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을 치룬 1950년대의 미국 할리우드 영화는 뭔가 변하고 있었다. 미국이란 나라가 그렇게 자랑스러워하던 청교도 윤리와 프론티어 정신이란 것이 결국 자본주의의 탐욕을 감추는 위선에 불과한 것이었고, 세계를 빨갱이들의 손에서 지켜내기 위해 그들이 치룬 대가란 것이 부자들의 기름진 배를 채우는 허울이었다. 그들이 그렇게 자랑스러워하던 신화의 장르 ‘웨스턴’도 역겨운 허세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은 몇몇의 감독이 있었다. 그들이 바로 ‘니콜라스 레이’, ‘안소니 만’ 같은 이들이었다. 그들은 50년대 이전의 웨스턴과는 다른 웨스턴을 만들었다. 그들 영화의 주인공들은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 콤플렉스에 빠져 허우적대지 않았고 등장인물들은 복잡한 내면과 결핍, 그리고 죄의식을 드러냈다. 그리고 웨스턴의 제왕 존 포드 역시 변하고 있었다. 미국이란 나라의 암흑을 본 존 포드는 더 이상 미국의 가치를 순진하게 자랑스러워하지 못하고 의심하고 회의하고 윤리적 질문을 던지는 영화들을 만든다.
자성의 결과물, 불량식품 웨스턴
그리고 60년대 할리우드 웨스턴이 자기 스스로를 반성하고 성찰하며 노회해지고 있을 때, 할리우드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는 다른 방식으로 웨스턴을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거의 동시대에 이탈리아에서 웨스턴이 만들어졌고, 브라질에서도 만들어졌다. 이탈리아 감독들은 자신들의 이름을 미국 감독처럼 위장하고, 미국의 싸구려 조연급 배우를 데려다가 미국영화 웨스턴과 똑같은 가짜 웨스턴을 만들었다. 말하자면 불량식품이 만들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이 장난 같은 위장식품에다 큰 돈을 들일 이유가 없었고, 제작비를 아끼기 위해 미국 서부와 비슷한 풍경을 찾아다니다 스페인을 발견해 그곳으로 몰려가 영화를 찍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황야의 무법자>(1964)를 촬영하고 있던 셀지오 레오네의 촬영장에서 차로 한 시간을 가면 셀지오 콜부치는 <쟝고>(1966)를 찍고 있었다. 그런데 구로자와 아키라의 <요짐보>(1961)를 무단 도용한 셀지오 레오네의 이 뻔뻔한 영화는 어마어마한 흥행 수입을 올렸고, 관속에 기관총을 넣고 다니는 이상한 건맨의 싸구려 영화 <쟝고> 역시 그와 비슷한 흥행수입을 올렸다.
그리고 저 지구 반대편 브라질에서는 글라오버 로샤가 남미의 마술적 리얼리즘과 브라질의 신화와 기독교, 미국 웨스턴을 잡탕처럼 뒤섞은 <검은 신, 하얀 악마>(1964)라는 시네마 노보의 걸작이 만들어 지고 있었다. 이 미국 웨스턴의 변종들은 미국인들이 자신들 고유의 신화가 훼손 되었다고 기분 나빠하는 것에 상관없이 전 세계에서 상영되었고,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았듯이 ‘어라! 웨스턴은 미국 놈들만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네!’ 하면서 홍콩에서는 신 무협영화가 만들어지는 촉매제가 되었고, 일본에서도 뻔뻔스럽게 세인이 입었던 사슴가죽 옷을 입은 검은 머리의 일본배우 고바야시 아키라가 기타와 권총을 들고 황야를 달리는 일본제 웨스턴 <철새 시리즈>가 만들어 졌고, 독일에서도, 프랑스에서도, 멕시코에서도 만들어졌다.
이탈리아에서는 <황야의 무법자>의 흥행성공에 힘입어 미국식 이름으로 마치 미국 웨스턴인양 관객을 속이려던 셀지오 레오네는 미국식 이름인 봅 로버트슨을 버리고 당당하게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황야의 무법자>의 후속타, <석양의 무법자>(1966), <석양에 돌아오다>(1966)를 만들어 내고, <쟝고>의 후랑코 네로 역시 파란 눈의 외로운 늑대라는 자신의 트레이드마크를 십분 활용하여 <프로페셔널 건> <카오마> <아디오 텍사스>를 만든다. 미국식 이름 ‘몽고메리 우드’라는 이름으로 어설프게 미국 배우처럼 보이려 잔머리를 굴리다 제법 자신감이 생긴 전직 소방관 출신의 총잡이 줄리아노 젬마 역시 자신의 이름으로 커밍아웃하고 <황야의 은화 일불> <아디오 그링고> <남쪽에서 온 무법자-아리조나 콜트>를 만든다. 이탈리아제 서부극은 전 세계를 강타하고, 스스로 진화하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사기꾼이 사기를 치듯이, 밀렵꾼이 야밤에 밀렵을 하듯이 만들었던 영화들이 스스로 자신의 세계관을 가지기 시작하여 제법 어른스러워지고 영화다워지기 시작한다. 웨스턴이라는 장르를 성찰하고 미국 역사와 혁명. 그리고 자본주의의 가치에 대해 분탕질을 치는 영화로 진화하는 것이다.
