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산업의 외형적 성장은 문화산업을 성장 동력으로 삼아 재정적, 제도적 지원을 쏟아 넣은 정권의 판단을 출발점으로 삼는다. 그런 정권의 판단은 IMF 경제 위기 상황에서 탈출하기 위해 신성장 동력이 필요했던 당시의 상황과 문화산업의 가치에 대한 사회적 인식의 성장에 바탕을 둔 자연스러운 과정이었다. 1960년대 정부가 주도하는 산업화 시도에서 실패를 경험했던 한국 영화산업은 1990년대 대기업의 진출로 산업화의 초석을 다졌고, 2000년대에 투자조합을 통한 대규모 자본 유입이라는 가속 페달을 밟게 되었다.
10여 년의 산업적.정책적 변화와 발전의 결과로 한국영화는 시장 점유율, 관객수, 스크린 수, 제작 편수 등 외형적 성장을 거듭했다. 그러나 외형의 성장을 따라가지 못한 내적 성장의 부실- 합리적인 수익 분배 구조 정착 실패, 부가 시장 몰락, 수익률 하락 등의 현상-은 2007년 즈음부터 영화산업에 급격한 위축을 불러왔다. 한국영화계는 이 큰 폭의 상승과 하락이라는 10년 곡선의 끝을 위로 올릴 반전을 불러올지 아니면 힘없이 아래로 떨어뜨릴지 궁금한 상태에서 2010년을 맞이하고 있다.
숫자로 본 10년
위의 표에 보이는 수치만으로도 한국 영화산업의 외형적 성장과 급격한 위축은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수입 면으로 봤을 때 극장 매출은 2000년 3460억원에서 2008년 9794억원으로 지속적으로 상승하고 있다. 그러나 최고점은 2007년이었고 2008년에는 오히려 줄어든 수치다. 극장 매출과 달리 부가시장 매출은 눈에 띄는 규모로 축소되고 있어서 2000년 7832억 규모에서 2007년에는 오히려 2750억 원으로 거의 3분의 1토막이 난 모양새다. 해외 수출도 2000년대 들어 엄청난 기세로 상승하다가 2005년 7599만 달러로 최고점을 찍은 이후 2006년과 2007년에 각각 2451만 달러와 1228만 달러로 가파르게 미끄러지다가 2008년에 들어서야 겨우 회 복세를 보였다.
특히 수입 부문에서 극장 매출 비중이 계속 늘어서 이제 거의 80%에 육박하는 상황은 암울하기만 하다. 이 말은 부가시장의 사멸로 인해서 극장만이 유일한 수입원이 되는 매우 단순한 구조로 가고 있다는 말이고, 다양한 윈도 효과로 수익을 극대화해야 하는 영화산업의 근본 구조 자체를 뒤흔들어서 영화산업의 존립을 위협하는 상태라는 말의 다른 표현이다.
비용 면에서 봤을 때 연간 제작 편수도 지속적으로 늘어 2005년부터는 100편대를 넘어섰고, 평균 제작비도 꾸준히 증가했다. 그러나 한국영화 전체에 투입된 총제작비를 추산해보면 2006년까지 지속적으로 자본이 투입되다가 2007년부터 투입되는 자본이 쑥쑥 줄어들기 시작해서 2008년에는 아예 -29.4% 의 감소세를 보였다. 즉 영화산업에 투입되는 자본이 주춤하고 있다는 말이다.
한국영화계가 대외적으로 가장 크게 자랑하던 한국영화 시장점유율은 10여 년간 꾸준히 50%대를 유지했었으나 2008년에 42%로 떨어졌다. 국민 1인당 연간 관람횟수도 3.2회까지 상승했으나 2008년에 3.0회로 줄어들었다. 제작과 투자 측면에서의 위축이 소비, 상영 시장에서의 위축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숫자의 안쪽
그렇다면 10년간 숫자 - 화려하게 치솟았다 한순간에 하락하는 -는 어떻게 해서 나온 것일까? 지금 우리가 처한 가장 심각한 문제는 투자 자본이 머뭇거리면서 돈줄이 말라붙고 있다는 것이다. 1990년대 대기업은 비디오 카세트라는 하드웨어를 팔기 위해 소프트웨어인 영화를 제작하는 영화제작자에게 비디오 판권 선판매 형식으로 제작비를 투자했다. 그러나 IMF 위기 체계에서 대기업이 영상 부문에 구조조정을 단행한 이후, 돈이 말라버린 영화계에 새로운 재원은 벤처 캐피털이었다. 2000년대는 벤처 캐피털을 주요 운영 주체로 삼아 투자 수익률을 목적으로 하는 영상전문투자조합과 CJ, 쇼박스, 롯데 등의 대기업 계열 투자배급사가 영화계의 주요 투자원이다. 제작자들은 영화 프로젝트를 기획, 개발해서 투자배급사와 투자 조합으로부터 제작비를 유치하고, 투자자들은 매출에서 발생한 수익을 제작사와 나누는 구조다. 영상전문 투자조합을 통해 영화 투자의 물꼬를 트려던 정책이 효과를 발휘해 2000년대 초반부터 중반까지 영화계에 많은 자본이 흘러들어오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산업은 외형적인 성장세를 보인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가장 크게 문제가 된 지점은 영화계 전체의 수익률 악화로 인해서 투자배급사와 투자 조합 등의 투자 주체들이 투자를 꺼리게 되면서 영화계에 2000년대 중반까지 넘쳐흐르던 돈이 급격하게 말라붙게 된 것이다. 2000년대 중반까지도 비록 전체적으로는 마이너스 수익률을 보였지만,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이라는 영화산업의 특성에 대한 기대 때문에 자본은 지속적으로 유입되었다. 그러나 불법 다운로드와 불법 복제물의 범람이 가져온 부가 시장의 붕괴와 관객의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빠르게 상
승한 제작비, 그리고 극장 비중이 절대적이 되어가는 매출구조에서 살아남기 위해 마케팅 비용을 추가로 투입하는 상태는 전체 수익률 악화라는 악순환을 불러왔다. 그 결과 2007년 후반 즈음부터 자본이 극도로 몸을 사리고 투자에 인색해지는 사태가 발생했다.
