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공포영화] 한국의 여귀를 다시 생각한다
작고한 이영일 선생은 그의 저서에서 한국 장르영화의 성격을 논하면서, 해방 이후 한국영화에서 장르란 특정한 영화 한 편의 성공으로 쉽게 성립되는 경향이 있었다고 지적한 바 있다. 미국과 유럽의 장르영화와 달리 한국의 장르영화는 서구의 이론적 도식을 적용시킬 때 연속성과 특징을 잡아내기 어렵고, 대중적인 장르영화가 양산되었던 시기에는 한 편의 성공이 바로 유사한 작품의 제작으로 이어져 관객에게 뚜렷한 흥행의 모델로 자리 잡았기 때문에, 한국적인 상황을 고려한 접근이 필요하다는 것이 그가 주장하는 내용의 일부다.
대중영화의 모델을 만들고 재생산하는 과정이 할리우드나 일본에서 진행되었던 흐름과 달라서 자연스럽게 독특한 지역성을 가지게 되었다는 이 견해는 비록 명확한 이론적 틀을 가지고 있지 않다 하더라도, 1990년대에 들어와 한국 영화산업이 새로운 성장기에 접어든 이후에도 나름 유용한 부분이 있다. 그러니까 최근 10여 년간 한국영화의 성공을 설명할 때, 로맨틱 코미디와 액션영화를 시작으로 여러 장르에서 상업적 모델이 실험되었고 이것이 한국영화의 양적 질적 팽창으로 이어진 것은 주지의 사실이지만, 실제로 언론이나 대중적인 담론들이 선호하는 흥행작, 특히 천만 관객의 신화를 만족시킨 영화들은 장르의 규칙을 엄격하게 지킨 작품이라기보다 오히려 장르 안팎의 여러 요소를 조합하여 변형된 작품들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실미도>가 가지고 있는 무협영화적인 수련의 구조나 이를 감내하는 관객의 태도, <괴물>이 보여주는 다층적인 정치적 언급들과 관객의 적극적인 독해는 분명 할리우드는 물론이고 우리가 흔히 예상하는 장르영화의 틀과는 다른 면면을 가지고 있다. 2008년에 개봉된 나홍진의 데뷔작 <추격자>의 경우에도 관객들을 영화로 이끈 커다란 힘은 장르적 구조라기보다 오히려 영화가 만들어내는 명명하기 어려운 어두운 정서가 아니었을까.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나는 한국 장르영화가 보여주는 독특함을 멜로드라마와 같이 지속적으로 제작되었고 꾸준하게 다른 영화들로 파고든 영향력 있는 장르만이 아니라, 공포영화나 활극으로 대표되는 액션영화처럼 보다 적은 관객을 기대하며 제작된 주변의 장르들에서도 흥미롭게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1960년대에 대중영화의 한구석에 자리 잡고 현재까지 명맥을 유지해온 공포영화는, 시간과 공간을 아우르는 여러 가지 대립항이 제시되고 조정되는 매력적인 갈등의 공간이었다. 누가 적이고 누가 선이며, 누가 귀신이 되고 어째서 죽어야 했는가라는 간단한 질문만으로도 이 영화들이 제공해주는 즐거움과 두려움이 남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여기서는 이 영화들이 관객에게 공포감을 주기 위해 중요한 장치로 사용하는 여성 귀신의 이미지가 어떻게 변화했는지 살펴보려 한다.
한국의 여성 귀신들
<살인마>와 <월하의 공동묘지>
일제강점기를 지나 1960년대가 될 때까지 어떠한 공포영화들이 상영되었고, 공포영화를 즐기는 문화적 토대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전부 설명하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존재하는 자료들을 보면 한국에서 공포영화가 상업적 성공과 함께 대중영화의 영역에 자리 잡은 것은 1960년대의 일이다. 이 가운데서도 이번에 상영되는 이용민 감독의 <살인마>와 권철휘 감독의 <월하의 공동묘지>는 이 땅에서 반복되어 이야기되었던 공포영화의 특징들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흔히 ‘한’이라 불리는 복잡다단하며 사회정치적 관계망에서 형성된 감정적 상태를 전면에 내세워, 멜로드라마적인 구조와 악당에 대한 복수의 정당성을 영화에 부여한 것도 이 작품들이다. 영화 속의 귀신은 여성이며, 원한을 품었고, 정의의 실현을 원한다. 내면에 인간적인 감성을 품고 있으면서도 악인을 징벌하기 위해 행동을 주저하지 않는다. 그들의 가슴에 맺힌 원한 뒤로 가부장제의 위기와 문제점들이 보이지만, 그녀들은 구성원을 파괴할 뿐이다. 시대적인 배경이 어떠하건 그녀들은 머리를 산발하고 한복을 입고 있다. 이런 특징들은 고스란히 한국 공포영화와 관객의 약속으로 각인된다.
