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름 아키비스트(내 경우는 음향 분야 일도 하기 때문에 시청각 아키비스트)로 산다는 것’은 ‘내가 사랑하는 매체를 가지고 일하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내게 있어서는 윤리적 의무인, 기억이 사라지는 것을 그냥 방치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보존해 항상 이를 잊지 않도록 하는 일을 의미하기도 한다. 공익을 위해 일하는 다른 직업과 마찬가지로, 필름 아키비스트는 단순한 직업이 아닌 천직이다. 만일 이 일이 가슴속의 열정을 깨우지 않는다면, 매일 아침 출근하고 싶어 저절로 눈이 떠지지 않는다면, 과거에 대한 기록을 발견하는 일이 한없이 매혹적인 여행으로 느껴지지 않는다면, 아마도 필름 아키비스트는 나에게 맞는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받아들여야만 하는 사실이 있다. 적어도 재정적인 면에서는 풍요로울 수 없다. 동료들에게 인정받는 것 이외에 대단한 명성이나 세속적인 지위를 얻지는 못할 것이다. 돈을 받지 않고 초과로 일해야 될지도 모른다. 나의 수고로 얻은 결과에서 혜택을 받고 있는 사회가 내 수고를 당연한 것으로 여길 수도 있다. 모두가 고마워하는 것도 아니다. 아카이브는 사회의 최첨단에 놓여 있으며, 실제로는 투자임에도 불구하고 비용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항상 자원을 얻기 위해 싸워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일 자체가 진정으로 큰 보상이다. 판에 박힌 말처럼 들리겠지만 이 경우에는 말뿐이 아니다. 수집, 보존되고 복원, 재구성되어 아카이브 보관고에 보존되거나 관객들에게 보여지는 모든 영화자료가 성과다. 무언가를 만들어나가는 것이다. 필름 아키비스트는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과 미래를 잇는 필수적 연결 고리다. 자신이 하는 일이 대중에게 미치는 영향을 수치로 계산할 수는 없겠지만 세계의 미래 의식을 만들어가는 사람이라는 것은 스스로 알 수 있다. 복원된 자료, 카탈로그, 소장품 관리 시스템, 상영 기록이나 홍보물을 보며 “내가 했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모든 아키비스트는 아키비스트로 일하게 된 사연을 가지고 있다. 내 경우에는, 여섯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매우 현명한 한 산타클로스로부터 장난감 영사기를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은 일부터 시작해, 예측하지 못한 일련의 사건을 겪으며 결국 1968년 호주 국립도서관의 초창기 필름 아카이브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때는 몰랐지만 천직을 찾은 것이었다! 각자의 사연을 공유하는 것은 아키비스트 집단의 구성원으로서 얻는 경험 중에서도 특히 만족스러운 부분이다. 우리의 출신 배경은 제 각각이고, 놀랍게도 연령 역시 다양하다. 아무런 관계도 없는 사업이나 공공 서비스 부문에서 오래 근무한 후 아키비스트가 되는 경우도 있다.
2001년에 국립영화음향자료원(National Film and Sound Archive)에서 은퇴한 후 호주에서 흔히 전문 실업자라 부르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을 때 - 나는 자문 업무를 시작했으며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바빠졌다 - 자명한 이치를 발견하게 되었다. 천직은 인생의 많은 통과의례를 거친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는 거다. 아카이브에 대한 업무 지식이 요구될 것이며 그러한 지식을 계속 활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글을 쓰거나 강의를 하며 전문적인 협회의 위원으로 활동할 수 있고, ‘직장’이 있었을 때는 생각할 수도 없었던 활동에 시간을 낼 수도 있다. 그리고 특히, 어디에 매여 있지 않은 개인으로서 더 효율적으로 아카이브 전투에 임할 수도 있다.
이 모든 것의 이면에는 구직 면접에서는 절대로 이야기하지 말아야 할 비밀이 숨어 있다. 바로, 필름 아키비스트로서의 일이 재미있다는 것이다. 그렇다, 정말 재미있다! 직장에서 너무 재미있는 일, 너무 재미있어서 돈을 받지 않고도 할 수 있는 일로 급여를 주는 상황을 상상할 수 있겠는가? 처음으로 장난감 영사기를 갖게 됐을 때, 나는 영화를 상영하는 일이 재미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영화를 보여주는 일은 창조적이면서 매우 즐거운 경험이다. 그리고 영화 상영은 아키비스트 업무의 한 분야일 뿐이다. 다른 분야도 모두 그만큼 재미있다.
/ 아카이브 협회 www.archival.com.a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