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그네와 마술사>(키엔체 노르부, 2004)
피터 잭슨의 영화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스미골''이라는 불쌍한 호빗을 기억하시는지. 왼뺨을 때리면 오른뺨도 댈 것만 같던 그의 선한 얼굴이 절대반지를 손에 넣고부터 차츰 욕망의 화신 ''골룸''으로 변해가는 과정을 이 천재 감독은 얄밉게도 너무나 인상적으로 연출했다. 복잡하고 고된 현실의 급류 속에서 떠내려가다 보면 어느새 낯설어져 버린 자신의 모습에 기겁할 때가 있다. 거울 보기를 차일피일 미루다 보면 마음에 굳은살이 배기고 잡초가 우거진다. 한참을 휘몰아치던 메뚜기떼가 사라진 다음에야 우리는 이미 아무것도 남지 않은 빈 들판을 바라보며 중얼거리는 것이다. ''뭔지 모르지만, 당했다.'' 이게 무슨 말인지 아는 분이라면, 혹시 다음 영화에 흥미를 느끼실지도 모르겠다. 따분한 부탄의 오지에서 쥐꼬리만 한 봉급으로 공무원 생활을 시작한 한 젊은이가 있다. ''영어도 되고 인생도 좀 알고 나름 눈치도 빠른'' 이 젊은이는 한 달 만에 ''돈도 잘 벌리고 이쁜이들도 많은'' 꿈의 나라 미국으로 떠날 기회를 잡는다. 그런데 워낙 인적이 드문 곳이라 버스를 한번 놓치고 나니 산을 내려가는 차편이 만만치 않다. 마음은 급한데 다른 동행이 붙어서 차도 안 잡히고 처음 보는 라마승이 눈치 없이 생글생글 웃으면서 자꾸 말을 건다. 그런데 이 라마승이 심심풀이로 들려주는 한 이야기를 통해 그가 집착하던 것이 정말 중요한 것인지 다시 생각하기 시작한다. 언뜻 새로울 것 없어 보이는 이 영화 <나그네와 마술사>는 아시아쪽에서는 꽤 대중적인 악몽(환각)-깨달음 구조의 액자형식을 띠고 있다. "제가 인생의 깊은 뜻을 몰랐군요, 선생님."으로 끝날 게 뻔한 이 영화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위적인 일반 종교영화(심지어 키엔체 노르부 감독이 승려다)나 상업용 휴먼스토리에서 얻을 수 없는 날것의 울림이 있다. 순박한 필부필녀로 분한 출연진이 사실은 부탄방송PD, 유학파 재원, 은행원 등 때늦은 부탄의 현대화를 몸으로 느끼고 있는 사람들이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한때 티베트 고원 어딘가에서 생을 마감한다면 멋질 거라는 망상을 했던 적이 있다. ''혁명가는 새로운 길을 이끄는 사람이 아니라 방향을 잃은 시대의 흐름에 브레이크를 거는 사람이다''는 말이 있는데, 눈을 가리고 허겁지겁 어딘가로 달리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는 팍팍한 일상을 잠시 멈추고 현몽을 꾸기에 부탄의 고산지대는 꽤 괜찮은 장소라는 생각이 든다. 『구운몽』의 양소유가 꿈에서 깨어난 후 정말 미모의 8선녀와 입신양명의 추억을 잊었을지 믿기는 어렵지만, 최소한 한순간의 진통제로 이만한 게 또 있을까.
by.김기호(한국영상자료원 보존기술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