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루미늄 캔 속에서 잠자던 테크니스코프 영화를 스크린으로 불러내기까지 10년. 그것은 우리 영상자료원 기술센터 사람들의 숨은 노력의 결실이다. 변형 사이즈의 특수한 포맷으로 1960년대 말부터 10여 년 존속하다 사라진 테크니스코프 영화들은 오랫동안 접근 불가능의 영역, 버려진 유산이었다. 자료원 입사 후 3년 만에 영화필름의 보존업무를 맡으면서 필름수장고에 들어갔을 때 제일 먼저 눈에 띈 필름! 필름 캔에 <기러기 가족(?)>이라는 라벨이 붙어 있었고, 필름에 대한 다른 정보는 없었다. 왜 ‘?’표가 붙어 있는지 궁금했고 그 이유를 선배들에게 물었다. 내가 들은 답은 “필름이 일반 필름과 달리 하프사이즈이기 때문에 내용을 알 수 없고, 장비가 없어 점검도 불가능 하다는 것”이었다.
이후 외국의 아카이브나 현상소 관계자를 만나면 수시로 이 필름에 대해 질문했다. 1998년 FIAF(국제영상자료원연맹) Summer School에서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현상소에서 온 요한 프리지스라는 기술자를 만났는데 그로부터 이 필름 포맷이 1963년 이탈리아에서 개발되었으며 옥스베리라는 인화기에서 복제가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지금이야 인터넷에서 이 필름과 관련된 정보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으니 금석지감!). 그 뒤 국내에서 옥스베리 기기를 갖고 있는 현상소와 테크니스코프 복원을 논의해보았지만 부속장비 등의 문제로 결국 작업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여러 가지 바쁜 일이 생기면서 이 필름에 대한 관심은 점차 희미해져갔으나, 매년 한 차례 전체 필름에 대한 정기점검 때마다 ‘?’가 달린 이 필름은 궁금증을 불러일으키곤 했다.
‘?’의 비밀을 벗기다
2002년인가 2003년인가에 우연한 자리에서 서울현상소 관계자와 테크니스코프 필름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1990년대 초에 문을 닫은 광해현상소에서 인수한 옥스베리 인화기를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서울현상소의 도움을 받아 10분 정도 테스트 프린트를 만들 수 있었다. 이를 통해 <기러기 가족(?)>이 윤정수 감독의 1973년작 <부(父)>라는 것을 알 수 있었고, 촬영된 방식과 인화방식에 대해서도 정확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10분짜리 테스트필름의 이미지는 기대 이하였다. 지난 호 <영화천국>에서 오승욱 감독은 ‘잊혀진 매체, 테크니스코프의 비극’이라는 글에서 “어린 나는 항상 불만을 품었었다. 왜 저렇게 화면이 흐릿하지? 뭔가 우중충하고, 선명도가 떨어지고, 답답했다. 물론 극장의 좌석 여기저기에서 인디언들의 봉홧불처럼 피어오르는 동네 노는 형들과 아저씨들의 담배연기 때문은 절대 아니라고 어린 나이에도 생각할 머리는 있었기에 그 궁금증과 불만은 더욱 더 커져갔었다.”라고 했다.
바로 이런 느낌이었다. 필름 전체를 재접합하고 오래된 인화기를 재정비해서 많은 수고를 해준 서울현상소 사람들의 노력에도 바로 프린트 한다는 것은 무리였다. 이후 쿠알라프로덕션, 영화진흥위원회 등의 도움을 받아 테스트를 진행하여 화질을 개선할 수는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작업비용이 문제였다. 영화의 화질 및 색 보정을 위해서는 오리지널 네가 → 마스터프린트 → 듀프네가 → 프린트의 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필름값만 2천만원, 작업료 또한 2천만원으로 사운드 작업까지 거의 편당 5천만원의 예산이 소요됐다. 자료원이 보유한 테크니스코프 영화가 140편 정도이니까 전체 필름을 모두 복원하려면 75억원 정도의 예산이 필요했다. 2003년 당시만 해도 자료원 전체 예산이 40억원 규모였으니 턱도 없는 사업이었다. 비용 문제로 인해 우리는 디지털 방식의 복원을 검토하게 되었다. 마침 디지털 방식의 영화 후 반작업이 국내에 막 도입되던 무렵이었다. 당시 HFR에서 일하던 옥임식 이사로부터 아이디어를 얻어 2005년 말에는 아주 짧은 분량이지만 비디오로 변환할 수 있었다. 