제작비 상승과 부가 시장 붕괴, 극장 매출 의존도 강화에 따른 수익률 악화와 이를 원인으로 하는 제작 자본의 위축은 결국 영화 산업 전체를 얼어붙게 하는 상황으로 이어졌고, 최소한의 수익률이라도 올리고자 하는 투자자들은 제작사들의 몫을 빼앗아서라도 투자금을 회수하려고 제작사와 투자사 간의 수익 분배를 제작사에 불리하게 몰아갔다. 이에 따라서 영화를 제작하고 흥행에 성공하더라도 불법 다운로드와 투자사와의 불리한 수익 분배 구조, 성공작 이전의 부채 등의 다양한 원인으로 제작사들은 신용불량 상태로 빠져들어갔다. 제작사와 제작자들이 이런 위기에 빠지는 것은 다시 신규로 기획, 개발되는 프로젝트가 부족해지는 상황으로 이어지고 투자자들은 투자할 프로젝트가 없다고 판단해 투자를 망설이는 상황이 된 것이다.
정책의 성취와 과오
이런 산업에서의 변화 과정에서 정책은 어떤 역할을 해왔는가? 1999년에 정부는 영화진흥금고를 출연하면서 기존의 영화진흥공사를 영화진흥위원회로 새롭게 출범시켰다. 그리고 영화산업에 투자와 융자, 지원 등의 다양한 재정적 제도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2000년대 중반까지 영화계에 큰 규모의 투자 자본이 흘러들어온 것에는 문화산업진흥기본법을 제정해서 영상전문투자조합의 설립을 가능하도록 해 영화계에 자금 유입을 유도한 정부 정책이 배경으로 자리 잡고 있다. 그것은 영화산업이 규모의 경제를 실현할 수 있는 산업적 외피를 갖추기 위한 자본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파악한 정책이 순기능을 발휘한 것이었다.
산업적 속성과 문화 예술이라는 속성을 함께 지닌 영화에 적용하는 정책은 항상 산업과 문화 사이의 미묘한 긴장 관계 속에서 제 역할과 영역을 설정하게 되어 있다. 정책이 영화산업으로 자본을 유도해 산업 스스로 발전하도록 한 이후 영화 정책은 산업보다는 영화의 문화적 발전에 더 주력했다. 그러나 영화산업에 밀려온 자본은 외적 성장을 이루어가면서 동시에 내적으로 성숙한 시장 질서를 구축하는 데에는 실패했고, 정책 역시 이런 산업의 내적 성숙도를 산업 주체에 제안하고 동의를 끌어내는 데에서 한계를 보였다. 특히 부가 시장의 붕괴 앞에서 영화 정책은 속수무책이었다. 그리고 그 붕괴에 대한 산업의 잘못된 대응 방안 - 극장 의존도를 더욱 높이게 되는 와이드 릴리즈와 마케팅 지출 확대나 투자사와 제작사 간의 불공정한 수익분배 -은 제작사, 즉 창작 주체의 고사로 이어지게 되어 한국영화 전체의 기획 창작력 부재라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이런 과정에서 정책이 일일이 모든 과정에 개입하는 것은 불가능했겠으나 그럼에도 산업이 지향해야 할 큰 방향을 설정하고 주요 과정에서 산업 주체들 간의 갈등 조절을 비롯해 여러 정책 효과를 위한 노력을 기울였어야 한다는 비판 앞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에 따라 2009년 말 현재 지난 2년여 간의 영화 시장 위축이 탈출구를 보이기보다는 점점 더 어려워져만 가고 있다. 이 시점에서 영화진흥위원회와 문화관광부, 국회 등은 영화 정책이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심도 깊은 논의를 하고 대책을 세워야 한다.
2010년을 바라보는 지금 영화산업은 심각한 위기의식을 가지고 있다. 들어가는 글에서 언급했듯이 지난 10년의 성장 곡선이 바닥에 닿아 있는 지금 그 곡선의 끝을 다시 끌어올려서 성장이라는 반전을 불러올 수 있을지, 아니면 더 바닥 모를 추락으로 이어지는 암울한 결말로 이어질지는 지금 아무도 섣불리 말할 수 없다. 오히려 그런 예단보다는 어떻게 하면 이 곡선의 끝을 극적으로까지 아니어도, 아주 천천히라도 점차 상승하는 추세로 끌어올릴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고민을 시작하고 실행해야 할 때다.
그 노력은 산업 주체들과 정책 담당자들에게 때로는 공통의 때로는 각기 다른 모습을 요구한다. 공통적으로 요구하는 것은 산업 전체에 대한 거시적인 안목과 발전 전망을 틀어쥐어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속한 회사, 내가 속한 단위의 편협한 이익만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영화산업 전체의 이익을 위해서 어떤 방향을 움직여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을 해야 한다. 지금 당장 큰 이익이 아니더라도 영화산업 전체의 이익이라는 관점에서 움직여야 한다. 그런 관점에서 부가 시장을 복원하기 위한 노력이 가장 시급하다. 그리고 창작 주체들의 자생력을 키워서 기획 창작 역량을 강화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해서 모색해야 한다. 투자 주체들이 적극적으로 투자에 나설 수 있도록 제도적 법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에 정책이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