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희의 영화사산책 ① - 미완의 음악영화
이번호부터 영화사산책은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음악학 전공자(박사수료)이준희 대중음악비평가의 글이 연재됩니다.
1930년 1월, 새해 벽두 조선 영화계의 화제는 단연 ‘토키(talkie)’였다. 1920년대 후반부터 세계 영화계의 흐름이 무성영화에서 발성영화로 급속하게 바뀌고 있었는데, 그 파장이 드디어 조선에까지 미쳤던 것이다. 이미 그전부터 언론에서는 움직이면서 소리까지 나는 경이로운 활동사진을 소개하며 분위기를 띄우고 있었고, 간단한 ‘맛보기’ 토키영화를 선보이기도 했다. 그런 가운데 영화 수입업자와 극장주들은 치열한 눈치작전을 벌이며 본격적인 발성영화 제1호 상영을 위해 경쟁했다. 조선인이 만든 첫 번째 발성영화가 1935년에 개봉한 <춘향전>이기는 하지만, 1930년 1월부터는 조선 극장가에도 사실상 토키의 시대가 열렸다.
토키시대의 개막은 자연스럽게 음악영화에 대한 관심을 불러왔다. 본격적인 발성영화 히트작으로 통상 첫손에 꼽히는 작품이 1927년 개봉작 <재즈 싱어 The Jazz Singer>인 것만 보아도, 발성영화와 음악영화의 밀접한 관계를 알 수 있다. 조선에서도 그러한 관계는 예외가 아니었으니, 1935년 10월 <춘향전> 개봉 이후 채 1년도 되지 않은 1936년 4월에 ‘조선음악영화 전발성(全發聲)’ <노래 조선>이 나오게 되었다. 필름이 남아 있지 않은 탓에 내용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고복수(高福壽)·김해송(金海松)·이난영(李蘭影)·임방울(林芳蔚) 등 당대를 주름잡은 쟁쟁한 음악가들이 대거 출연한 것만 보아도 음악영화의 면모가 대략 짐작이 된다.
조선 최초의 음악영화 <노래 조선>을 만든 곳은 오케(Okeh)영화제작소였고, 오케영화제작소의 모체는 오케레코드사였다. 고복수 등 주요 출연자들은 모두 오케레코드사 전속 가수였다. 그리고 오케레코드사를 설립해 운영한, 따라서 오케영화제작소를 통해 <노래 조선>제작을 주도한 사람은 이철(李哲, 1903~1944)이었다. 충청도 공주에서 태어나 학교를 졸업한 뒤 경성으로 올라온 그는, 음악으로 조선 제일이 되겠다는 꿈을 이루기 위해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갔다. 20대 초반에 극장 악사로 연주 활동을 시작했고, 1927년 무렵에는 음악전문 출판사 백장미사(白薔薇社)를 설립했다. 1929년 연희(延禧)전문학교 밴드부 결성을 주도하고, 같은 시기 코리안재즈밴드 멤버로도 활동했다. 1932년에 오케레코드사를 설립해 이듬해부터 음반을 발매했고, 1933년부터는 오케연주단을 조직해 공연 분야로까지 영역을 넓혔다. 연주·출판·음반·공연을 섭렵해온 이철이 다음 단계로 영화에 주목한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영화 <노래 조선>의 내용은 크게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고 하는데, 그 하나가 1936년 2월부터 3월까지 진행된 오케연주단의 일본 공연 영상이다. 공연 실황을 그대로 찍은 것이 영화적 완성도를 어느 정도 가질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생각해볼 점이 있겠으나, 이철에게는 그 문제가 그렇게 대수롭지 않았던 듯하다. 그의 음악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영화’라기보다는 ‘음악’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아무래도 당시 조선에서 대중의 이목을 사로잡는 공연을 누구보다도 잘 기획할 수 있는 그였기에 가능한 입장이기도 했다.
<노래 조선> 이후 정확히 3년 뒤, 이철이 조직한 공연 무대는 다시 한 번 영화와 만나게 된다. 이번에는 조선이 아닌 일본에서였다. 오케연주단은 1938년부터 오케그랜드쇼라는 이름으로 확대되었고, 1939년 3월부터 5월까지 두 번째 일본 순회공연을 하면서 조선악극단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바로 그 조선악극단의 공연 실황이 1939년 5월에 개봉한 영화에 등장했다. 다만, 이번 경우는 이철이 주도한 조선악극단만의 영화는 아니었다. 인기 만화를 원작으로 도호(東寶)영화사에서 제작한 <思ひつき夫人>(당시 조선에서는 <의견 좋은 부인>으로 소개되었다)의 극장 관람 장면에 조선악극단의 공연 실황이 삽입되었던 것이다.
일본 공연에 이어 1940년에 중국과 만주 순회공연까지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이후, 조선악극단은 조선의 범위를 뛰어넘어 동양 삼국을 넘나드는 국제적인 대형 공연단체로 성장했다. 그러한 성공에 힘입어 이철은 <노래 조선>의 뒤를 잇는 두 번째 자체 제작 영화 기획에 착수했다. 1941년 4월 무렵 가시화된 새로운 조선악극단 영화의 제목은 <노래의 낙원으로 간다>. 오케레코드사 전속 작사가이자 조선악극단 전속 극작가였던 조명암(趙鳴岩)이 원작을 쓴 <노래의 낙원으로 간다>는, 경주·부여·평양·금강산 등 조선팔도의 경승지를 돌며 찍은 영상과 노래를 결합시키는 내용으로 기획되었다. 그러나 단 한 건의 신문 기사에만 등장하는 이 영화는 결국 불발의 기획으로 끝이 난 듯하다.
하지만 <노래의 낙원으로 간다>를 통해 이철이 표현해보고자 했던 영상과 노래의 결합은 그해 연말 11월에 다른 영화를 통해서 부분적으로 실현될 수 있었다. 바로 최근에 필름 일부가 공개된 <그대와 나(君と僕)>의 백마강 뱃놀이 장면이다. 영화 주인공들을 태우고 백마강을 건너는 나룻배의 사공은 조선악극단의 간판급 가수 김정구(金貞九). 김정구가 노를 저으면서 부른 노래는 영화 개봉 넉 달 전에 조선악극단이 명치좌(明治座)에서 공연한 악극 <낙화삼천>의 주제가였다. <노래의 낙원으로 간다>가 실제 제작이 되었더라면, 백마강의 김정구뿐만 아니라 금강산 단발령에서 <잘있거라 단발령>을 부르는 장세정(張世貞), 목포 유달산에서 <목포의 눈물>을 부르는 이난영, 부산 부두에서 <울며 헤진 부산항>을 부르는 남인수(南仁樹)의 모습도 영상으로 남았을지 모른다.
1944년 6월, 광복을 한 해 남짓 앞둔 그때 이철은 의사의 오진으로 인한 갑작스러운 패혈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죽음과 함께 조선악극단도 화려한 빛을 잃고 말았고, 식민지라는 어두운 현실 속에서도 조선을 노래의 낙원으로 영상화하고자 했던 꿈 역시 미완에 그치고 말았다. 남은 것은 영화 두 편 속 장면 셋. 미완의 음악영화는 10분도 안 되는 필름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by.이준희(대중음악비평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