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밤 한 남자가 핀란드 헬싱키 역에 도착한다. 남루한 복장의 남자는 공원 벤치에 앉아 졸다가 지나가던 깡패들에게 별다른 이유 없이 무지막지하게 얻어맞고 의식을 잃는다. 병원으로 옮겨진 남자는 의사로부터 사망선고를 받지만 잠시 후 기적처럼 다시 살아나 (아니 다시 태어난 것인지도 모른다.) 온몸에 붕대를 감고 병원을 나온다.
머리를 다친 남자는 다행히 컨테이너를 개조해 모여 살고 있는 마을의 한 가족에게 발견되어 건강을 되찾지만 이미 과거의 모든 기억을 잃어버린 상태. 남자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이제 아무것도 없다. 남자는 주위 사람들의 도움 속에 과거의 기억을 되찾으려 하지만 자신의 새로운 삶에 여유를 가지며 즐기는 듯도 하다.
남자는 마을의 가난한 이웃들을 도우며 사는 구세군의 여인 ‘이르마’와 사랑에 빠진다. 그리고 이르마와의 사랑을 통해 점차 활기차게 변해간다. 여전히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에게는 새로운 인생이 두렵기보다는 행복해 보인다.
감독 아키 카우리스마키는 사회적 권력이나 계급에 포함되지 못한 소외된 이들의 모습을 담아내며, 그의 다른 영화와 마찬가지로 이 영화에서도 가진 것 하나 없는 자들이 원하는 것은 특별한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순간의 삶을 꾸려나갈 아주 사소한 것들임을 보여준다.
영화가 후반으로 갈수록 “이 남자 과연 기억을 되찾을까?” 하는 의문을 갖게 되지만 그리 크게 생각하게 만들지는 않는다. 그리고 밝혀지는 남자의 과거 또한 현재에 삶에 특별한 영향을 미치지도 않는다. 냉소적이기보다는 웃을 준비를 하고 있는 듯한 무표정한 배우들의 독특하고 엉뚱한 화법이 매력적이다.
<과거가 없는 남자(The Man Without A Past)>는 2002년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출품되어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했으며 제목과는 반대로 아키 카우리스마키 감독의 과거 영화들이 가장 적절하게 녹아든 작품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