아이디어는 아주 간단한 것이었다. 보통의 영화는 4퍼포레이션(필름 가장자리의 구멍. 카메라와 영사기에 걸기 위한 용도)에 1장의 화면을 담는 데 비해 테크니스코프는 4퍼포레이션에 2장의 그림이 있는 것이니 일단 2장이 있는 한 화면을 비디오로 변환한 뒤 2장으로 나누면 된다는 것이었다. 당시에는 자료원에 텔레시네가 없어 HFR로부터 협조를 받아 실험할 수 있었다. 또한 이를 다룰 만한 컴퓨터도 없어 SD급의 비디오로 시험을 하였다. 시험은 2가지 방법으로 시도되었다. 첫 번째는 SD화질인720×480의 화면으로 2장의 그림이 들어오도록 텔레시네한 후 소프트웨어를 통해 2장의 그림으로 나누어 재배치하는 방식이었고, 두 번째 방법은 애초에 각 프레임을 홀수와 짝수로 나누어 텔레시네 한 후 화면을 재배치하는 것이었다. 화면의 품질은 두 번째 방법이 월등히 좋았다. 비록 두 경우 모두 화면의 떨림이 문제가 되었지만 테크니스코프 필름을 디지털로 전환할 수 있음이 입증되었다. 옆의 그림은 당시 작업하던 PC의 화면을 캡처한 것이다.이 방법의 가장 큰 장점은 복원 비용의 최소화다. 2005년 당시 SD텔레시네 가격이 100만원 정도여서 자료원이 편집 장비 정도만 갖춘다면 편당 200만원 내외에서 복원이 가능하였다. 이런 조사들을 통해 2005년 말에는 ‘영화필름 복제 5개년 계획’을 수립하였고, 2007년부터 복원복제 예산이 증액되어 이제는 지속적으로 테크니스코프의 복원이 가능하게 되었다.
다시 태어난 테크니스코프
우리나라에서 테크니스코프 영화는 주로 필름값을 줄이는 방편으로 활용되었다. 하지만 테크니스코프는 다른 기술적인 이점도 있다. 첫째는 같은 분량의 필름으로 촬영시간을 2배 늘릴 수 있는데, 이것이 제작비 절감효과도 있지만, 가령 필름 교체가 매우 어려운 수중 촬영 등 특수한 상황에서 촬영상 편리한 점이 있다. 두 번째는 통상적으로 카메라 셔터는 그냥 두고 화면크기를 절반만 촬영함에 따라 광량이 부족한 여건에서 유리한 점이 있다.
이 글을 쓰면서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뜻밖에, 테크니스코프 방식으로 촬영된 영화는 최근에도 있었다. 물론 전편이 아닌 영화의 일부만이다. (2002)은 모든 슬로모션 신에 이 기술을 사용하였고, 1997년 제작된 <타이타닉>에서는 수중신에서 이 기술을 사용한 것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아마도 테크니스코프의 특성을 이용하여 촬영하고 편집은 통상적인 4퍼포레이션(또는 디지털로)으로 변환하여 작업한 것으로 추측된다.
지금까지 자료원에서는 앞서 언급했던 <부>와 함께, 개관1주년 기획전에서 상영 예정인 <삼각의 함정>(이만희, 1974) 등 두 편이 HD로 리마스터링 복원되었고, 이글이 읽힐 때쯤이면 개관1주년 행사에 사용될 또 다른 영화인 <돌아온 외다리>(이두용, 1974)도 완성될 것이다. 국내는 물론이고 해외에서도 테크니스코프 영화 전편을 HD로 마스터링한 전례가 없다보니 많은 시행착오를 겪어야 했다. 또한 자료원에 필름사운드를 적절히 디지털화할 수 있는 장비가 없어 필름검색기의 일종인 스텐백 및 구형 텔레시네를 통해 픽업한 사운드로 작업을 진행, 영화의 품질이 다소 불만족스럽기는 하나, 30여 년간 묻혀 있던 영화를 감상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는데 많은 보람을 느낀다. 또한, 올해 하반기쯤 되겠지만 이 영화들의 보존용 필름도 제작할 계획이다. 이 과정까지 마치게 되면 한 번의 작업으로 상영용, 방송용 등 다양한 용도의 콘텐츠를 재생산할 수 있게 된다.
작업을 진행하면서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색 재현 시스템 및 작업 공간이 아직 구축 중이라 좀 더 완성도 높은 복원을 진행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과거의 필름 to 필름 방식보다는 분명 월등한 품질이다. (인화 과정에서 렌즈를 통한 변환공정이 생략되어 색수차와 구면수차가 발생하지 않는 것에 기인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어쩌면 인화기의 렌즈가 오래되어 발생한 것일 수도 있다.) 장차 색 재현 장비와 공간의 구축이 완료되면 테크니스코프 복원의 완성도를 방해하는 부분이 많이 개선될 것으로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