1960년대에 형성되어 한국 공포영화의 고전시대라고 부를 수 있을 시기를 차지한 이 영화들의 영향은 1980년대 중반까지 이어진다. 30년 가까이 비슷한 형상의 귀신이 출몰했다는 사실을 두고 한국 호러영화의 정체를 지적하거나, 이 영화들이 제시한 갈등이 이후에도 오랫동안 이어졌다고 분석하는 것이 가능하다. 하지만 이는 공포영화의 정체라기보다는 전체로서의 한국영화라는 층위에서 파악해야 할 것이다. 아무튼 몇 편의 예외적이고 흥미로운 사례들을 찾을 수는 있지만, 영화가 함축하는 가치관과 억울하게 희생을 당한 여성의 복수, 그리고 등장하는 귀신들의 시각적 이미지는 1980년대 중반부터 한동안의 휴지기를 거쳐 1990년대 중반이 되어서야 변화를 맞이한다.
<여고괴담>
사소한 불평인지 모르겠지만, 1998년에 첫 작품이 등장한 <여고괴담> 시리즈의 성과에 대한 세간의 평가는 아직도 어딘가 부족한 점이 있다. 쉬리보다 먼저 개봉하여 10여 년 만에 공포영화를 시장의 중심으로 불러들이고, 이후 10년 동안 한국영화사에서 보기 드문 시리즈로 이어진 <여고괴담>은 무엇보다 그 당시 한국 영화산업의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예였다. <쉬리>가 한국 관객에게 한국 상업영화의 가능성을 체감하게 만든 커다란 사건이었다면, <여고괴담>은 제작 시스템의 변화와 장르 재생산의 가능성을 성공적으로 보여준 경우다. 동시에 이 시리즈는 이후 새로운 감독과 새로운 배우를 고집하면서 매순간 찬성과 반대가 오가는 불안한 장면들을 연출하기도 했지만, 이 역시 당시 영화산업의 상황을 정확히 보여주고 있다 할 수 있다.
1960년대의 공포영화들이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의 하나가 당대의 가치관과 무의식을 효과적으로 장르 내부에서 소화했기 때문이라면, <여고괴담>은 고전적인 공포영화의 갈등구조와 배경을 바꾸는 것으로 변화된 상황에서 같은 기능을 수행하였다. 학교라는 공간으로 이동하여 10대 청소년들의 불안한 심리를 공포의 출발점으로 삼는 방법은 오랫동안 이어졌던 전통적인 귀신의 이미지에 변화를 주는 동시에, 시장에서는 10대 관객층의 호기심을 극장으로 이끄는 데 성공하였다. 물론 두 번째 이후의 <여고괴담>들이 보여준 흥행 성적의 낙폭이 크고, 글을 쓰는 지금 다섯 번째 작품이 개봉하고 있는 상황에서 5편 전부를 묶어 사고하기란 쉽지가 않다. 그러나 적어도 학교를 배경으로 한 공포영화가 관습적으로 자리 잡기 전인 1998년에 <여고괴담>이 등장했을 때, 선생을 살해하는 장면에서 호응하는 관객이 있었다는 점은 이 영화가 품고 있는 원한과 복수의 정서가 심정적으로 받아들여졌음을 시사한다. 학교에서 희생된 아이들의 원혼은 새로운 관객과 만났고, 이 관객들은 이후 공포영화의 붐을 만들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링>
김동빈 감독이 연출한 <링>도 이 시기의 공포영화 가운데 주목할 작품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일본의 원작을 리메이크한 이 영화는 비디오를 통해 전염되는 죽음의 바이러스를 추적하는 주인공들의 이야기가 영화의 기본적인 얼개다. 하지만 흥미로운 점은 이 영화의 원전으로 참조되었을 나카다 히데오가 연출한 일본판 <링>과 스즈키 코지가 쓴 원작 소설 간의 차이점이다. 한국에도 번역된 소설에서, 작가는 원한을 품은 여성 초능력자가 비디오테이프에 저주를 걸었다는 사실을 밝혀내는 주인공들의 수사 방식을 과학적 지식을 동원하여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소설의 가장 무서운 순간이 두 주인공이 비디오테이프에서 죽음의 바이러스를 발견하는 순간이라면, 영화에서 가장 무서운 순간은 마지막에 사다코가 우물에서 나와 TV화면을 뚫고 현실로 기어 나올 때이다. 내게는 이것이 소설과 영화가 공포를 끌어내는 방식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라기보다 창작의 주체들이 가지고 있었던 무서움을 바라보는 태도가 달랐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소설판 <링>은 공포소설인 동시에 과학적 지식으로 무장한 SF소설의 요소를 가지고 있다. 