이탈리안식 웨스턴과 독립군 영화의 만남
그리고 한국 충무로에는 60년대 초 만주 벌판을 달리던 독립군들의 영화들이 있었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만주 활극, 또는 독립군 전쟁영화 정도라고 불러야 하는 영화들이었다. 이탈리아 웨스턴이 한국에 수입되자, 만주 활극에 웨스턴적인 요소들이 뻔뻔스럽게 들어가기 시작했다. <광야의 표창잡이>(박문수, 1970)에서는 황야의 무법자를 그대로 옮겨 총 대신 표창을 던지게 하고, <황야의 외팔이>(김영효, 1970)에서는 홍콩의 외팔이와 황야의 무법자가 합쳐졌다. 존 스터지스가 <7인의 사무라이>를 리메이크한 <평원의 7형제>(일본 개봉명인 <황야의 7인>으로 알려져 있다)가 나오자 우리는 재빨리 <7인의 괴한>(김인수, 1971)을 만들었고, 이외에도 <애꾸눈 박>(임권택, 1970) <돌아온 방랑자>(김효천, 1970) <지지하루의 흑태양>(장석준, 1971) <황야의 독수리>(임권택, 1969) <흑룡강>(이만희, 1965) <석양의 하르빈>(강범구, 1970) <황금 독수리>(김시현, 1971) <태양은 늙지 않는다>(고영남, 1970) 등등 만주를 무대로 한 웨스턴들이 속속들이 만들어진다.
그리고 <쇠사슬을 끊어라>(이만희, 1971)가 만들어진다. 이만희 감독의 71년도 작품인 이 영화는, 이전 만주 웨스턴들이 어수룩한 내용으로 간신히 만들어졌다는 인상을 주는 데 비해, 이탈리아 웨스턴과 한국 깡패 영화의 느낌이 혼합되어 충분히 재미를 준다. 셀지오 레오네의 <석양에 돌아오다>에서 클린트 이스트우드, 일라이 워락, 리반 클리프가 묘지에 묻힌 금을 찾아 서로 이해에 따라 배신하고 구해주기를 반복했다면, 이 영화에서도 장동휘, 남궁원, 그리고 허장강은 티베트 황금 불상을 손에 넣기 위해 배신과 협력을 되풀이한다. 명백하게 <석양에 돌아오다>의 흔적이 보인다. 아슬아슬하게 모방의 단계를 넘어선 이 영화는 이 영화 이전에 만주 웨스턴들이 가지고 있던 재미있는 것들과, 그들이 성취하지 못했던 아쉬움들을 모두 집약시켜 놓았다. 우선 소속 없는 떠돌이 건달 총잡이 장동휘, 도박꾼에 약삭빠르고 비겁하지만 매력적인 미남 건달 남궁원. 그러나 사실 미남 건달은 독립단원이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언제나 미남 건달은 나중에 독립군으로 밝혀진다는 점이다. 왜 미남들은 항상 독립군인가? 이 캐릭터의 법칙이 어디까지 가냐 하면, 70년대 말 깡패 영화와 반공물이 결합된 <동백꽃 신사>(이혁수, 1979)에서 장동휘 박노식에 이은 차세대 건달 주자인 이대근을 골탕 먹이는 약삭 바른 사기꾼, 신성일이 라스트에 가서는 특수 수사요원이었음이 드러나는 대목까지 간다. 그리하여 미남들은 못된 짓을 하지만 분명히 뭔가 있어! 하는 순진한 편견을 굳히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의 허장강은 역시 일본군 밀정으로 출연한다. 장동휘도 돈과 여자만 탐하지만, 마지막에는 조국독립의 숭고함 앞에서는 굵은 눈물을 떨어뜨리고, 남궁원이야 뭐 잘 생겼으니까 당연히 좋은 놈이라는 게 드러날 거고, 하지만 우리의 허장강! 굳굳하게 일편단심, 돈과 여자만을 쫓으며 사악함과 빠른 머리 회전으로 황금의 냄새를 추적하여 장동휘를 괴롭히고 남궁원을 고문의 나락에 떨어지게 하지만, 마지막에는 자기 꾀에 속아 넘어가 황금을 날려 버린다. 허장강이 내뱉는 육두문자와 대사들은 60년 말, 70년대 초 건달들의 말투가 저런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바보 같은 생각까지 할 정도로 리얼하고 재미있다. 여기에 감초처럼 변태적인 키 작은 꼬마 악당 황해가 일본군 장교로 등장해 그들을 괴롭히고, 허장강이 매번 수작을 부려보지만 마음은 장동휘에 가 있는 미녀 마담이 등장한다.
