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화, 홍련>(김지운, 2002)의 할리우드 리메이크작 <안나와 알렉스: 두 자매 이야기>(찰스 가드, 토마스 가드, 2009)는 저예산으로 제작되어 미국에서만 10배 이상의 수익을 냈지만, 한국에서는 약 한 달간 5만명 정도의 관객만을 동원했다. 일본의 <링>(나카다 히데오, 1998)과 <주온>(시미즈 다카시, 2002)을 리메이크한 <더 링>(고어 버빈스키, 2002), <그루지>(시미즈 다카시, 2004)가 미국에서는 물론 일본에서도 그 원작을 능가하는 흥행수익을 올렸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대다수 한국 관객은 <안나와 알렉스>의 개봉 사실조차 알지 못했고, 영화를 본 사람들은 원작과 달리 행위와 사건의 논리성에 치중한 리메이크작의 밋밋함을 지적했다. 그러나 할리우드의 아시아 공포영화 리메이크작들을 감상하는 데 그 원작과 비교하는 일이 피할 수 없는 유혹이라 하더라도, 원작의 독특성이 보존되었느냐 여부가 그 기준이 될 필요는 없다. 어쩌면 할리우드는 애초부터 아시아 공포영화의 매력 혹은 특수성을 보존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거나, 최소한 거기에는 관심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리메이크 판권이 팔린 후 영화가 만들어지기까지, 한국의 관객은 물론 판권자나 관련자들은 거의 아무런 개입을 하지 못한다. 리메이크작은 그야말로 ‘할리우드 영화’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할리우드는 아시아 공포영화에 관심을 기울이는가.
가장 직접적으로는 물론, 버티고(Vertigo)사의 로이 리라는 매개자 때문이다. 일본산 <링>을 보고 충격을 받은 그는 아시아 영화들을 할리우드에 부지런히 소개하며 리메이크 계약을 주도했다. 그가 손을 댄 모든 작품이 성공하지는 않았지만 <더 링>과 <그루지>가 거둔 성과는 눈부신 것이었고, 여기에 <무간도>(유위강 ? 맥조휘, 2002)의 리메이크작 <디파티드>(2006)가 아카데미상을 수상했다(‘마틴 스콜세지조차 리메이크를 한다’)는 신화가 부가되자, 아시아 영화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아졌다. 위키피디아에서 검색되는 “아시아 공포영화(Asian Horror)”라는 신조어는 이렇게 할리우드에서 리메이크 판권을 구입하기 위해 수집한 수십 편의 아시아산 공포영화 리스트 및 영국 타탄필름(Tartan Films)이 DVD 배급을 위해 범주화한 “아시아 익스트림(Asian Extreme)”을 포괄하는 것이다.
아시아 공포영화의 로컬리티란
로이 리와 타탄필름의 중개 및 배급이 이 리메이크 현상을 가능케 한 물질적인 조건이라면, 특수 효과를 거의 사용하지 않고 빅 스타를 기용하지 않는 저예산 제작 방식으로 일정 관객을 모을 수 있는 아시아 공포영화의 상품성은 할리우드 영화산업의 필요에 의해 발견된 것이다. 아시아 공포영화를 직접 배급하기보다 리메이크하는 이유는 일단 미국 영화 문화의 특수성, 즉 관객이 자막이 있는 외국 영화 관람을 기피하는 한편 자막 있는 외국 영화를 선호하는 예술영화 팬들은 공포영화와 같은 장르 영화를 선호하지 않는다는 점 때문이지만, 더 이상 자국 시장만으로는 수익을 올리기 어려워진 영화산업의 요구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홍콩 영화의 스타일을 차용한 영화들로 아시아 시장을 잠식했던 할리우드의 역사에 비추어 볼 때, 아시아 공포영화 역시 할리우드산 공포영화로 재가공되어 아시아 시장에 진입할 것이라는 비판적 전망도 제기되는 것이다. (일본의 귀신들린 집에 살게 된 백인들의 당혹감과 이들을 혼비백산하게 만드는 가야코 귀신의 가부키적 퍼포먼스가 나름 흥미진진했던 <그루지>가 거듭 리메이크되면서 도달한 지점은 흥미로운 사례가 된다. 이제 시카고로 배경을 옮긴 <그루지3>(토비 윌킨스, 2009)에 오면 검고 긴 머리의 아시아 여귀가 할리우드 공포영화의 괴물 리스트에 안전하게(더 이상 낯설고 위협적이지 않게) 추가되었음이 명백해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할리우드가 아시아 공포영화에서 발견한 것은 중요한 시장으로서의 아시아, 그래서 거기에 침투하기 위해서는 전유해야 하는 로컬리티로서의 아시아인 것이다.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로컬화 과정에서 발견된 저예산 장르영화. 이것이 아시아 공포영화 리메이크 현상의 산업적 의미다.
