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키비스트, 자료보존의 천직
한국영상자료원에서 나의 신분은 아키비스트(Archivist)다.
우리 주변의 도서관, 박물관 혹은 미술관에는 많은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하지만 우리가 볼 수 있는 자료는 빙산의 일각일 뿐, 보여지지 않은 이면의 세계, 즉 보존고(또는 수장고) 깊숙이에는 우리 후손들에게 물려주어야 할 각양각색의 소중한 자료들이 보존되고 있다. 아키비스트는 이러한 수많은 자료들의 물리적 특성을 고려하여 적정한 온·습도를 유지하고 손상유무를 판단해 보존처리작업 등의 세심한 손길로 보존수명이 연장되도록 최선을 다하는 이들이라 할 수 있다.
문화선진국이라 일컫는 미국 및 유럽의 선진 아카이브들에서는 영상자료의 보존과 복원에 대한 중요성을 오래 전에 인식하고 이를 후대에 물려주기 위한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여왔다. 덕분에 100여 년이 지난 영상물도 깨끗한 화면으로 감상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어떤가? 근래에 이르러 우리 영상자료원도 보존환경을 최적화했다고 자부하지만, <아리랑>(1926, 나운규)을 비롯해 한국영화사를 수놓은 많은 작품들이 이미 실종돼버린 다음이다.
지난 10월 미국의 보존산업 견학을 위해 뉴욕행 비행기에 올랐다. 당시 뉴욕에서는 ''Photo Plus Expo''라는 전시회가 진행되고 있었다. 올해로 벌써 25주년을 맞고 있는 Photo Plus Expo는 최신 디지털이미지 기자재와 관련 상품들이 전시되어 세계 각국의 관계자와 아키비스트들이 대거 참석하는 엑스포다. 특히 이번 엑스포에서는 최근 각광 받고 있는 디지털이미지자료와 관련해 인쇄표면의 이미지 보존성을 강화하기 위한 특수잉크와 이미지 안착을 강화하는 보조제, 이미지화일 관리프로그램 등의 상품과 모듈이 소개되어 흥미를 더했다.
엑스포를 뒤로하고 미국 최대 보존용품 유통회사인 UP(University Products)社와 지류보존에서 빼놓을 수 없는 처리과정인 탈산처리업체로 유명한 PTLP社를 방문했다.
UP는 한국을 비롯한 100여국을 대상으로 약 4,000여개의 보존용품을 공급하고 있는 보존관련 선두주자이다. 영상자료를 최대한 화학적 위험요소로부터 안전하게 보존하기 위한 첫 번째 단계가 바로 중성제 보존용품의 사용이다. 이들은 전산화된 물류관리시스템으로 수천가지 기기와 보존용품 아이템을 관리하고 있었으며, 아카이벌급 중성재질의 용품을 주문 생산하고 있었다. UP 생산제품은 P.A.T 테스트는 물론, 용품을 만드는 소재성분부터 철저하게 관리하여 유럽은 물론, 아시아 각국의 도서관, 박물관, 아카이브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있다.
PTLP에서는 독자개발한 탈산용액으로 미국의회도서관(Library of Congress) 장서 1,900만권을 대상으로 탈산작업을 진행 중에 있었다. 장서의 수량으로 미루어 언제 끝날지 모르는 정말 대단한 작업이다. 지난날 혹자는 책의 형태는 사라지고 액정을 통해 책을 읽는 시대가 도래 할 것이라 호언장담했지만, 아직 도서관 서가의 책은 건재하고 있다.
미국은 기대 이상으로 보존 관련 산업이 발달되어 있는 나라였다. 미국 대표 도서관에서 헤아리기도 힘든, 언제 끝날지 모르는 장서에 대한 보존처리를 실시하고 있는 대담함(?) 이면에 자리 잡은 그들의 사고방식에 경외심을 품게 된다.
우리 한국영상자료원도 현재 보존을 위해 많은 예산과 인력을 투입하고 있다. 멀지 않은 미래에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by.권영택(한국영상자료원 수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