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달 전 초등학교 6학년인 아들에게 구로사와 아키라의 <7인의 사무라이>를 보여주었다. 60년 전의 옛날 흑백영화에다 러닝타임이 3시간이 훨씬 넘는 그 영화를 어떻게 볼까 궁금했는데, 아들은 무척 재미있게 보는 것이었다. 그때 나는 새삼 구로사와 아키라의 위대성을 실감했다. 구로사와 영화가 시대와 공간, 나이를 초월해 까다로운 세계 평론가부터 어린아이에 이르기까지 재미와 감동을 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1910년 일본 도쿄에서 태어난 구로사와 아키라는 서양화를 공부하다가 무성영화 변사로 일하던 셋째형의 영향으로 영화를 좋아하게 되었다. 그래서 27세 때 영화사에 공채 조감독으로 정식 입문, 야마모토 가지로 감독의 연출부로 도제식 영화 수업을 받았다. 그리고 1943년 유도라는 무술을 통해 어른으로 성장하는 한 젊은이의 이야기를 다룬 <스가타 산시로(姿三四郞)>로 데뷔해서 11번째 작품인 <라쇼몽>이 베니스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받아 일본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감독으로 평가를 받게 되었다. 이후 스승과 제자 이야기를 그린 <마다다요>(1993)까지 50년 동안 총 30편의 영화를 만들고 1998년 89세에 작고했다.
구로사와 아키라는 1999년 미국 <타임>지에서 20세기에 아시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20인을 선정했을 때 간디, 마오쩌둥, 달라이 라마와 함께 오른 적이 있고, 1992년 영국의 영화 계간지 에서 평론가들 대상으로 조사한 ‘세계 영화 역사상 10대 영화’에 그의 영화 <라쇼몽>(1950)과 <7인의 사무라이>(1954)가 동시에 선정되기도 했다. 그만큼 그의 영화적인 업적은 영화는 물론 문화 및 사회 전반에까지 커다란 영향력을 끼쳤다. 그는 동양, 특히 일본 문화를 서구에 알리는 일종의 영상 전도사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스필버그, 뤼크 베송, 오우삼 등과 같은 세계의 모든 감독이 그의 영화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오우삼은 구로사와로부터 의리와 인정, 타인을 도와주는 멋진 모습을 배웠다면서 “<7인의 사무라이>나 <요짐보>(1961)의 다이내믹한 템포는 내 영화의 위대한 교과서였다”라고 말했다. 예술영화의 거장인 타르코프스키나 우디 앨런 같은 감독들조차 그의 영향을 노골적으로 인정했다. 특히 우디 앨런은 도스토예프스키적인 죄의식의 문제를 탐구한 작품 <맨해튼>(1979)을 찍은 직후의 인터뷰에서 한 여자에 대한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남자의 심리묘사에 구로사와의 <백치>(1951)로부터 많은 영감을 받았다고 고백한 바 있다. 그는 리어왕을 각색한 <란>(1985)을 본 후 “셰익스피어를 찍을 수 있는 감독은 구로사와밖에 없다”고 찬사를 바치기도 했다.
구로사와 아키라는 러시아에서 찍은 1975년작 <데루스 우잘라>를 제외하고 일본을 떠나 영화공부나 연출을 한 적이 거의 없지만, 그의 영화가 동서양을 막론하고 대중적인 공감을 얻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의 영화언어의 보편성과 세련됨 덕분일 것이다. 그의 영화 대부분이 자국의 역사나 현재를 배경으로 하고 있음에도 국가와 민족을 초월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주제를 다룬다. 그래서 <라쇼몽> <7인의 사무라이> <요짐보> 같은 영화가 수없이 현대판 또는 할리우드 버전으로 번안되거나 리메이크되곤 했다. 프랑스 누벨바그 감독들의 스승이자 유명 평론가였던 앙드레 바쟁은 “구로사와의 영화는 좋은 영화를 이루는 모든 구성요소를 보여주고 있다. 일본문명이 발전시킨 연극과 조형예술의 위대한 전통이 서구문명과 만나 구로사와의 훌륭한 영화를 탄생시킨 것이다”라고 말했다.
구로사와 영화의 장점은 내용과 형식이 모두 뛰어나게 조화를 이룬다는 데 있다. 그의 영화에선 파격적인 주제나 기존관습을 깨뜨리는 혁신적인 미학은 시도되지 않지만, 항상 이미 시도된 주제나 미학이 보다 한 차원 높게 표현된다. 가령 <라쇼몽>에서의 ‘진실의 상대성’이란 주제의식은 그다지 새로운 것은 아니고, 사용된 다양한 테크닉 역시 이미 미국영화에서 존 포드, 윌리엄 와일러 등과 같은 거장들이 시도해왔던 것들이다. 그러나 그러한 무거운 주제를 <라쇼몽>만큼 완벽에 가까운 형식으로 시각화한 영화는 매우 드물다. 그는 서구적인 테크닉에다 일본적인 독특한 화면 구성과 절제미학을 가미해 자기만의 스타일을 재창조해냈던 것이다.
구로사와의 대표작인 <7인의 사무라이>의 내용과 형식 미학은 미야자키 하야오 같은 애니메이션 영화의 대가뿐 아니라 스필버그, 루카스 등과 같은 현대 미국 감독들의 교과서다. 하지만 재미있게도 구로사와 영화 미학의 전통은 대부분 미국영화, 특히 존 포드 영화에서 왔다. 존 포드의 <황야의 결투>(1946)를 보면 그 플롯과 영화적인 형식이 <7인의 사무라이>와 유사한 부분이 많음을 알 수 있다. 구로사와는 비록 미국영화에서 많은 것을 인용했지만 그의 영화는 이후의 미국영화 미학에 훨씬 강력한 영향을 끼쳤다. 특히 조지 루카스의 <스타워즈>는 스토리의 기본 플롯과 인물 캐릭터를 구로사와의 <숨은 요새의 세 악인>에서 노골적으로 따왔을 정도다.