만주 웨스턴의 한계와 소멸
그들이 입는 의상을 보자. 장동휘의 트레드 마크 검은 가죽 잠바, 허장강의 호피 재킷, 도박꾼처럼 말쑥한 40년대 미국 갱들이 입던 신사복의 남궁원. 등장하는 총들은 또 어떻고? 미제 톰슨 기관총, 일제 장총, 러시아제 권총, 독일 루거 권총, 중공군 따발총까지 등장한다. 무국적에 짬뽕이고, 서투른 표절에 불과하며, 시대착오적이다. 오로지 장사에만 눈이 멀어 예술적 가치라곤 눈곱만큼도 안 보이고, 갓 쓰고 전기 기타 치는 꼴이어서, 싸구려 쓰레기 영화라고 욕 할 수도 있다. 그래도 한국 영화의 고질적 특성, 라스트에서의 조국을 위한 고해성사를 제외한다면, 이만큼 악당 같은 인물들이 뻔뻔스럽게 놀아나는 영화도 드물 것이다. 재미있지 않은가? 드넓은 만주 벌판에서 말을 달리며 총을 쏘고, 온갖 더러운 과거를 숨긴 채 얼굴을 찌푸리고 다니는 방랑자들. 사악한 배반자인 조선인 일본 밀정과 우국충정의 외골수 독립군들, 그들을 노리는 무서운 마적들, 놀라운 무기를 가진 군벌들과 일본군들. 그리고 팔로군, 국부군, 공산혁명으로 추방된 러시아 백군들. 일본에서 건너온 떠돌이 야쿠자들. 눈앞의 이익 때문에 사람의 간도 꺼내 내다 팔 중국 상인들, 오만하고 무식한 일본 상인들. 불나방 같은 온갖 종류의 순진하고, 사악하며 억센 여자들. 그리고 온갖 고초를 당하면서도 살아남으려 발버둥치는 조선 농민들. 서양에서 전래된 각종 사상들이 유령처럼 떠돌고, 그들 앞에 황금이 놓여 있고, 주인공들은 욕망과 죄악의 구렁텅이에 뒤엉켜 절망과 환희 속에서 허우적거린다.
이렇게 풍부한 인물들과 이야기들이 만주 웨스턴 속에 들어가 재미있어지려는 순간, 만주 웨스턴은 이상하게도 조용히 사라져 버렸다. 돈벌이가 안 됐나?
이 영화 이후로 만주 웨스턴은 시들해지고 만주를 배경으로 나팔바지를 펄럭이며 악당들의 뺨따귀를 하얀 구둣발로 20회 이상 강타하는 챠리 셸 주연, 이두용 감독의 태권 영화가 그 자리를 메운다. 이탈리아 웨스턴이 장르의 진화를 거듭하다 테렌스 힐의 코미디 웨스턴으로 자폭하기 전, 가장 왕성한 식욕을 자랑하던 60년대 말, 그들은 멕시코 혁명을 소재 속으로 끌어들여, 이전 이탈리아 웨스턴의 단골 메뉴였던, 모호해진 가치 속에서 욕망만을 추구하던 무법자들에서 한 단계 업그레이드를 단행하여 혁명이란 절대적 가치를 만들어 놓고 그 속에다 무법자들을 풀어놓아 이야기를 만들었다.
우리의 만주 웨스턴은 조선 독립이란 절대로 피할 수 없는 절대치가 이미 주어져 있었고, 그것을 마음껏 우롱하거나 의심하는, 파격을 자행하는 자유와 생각의 여유가 없었다. 서슬 시퍼렇게 버티고 선 검열 앞에서 고만고만한 자기복제와 표절로 근근이 연명하다가 사라져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