은 일상적이고 특별할 것 없는 대사들이 더욱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지금까지도 한 가지 스타일을 자유롭게 변주하는 홍상수 감독이 두 번째 영화로 ‘강원도’를 떠올린 이유는 무엇일까?
내 고향은 강원도 원주다. 처음 <강원도의 힘> 제목을 듣고 그 묘한 뉘앙스에 이끌린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나는 ‘강원도’ 원주에서 태어나 자랐고, ‘강원도’ 춘천에서 대학생활을 했으며, ‘강원도’ 횡성에서 군생활을 했다. 20대 후반이 되어 서울로 올 때까지 오리지널 ‘강원도’토박이였던 셈이다. 그 당시 내 꿈은 어떻게든 이 지긋지긋한 강원도를 탈출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강원도’라는 단어도 참으로 촌스럽고 싫기만 했다. 결국 서울에 정착하고 서울시민이 된 나는 서울사람들의 특이한 표현법을 발견하게 되었다. 강원도에는 춘천, 원주, 강릉 같은 수많은 도시가 있지만, 서울사람들에게 그것은 무의미한 ‘지명’에 불과했다.
그들은 강원도의 그 모든 도시를 통칭해서 그저 ‘강원도’라 부른다. “나, 강원도 여행 갔다 왔어”라는 친구의 말에 나는 항상 이렇게 되묻는다. “강원도 어디?” 대체 서울사람들은 왜 ‘강원도’라고 통칭해서 부를까? 나는 그 이유가 심히 궁금했다. 누군가에겐 한여름의 더위를 피하러 오는 곳, 누군가에겐 대도시의 일상탈출을 위한 도피처… 저마다 다른 이미지의 ‘강원도’가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을 것이다. 영화 <강원도의 힘>도 사실 영화 속 배경으로 치자면 ‘속초의 힘’ 쯤 되겠지만, 홍상수 감독도 그곳을 그저 ‘강원도’라 부르는, 똑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서울생활을 수년째 한 나는 최근 한국영상자료원에서 <강원도의 힘>을 스크린으로 다시 보고 난 후 그 ‘강원도’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게 되었다. 1998년 처음 영화를 보고 12년 만에 알게 된 것이다.
지숙과 상권이 서로 마음 깊이 간직했던 비밀을 잊기 위해 찾는 미지의 공간. 친구들, 그리고 후배와 동행한 주인공들이 서로 다투고 화해하고 보듬어주는 공간. 그곳을 통해 치유되는 마음속의 상처들. 그 공간이 바로 홍상수 감독이 말하고자 했던 ‘강원도’와 ‘강원도의 힘’인 것이다.
내가 이 영화를 특별하게 생각하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다. 태어나고 자란 고향으로서의 ‘강원도’와 영화 속에서 보여지는 상징적인 아이콘으로서의 ‘강원도’가 묘하게 대립되는 느낌 말이다.
<강원도의 힘>은 마치 길고 달콤했던 휴가의 후유증 같은 판타지 영화다. 지숙과 상권이 강원도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서울은 무미건조하고 지루한 일상처럼 보이지만, 강원도에서의 그들은 좀 더 여유 있고, 대담하고, 기괴하기까지 하다. ‘강원도의 힘’에 이끌려버린 그들의 환상인지도 모르겠다.
항상 바쁘고 정신 없는 서울이라는 공간에서 마음의 여유가 없는 지금의 나는 가끔 아니 자주 ‘강원도’가 그립다. 무작정 떠나고 싶고 무언가에 위안받고 싶은 그런 기분이 들어서일까. 그냥 기분이 우울할 때마다 난 아무 생각 없이 <강원도의 힘> VHS 테이프를 틀어놓는다. 그저 화면만 보고 있어도 마음이 편해지는 느낌. 그게 <강원도의 힘>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