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메이션] 한국 애니메이션의 역사
한국 애니메이션이 탄생한 지도 반세기가 흘렀다. 1950년대 후반, 상업용 광고부터 시작한 한국 애니메이션은 1967년 신동헌 감독의 <홍길동>을 기점으로 본격적인 극장용 애니메이션이 제작되었다. 그러나 <홍길동> 이후 극장용 장편 애니메이션은 많은 부침을 경험하며 현재에 이르고 있다.
<홍길동>은 한국 애니메이션사(史)에서 한 획을 그은 중요한 작품이다. 당시 부족한 기자재 및 기술력 그리고 애니메이션 문화에 대한 인식 부재 등 열악한 상황 속에서 작품성과 흥행성을 갖춘 작품이 탄생했다는 것은 한국 애니메이션의 저력과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지만 현재, 한국 애니메이션 특히 극장용 장편 애니메이션은 쉽게 찾아볼 수 없다. 한국 애니메이션의 시작과 발전과정을 통해 한국 애니메이션의 문제점을 짚어보고 가능성과 미래를 예측했다.
한국 애니메이션의 시작
일제강점기, 영화와 함께 유입된 애니메이션은 6?25전쟁 이후 본격적으로 제작되기 시작했다. 당시 국내에는 외국영화 특히 할리우드의 많은 작품이 수입 상영되었는데 이때 세기상사가 <잠자는 숲속의 공주> <피터 팬> 등의 작품을 수입하여 흥행에 큰 성공을 거두자 국내에서도 애니메이션 제작을 기획했다.
세기상사는 1967년 신동헌을 감독으로 내세워 <홍길동>을 제작했다. 국내 최초로 기획에서 제작까지 과감한 도전을 하며 극장용 자?편애니메이션을 관객에게 선보였다. 디즈니와 차별화된 이야기와 독창적인 캐릭터 디자인과 시각적 스타일은 국내 관객에게 큰 인기를 얻으며 한국에서 애니메이션 제작의 가능성을 열었다. 이후 1967년부터 1969년 사이에만 세기상사는 <흥부와 놀부>(1967), <선화공주와 손오공>(1968), <우주의 왕자 황금철인>(1969) 등을 연속해 개봉한다. 특히 <우주의 왕자 황금철인>은 TBC에서 인기리에 방송했던 <황금박쥐>를 편집해 극장용으로 제작한 것이다. 그러나 <홍길동>을 제외한 나머지 작품들은 인기를 얻지 못하며 흥행에 참패했다. TV가 점차적으로 보급되고 있던 1960년대 말, KBS, MBC 그리고 TBC 등 TV방송국들이 본격적으로 수입 애니메이션을 방송하면서 극장용 장편 애니메이션 시장은 급격히 위축되기 시작했다.
TV 애니메이션 방영과 하청 애니메이션
이 시기 TV가 대중적인 매체로서 영향력을 키워가는 동안 국내에서도 TV용 애니메이션 제작이 시도되었다. 최초의 민간상업방송 TBC는 제일동화라는 부서를 차리고 1968년 <황금박쥐>를 제작 및 방영한다. 그러나 이 작품은 시작 단계부터 TBC에서 독립적으로 제작한 것이 아니라 일본 요미우리 TV와 합작으로 제작, 기획되었으며 완성작품은 일본에서 먼저 방영되었다. 외형상 합작 형식이었지만 실제 제작과정을 살펴보면 애니메이션 제작에 가장 중요한 스토리, 기획, 캐릭터 디자인, 움직임 연출 등은 일본에서 담당하고 동화, 클린업, 컬러링 등의 단순하고 반복적인 작업은 한국에서 담당하는 이른바 하도급(OEM) 제작이 이루어진 것이다. <캔디 캔디> <독수리 오형제> 등은 일본의 하청을 받아 제작된 대표적인 애니메이션이라 할 수 있다.