연쇄적인 죽음의 원인을 주인공들이 밝혀나가는 과정에는 여러 과학적 지식과 설정들이 배치되어 있으며, 주인공들은 이성적인 조사의 끝에서 전자매체에서 발생한 생물학적인 존재를 발견한다. 이런 의미에서 소설판 <링>을 디지털이라 한다면 나카다 히데오의 영화판 <링>은 놀랍게도 여전히 아날로그에 머문다. 비디오를 매개로 한 살인이라는 현대적인 발상은 원작 그대로지만 공포를 묘사하는 수법은 고전적인 공포영화의 관습과 규칙을 그대로 따른다. 공포영화 장르의 혁신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일본판 <링>이 가지고 있는 거의 유일한 장점이자 단점은, 잊힌 듯이 보였던 원한을 품은 여성의 이미지를 사다코라는 주인공을 통해 현대에 다시 부활시키고, 이를 아시아는 물론 세계적으로 유통될 수 있을 기호로 영화산업의 전면에 내세웠다는 점일 것이다. 일본판 <링>과 한국판 <링>의 관계는 이를 보여주는 적절한 예다.
결국 한국이든 일본이든 1990년대에 공포영화가 다시 부활했을 때 관객이 목격한 것은 현대적인 감성을 가지고 있는 듯이 보이지만 어떤 부분에서는 여전히 고풍스러운 귀신의 모습이었다. 귀신의 활동 범위는 집안에서 학교로 넓어졌지만, 세계의 극장가에 진출하여 성공적인 모델로 기능한 것은 여전히 흰옷에 산발을 하고 손톱이 긴 그녀들의 영화였다.
<장화, 홍련>
변화는 2000년대에 들어와 김지운 감독의 <장화, 홍련>이 등장할 무렵 찾아왔다. 개봉 당시 영화의 서사를 이해하지 못한 몇몇 관객이 인터넷에서 대답을 찾기도 했던 <장화홍련>은 귀신의 역할과 공포의 원인을 생각할 때 이전과 뚜렷한 차이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영화는 분명히 귀신의 존재를 시각적으로 제시하지만 작품 전체가 여주인공의 비정상적인 정신 상태와 깊은 관계가 있기에 귀신이 있다고 단언하기 어렵다. 오히려 <장화홍련>은 그 당시 만들어졌던 한국의 공포영화들이 보여준, 귀신은 아니지만 그에 가까운 어떤 존재를 보여주었다고 볼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1990년대 이후 극장에서 가장 커다란 비명소리를 들을 수 있었던 작품이기도 하다. 비교적 초반부터 등장하는 귀신의 이미지는 <여고괴담>이후 새롭게 변신한 그네들의 모습을 적극수용하면서도, 그들이 학교나 야외가 아니라 집안에 출몰한다는 점에서는 1960년대의 한을 품은 귀신들과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영화는 귀신의 이미지와 역할만이 아니라 그들이 출몰하는 배경인 세트에 변화를 주면서 현대적인 기운을 획득한다. 이는 개봉 당시 몇몇 평자들이 지적했던 이층 구조의 양옥 건물이 가지고 있는 심리학적 독해를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때까지의 한국 공포영화들과 <장화홍련>의 차이점은 ‘귀신이 어디에서 튀어나오는가’라는 단순한 질문에서 나온다. 몇몇 인상적인 장면, 예를 들어 여주인공의 악몽에서 나오는 귀신이 침대 아래쪽에서 침대 위로 올라오거나, 싱크대 밑에서 이상한 존재를 발견하는 장면을 보면 대답은 명확하다.
<장화, 홍련>의 귀신은 전통적인 한옥에서는 출몰하기 어려운 장소에서 ‘솟아오른다’. 만일 영화의 배경이 한국적인 건축물이었다면, 그래서 온돌을 뚫고 솟아오르는 귀신이나 부엌의 아궁이 아래쪽에 숨은 귀신이 보여졌다면, 관객도 이해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장화, 홍련>은 감독과 관객이 공유하고 있었을 것이라 생각되는 현대화된 장르적 즐거움과 영화가 제작된 조건으로서 영향을 미치는 한국적 맥락 사이의 중간을 부유하고 있다. 부유하고 진동하면서 동시에 낯설고 무섭게 다가오는 이런 방향감각은 당시 관객의 마음을 흔들기에 충분했다.
by.권용민(부천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