구로사와는 항상 휴머니즘, 인간의 본성 탐구, 부조리한 사회제도 비판 등과 같은 범세계적이거나 보편적인 주제를 선호한다. <이키루>(1952)와 같은 영화에선 사망 선고를 받은 한 중년 남자를 통해 삶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만들고, 더 나아가 실존적인 문제까지 다룬다. 앙드레 바쟁이 “<이키루>는 내가 이제껏 보아온 일본영화 가운데 가장 아름답고 감동적이다. 이 영화가 보여준 풍부한 도덕적, 지적, 심미적인 세계에 굴복하고 말았다. 내용뿐 아니라 시나리오에도 비교할 수조차 없이 중요한 가치들을 용해해놓았다”고 격찬할 정도였다. 권력에 대한 무한한 탐욕 때문에 파멸해가는 인물들을 그린 <맥베스>를 영화화한 <거미집의 성>(1957)은 옥스퍼드 사전에 셰익스피어의 희곡을 가장 잘 각색한 영화로 올라가 있을 정도다.
주제는 무겁지만 항상 결말은 낙관적인 게 구로사와 영화의 또 다른 특성인데, <라쇼몽>을 보면 알 수 있다. 구로사와는 그 영화에서 아쿠다카와 류노스케 원작에 나타난 염세적인 세계관을 새롭게 각색한 결말을 통해 낙천적인 세계관으로 바꿔버렸다. 그가 중년에 접어들어 찍은 <요짐보>(1961), <쓰바키 산주로>(1962), <붉은 수염>(1965) 같은 영화에선 일종의 교훈적인 주제를 담기도 했다. 감독 자신의 입장에서 당대의 젊은이들에게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교훈을 사무라이나 의사라는 캐릭터를 통해 설파해 상업적으로도 큰 성공을 거두었다. 구로사와 영화의 주제의식과 미학을 심화시키는 데 기본 바탕을 제공한 사람으론 먼저 셰익스피어와 도스토예프스키를 들 수 있겠다. 그들의 희곡과 소설은 이미 <백치> <거미집의 성> <란>을 통해 영화화되었지만, 구로사와의 다른 작품에도 인간의 심층적인 면을 탐구하는 데 많은 영향을 주었다. 구로사와는 미조구치 겐지나 오즈 야스지로 같은 일본 내 선배 감독들의 리얼리티에 대한 묘사력과 정적이고 절제된 단순성의 미학에서도 영향을 받았다. 그가 서구적인 스타일을 많이 활용한다고 하지만 항상 일본적인 미학을 기본 축으로 하고 있다는 점을 결코 간과해선 안 될 것이다.
구로사와는 영화에서 캐릭터를 매우 중시하고, 세 명의 배우를 자신의 페르소나로 활용했다. 그의 주요한 영화는 대부분 시무라 다카시(志村 喬, 1905~1982)와 미후네 도시로(三船敏郞, 1920~1997) 또는 미후네 도시로와 나카다이 다쓰야(仲代達矢, 1932~)라는 두 상반된 캐릭터의 대립 과정을 통해 휴머니즘과 인간 본성 탐구에 관한 주제를 드러낸다. <주정뱅이 천사>와 <7인의 사무라이>는 미후네 도시로와 시무라 다카시의 캐릭터 대립을 보여준 대표적인 경우다. 두 배우는 외모부터가 대조적인데, 미후네는 윤곽이 뚜렷하고 강해 보이는 반면, 시무라는 평범하고 소시민적이다. <7인의 사무라이>를 제외한 대부분의 영화에서 미후네는 주로 귀족적이고, 강하고, 열정적인 역할을 맡고, 시무라는 소시민적이고, 내성적이고, 나약한 감성을 지닌 역할을 맡았다. 두 배우는 1950년대 이후 구로사와 절정기 영화 이력에서 구로사와 자신의 양면적인 캐릭터를 둘로 나눠 보여주는 것 같아 흥미롭다. 특히 구로사와보다 다섯 살 많은 시무라 다카시는 본격적인 연기 데뷔작인 <스가타 산시로>부터 작고하기 2년 전 <카게무샤>까지 배우로서의 인생을 거의 구로사와와 분신처럼 함께한 배우다. 시무라 다카시가 연로하자 1960년 <요짐보>와 <쓰바키 산주로>에서는 미후네 도시로의 상대역으로 날카로운 눈매와 서구적인 외모를 가진 나카다이 다쓰야가 구로사와의 또 다른 분신 역할로 새롭게 등장했다. 원래 일본의 또 다른 거장 고바야시 마사키(1916~1996)의 페르소나였던 그는 <카게무샤>와 <란>에서 주인공을 맡았다. 유일하게 생존한 구로사와의 페르소나인 나카다이 다쓰야가 이번 구로사와 100주년 기념영화제로 한국에 방문한다니 무척 기대된다.
구로사와는 1970년대에 잠시 좌절을 겪기도 했지만 할리우드의 영화적 제자인 코폴라, 스필버그, 루카스 덕택에 <카게무샤>(1980), <란>등으로 화려하게 복귀했고, 80세가 넘은 나이에도 <8월의 광시곡>(1991), <마다다요>를 연출한 행복한 거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