한국 애니메이션이 주로 하도급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은 상대적으로 다른 영상물에 비해 높은 제작비용과 실패 위험이 크다는 경제적 논리로 제작사들이 자체 제작을 기피했기 때문이다. 이또한 국내의 상황과 많은 물량을 통해 안정된 보수를 제공하는 일본 및 미국 등 애니메이션 산업의 호황기를 맞았다는 외부적 요인이 상호작용한 결과다. 거기에 정치사회적으로 검열이 일상화한 1970~80년대에 애니메이션을 저급한 문화로 치부하고 주제 및 내용에 있어 많은 제약이 가해졌다는 것 또한 창작물 제작 기피 경향에 영향을 주었다. 결국, 애니메이션에 대한 사회의 부정적 인식과 경제논리에 따라 한국 애니메이션은 하도급 작업을 중심으로 발전했고 이러한 현상으로 자체 창작 애니메이션을 제작하는 데 있어 창작 기획력 부족과 핵심기술 축적 부족이라는 부작용을 낳게 되었다.
사회 환경의 변화와 TV용 애니메이션 제작
1980년대 후반 한국 애니메이션의 제작은 새롭게 변모하기 시작했다. 1970년대부터 시작된 하도급 애니메이션 제작 중심에서 자체 창작 애니메이션 제작 중심으로 전환된 것이다. 이에 따라 드디어 한국도 그동안 하도급으로 쌓은 노하우를 바탕으로 자체적으로 TV용 애니메이션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가장 큰 원인은 ‘88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한국 사회를 비롯해 문화예술계에는 국가적 자존심 및 문화의 자주성 그리고 민족의 주체성을 찾으려는 움직임이 조성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 방송사는 어린이들을 위해 국내 애니메이션을 방영해야 한다는 각계의 요구가 이어졌다. 따라서 KBS와 MBC를 중심으로 본격적인 자체 창작 애니메이션이 제작되었고, 그동안 하도급으로 쌓아온 애니메이션 제작 기술은 TV용 애니메이션 활성화에 크게 기여하게 되었다. 각 방송사들은 1970년대 하도급을 담당했던 제작사에 제작을 의뢰했다. 대원동화, 세영동화 그리고 신원동화 등은 그간 하도급 작업을 통해 축적된 경험과 노하우를 바탕으로 TV용 애니메이션을 제작했다.
1987년 KBS의 <떠돌이 까치>, MBC의<달려라 호돌이>를 시작으로 <달려라 하니> <동화나라 ABC> <아기공룡 둘리> 등이 제작됐고, 시청자에게 큰 호응을 얻자 각 방송사에서 애니메이션을 경쟁적으로 제작하면서 TV시리즈 애니메이션의 전성기를 맞았다.
한국 애니메이션의 전망과 미래
현재 애니메이션은 사진과 영화에서 보여주는 기본적인 정보 전달은 물론 음악과 서사를 결합해 문화 콘텐츠를 이끌어가는 대표적인 예술 분야로 자리 잡았다. 또한 애니메이션은 원소스 멀티유즈 전략과 미디어 믹스 전략으로 시나리오 단계부터 다양한 매체 및 영역으로 확장해 부가가치를 높이고 있다. 이렇게 애니메이션의 산업적 가치가 높고 전망이 밝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 제작되는 애니메이션 특히 극장용 애니메이션은 찾아보기가 힘든데 이는 기획력 부족 특히 소재 개발과 스토리 구성 및 시나리오 개발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한국애니메이션 산업의 미래는 밝다. 많은 대학의 애니메이션 학과에서 훌륭한 애니메이터를 양성하고 있으며 제작기술 또한 뛰어나기 때문이다. 적극적인 기획력과 시나리오의 부재를 극복한다면 영화의 애니메이션화 추세와 더불어 한국 애니메이션 산업의 미래는 밝다고 전망할 수 있다.
by.양경미(건국대 애니메이션학과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