절제와 암시의 미덕
그렇다면 우리는 새삼 놀라야 할 것이다. 할리우드가 ‘발견’을 해야 할 만한 문화적 ‘차이’의 영역이라는 것이 아직 존재한다는 점에 대해서 말이다. <링>을 필두로 최근 리메이크 결정이 된 <폰>(안병기, 2002), <데스노트>(카네코 슈스케, 2006)에 이르기까지, 아시아 공포영화의 로컬리티라는 것은 무엇인가. 논자들은 할리우드의 공포영화가 그래픽적인 관음증에 의존하는 스타일, 즉 적나라한 시각적 스펙터클을 강조하는 스타일을 보여주는 반면 아시아 공포영화는 ‘적게 보여줄수록 더 무섭다’는 전제에 의존하여 공포를 환기한다고 말한다. 육체적이고 시각적이기보다는 심리적이고 비가시적인 데 초점을 맞추는 스타일과, 점층적으로 공포감정을 쌓아가는 내러티브 전개(실제로 <링>의 할리우드 버전은 아시아 공포영화의 느린 템포를 낯설어할 미국 관객을 위해 속도감을 강화했다), 그리고 아시아의 오랜 전통에 근거한 초현실적 사건들. 이들은 기독교적 세계관에 근거한 선악 이분법적 구도가 아니라 ‘인간과 더불어 공존하는 귀신’이라고 하는 관념을 보여주는 데에서 문화적 차이를 발견
하기도 하고, 오래된 설화나 민담 전통이 부재한 미국의 문화적 공백을 아시아의 공포영화가 메운다고 분석한다.
이러한 ‘차이’의 논법은 실은 (대개 일본영화를 통해 형성된) 아시아 영화에 대한 서구 관객의 일반적인 통념(‘아시아 영화는 기괴하고 폭력적이다’)을 반복하는 것이면서, 할리우드에 대한 대안 중 하나로 아시아 영화를 고안해온 서구 지식인의 투사 강박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1970년대 이후 슬래셔의 노골적이고 과잉적인 성격 및 그것의 정점/쇠락을 동시에 보여준 <스크림> 시리즈의 포스트모던함에 지친 서구 평론가들에게, 아시아 공포영화는 ‘절제’와 ‘암시’의 미덕을 지닌 대안적인 영화로 발견되었던 측면도 있다.(쓰카모토 신야조차 롤러코스터와 같은 공포와 전율을 제공하는 (할리우드의) 선량한(good) 공포영화와, 영화를 보고 난 후 다시 생각하면 정말 무서워지는 (아시아의) 악질의(bad) 공포영화라는 이분법적 사고방식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도공간>(2001)의 나지량이 <식스센스>(M. 나이트 샤말란, 1999)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고백하고 <디 아이>(2001)의 팽 형제 역시 <디 아더스>(알레한드로 아메나바르, 2001)의 영향을 받았음을 언급하고 있듯, 아시아 공포영화는 이미 할리우드와 몸을 섞으며 성장해오고 있었다. 범아시아 공포영화 프로젝트 <쓰리>(2002), <쓰리 몬스터>(2004)의 제작주체들이 염두에 두었던 것 역시 아시아의 특수한 정체성을 공유하자는 것보다는 전지구적으로 통용되는 장르 문법을 지역화한 형식으로서 공포영화를 계발하자는 것이었다.
따라서 아시아 공포영화를 둘러싼 관점 중 가장 흥미로운 것은 공포영화 마니아의 열광과 우려다. 지난 몇 년간 아시아 공포영화를 섭렵한 이들은 할리우드 리메이크판이 삭제한 원작의 아방가르드적 성격을 향유하며, 아시아 공포영화가 리메이크 판권을 팔기 위해 정형화된 영화들을 제작하는 현상을 비판하는 목소리를 낸다. 마치 <스크림>의 케빈 윌리엄스가 할리우드에서 공포영화의 부활에 큰 공을 세웠음에도 창조적으로 갱신해나가지 못하고 자기복제를 계속함으로써 오히려 2000년대 공포영화 쇠퇴의 원흉이 되었던 것처럼, 아시아 공포영화가 동일한 스타일과 관습을 반복하는 한 곧 에너지를 상실할 것이라는 경고다. 이들은 공포영화가 언제나 ‘다수’를 위한 장르가 아니라 ‘소수의 마니아’를 위한 장르였음을 강조하면서, 아시아 공포영화 감독들이 리메이크 판권을 의식하지 말고 끊임없는 장르 갱신에 주력할 것을 요청한다. 할리우드의 모토인 “전세계인이 공감할 보편성”이란 어쩌면, 공포영화가 가장 피해야 할 덕목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