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극은 과연 ‘역사극’인가? ‘업계’의 일반적 분류로는 오히려 ‘한복 입는 시대를 다룬 작품’을 통칭하는 경우가 많고, 그런 점에서 코스튬 드라마란 의미에 가깝다. 역사와 아무 상관이 없는 심청의 이야기를 다루어도, 심지어 소복한 귀신이 설치는 괴기물도 사극으로 분류된다. 그런 점에서 사극의 세계가 역사적 사실성과 맺는 관계는, 사람들이 흔히 기대하는 것만큼 그렇게 밀접하지는 않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극이 대중들의 역사인식과 무관한 것도 아니다. 사극이 대중의 역사인식을 만들어내는 방식은 심층의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복잡한 일이다.
도대체 사람들은 왜 사극을 볼까? 역사에 대한 이해를 높이기 위해서? 화려한 의상 때문에? 임금이 통치하는 시대의 매력 때문에? 한 마디로 말하기는 힘들다. 분명한 것은 사극을 즐기는 취향은 과거의 이야기(그것이 역사서에 남은 사건이든 아니든 간에) 속에는 노는 것을 즐기는 취향이고, 어떤 과거를 어떤 방식으로 재현하여 즐기는가에 따라 대중들의 역사인식과 적잖은 관련성을 지닌다는 점이다.
1950년대의 사극 영화를 처음 보는 사람들은 종종 당황하거나 신기해한다. <무영탑>, <왕자 미륵>, <마의태자>, <왕자호동과 낙랑공주>, <꿈> 등 상당수의 작품이, ‘사극’이라는 말로 쉽게 연상되는 조선왕조 이야기와는 거리가 먼, 삼국시대(혹은 후삼국시대까지) 배경의 설화적 이야기라는 점이다. 조선시대는 거리가 가까울 뿐 아니라 비교적 자료도 풍부하여 상대적으로 사실성에 대한 엄밀한 요구를 받는 시대임에 비해, 신라니 고구려니 하는 시대로 옮아오면 창작자의 상상력은 훨씬 자유로워진다. 예컨대, 영화에서 세종대왕이 중국의 공주와 연애를 하는 것으로 그려낸다면 역사학자뿐 아니라 일반관객들도 발칵 뒤집어질 일이지만, 그 연애의 주인공이 고구려의 왕자라면 아무 문제가 없다. 설사 거기에 가야의 공주나 백제의 왕자까지 얽혀서 삼각 혹은 사각관계가 된다 한들 누가 뭐라 하겠는가. 어차피 기록은 없으니 홀가분하다. 1950년대의 고대사의 설화적 이야기를 담은 영화들은 바로 이런 작품들이다.
1950년 영화의 이런 경향은, 영화에서는 새로운 현상일 수 있지만, 대중예술 전반의 흐름으로 보자면 그리 돌출적인 현상은 아니다. 식민지시대의 야담은 매우 인기 있는 대중예술이었고, 1930년대 말부터 1950년대까지는 이러한 소재가 야담의 벽을 넘어 대중소설, 창극(여성국극을 포함한), 악극, 심지어 신극(유치진 작 <원술랑>을 생각해 보라)에까지 두루 나타나는 경향이었다. 그런 점에서 영화 <무영탑>은 옛 역사서에 기록된 단편적인 설화적 기록과, 영화에서 직접 원작으로 삼은 현진건의 소설에만 영향을 받았다고는 볼 수 없다. 이미 이 작품은 1957년 신상옥 감독의 영화로 만들어지기 직전인 1955년에 여성국극으로 공연되어 큰 인기를 얻었다. 낙랑공주, 선화공주, 마의태자, 의자왕 등은 1940,50년대 대중예술의 단골 소재였다.
이런 작품들은 의상 같은 무대미술, 어투 등에서도 비교적 자유롭다. 최근의 드라마 <주몽>, <태왕사신기>의 화려한 의상이 과연 리얼리티가 있느냐는 소리를 들었지만, 이 시대는 사극 제작의 초창기로 조선시대 의상에 대한 고증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시대였으므로 더더욱 심했다. 삼국시대 복장이라고 흔히 생각하는, 끝동과 깃?아랫단 등을 진한 색으로 선을 두르고 허리를 묶는 저고리에 바지나 치마를 입는 것은 기본이지만, 공주는 진주 등 비즈 장식과 목걸이?귀고리가 화려하여 조선조 의상의 화려함과는 그 종류가 다르다. 그에 비해 임금은 신라형 왕관이 아닌, 조선시대에나 쓰던 면류관을 쓰고 나온다.
의상의 화려함이 여성 의상에 집중되어 있듯, 이들 영화의 중심은 ‘공주’(혹은 귀족의 딸)인 경우가 많다.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사극이, 공주는 물론 아니고, 심지어 왕자조차도 뒷전으로 밀린 채, 오로지 왕의 이야기로 점철되어 있는 것을 생각하면 주목할 만한 현상이다. 공주가 중심이니, 당연히 이야기의 중심은 정치가 아니라 사랑, 그것도 낭만적인 사랑이다. 공주와 왕자의 낭만적이고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를 아름답게 해주는 배경은, 전쟁이나 왕권 교체의 혼란스러운 시대이다. 낙랑의 공주는 고구려의 왕자를 위해 자명고를 찢고, 귀족의 딸은 정혼자인 장군을 뿌리치고 백제의 석공 아사달을 따라 나선다. 도금봉, 최은희, 윤인자, 이민자 등 요염하거나 글래머인 왕비와 공주들은 연애하기보다도 더 쉽게 정치 영역에 들락거린다.
이런 무대미술의 특징 때문에 이들 영화는 이국적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 의자와 테이블이 놓인 입식생활의 실내, 과도하게 쓰인 커튼, 왕비와 공주가 든 깃털 부채, 왕의 뒤에서 시녀들이 들고 서있는 나비 모양의 부채 등은, 그 영화 속 배경이 한국이 아니라 중국이나 옥황상제의 나라, 혹은 이름도 모를 더 먼 나라들을 연상시킨다. 여기에 공주는 숄을 어깨에 두르고, 최은희처럼 얼굴 크고 어깨 떡 벌어진 여배우는 하늘하늘한 숄을 머리 전체에 두르기도 하니, 중국이 아니라 서남아시아나 고대 그리스/로마의 분위기마저 풍긴다.
분명 우리 역사 이야기이나 이국적이라니? 확실히 이들 영화가 지닌 역사인식과 세계인식이 결코 단순하지 않다. 고대사 화려함에 탐닉하는 이런 경향은 일제시대 일본 관학자들이 퍼뜨린 역사인식에 크게 영향 받은 것이다. 이들은 조선조를 당파싸움?쇄국?중화주의?문치(文治)로 나라 망해먹은 왕조로 단죄하여 그들의 식민지배를 합리화하는 대신, 백제?신라 등의 고대사를 일본과 공생했던 화려한 시대로 규정하였다.(이런 역사인식은 경북 출신 대통령 박정희가 부추긴, 화랑의 힘으로 통일한 신라의 자부심, 그리고 이에 상처받은 호남인들의 백제 콤플렉스로 이어진다.) ‘대동아공영권’이 주창된 일제 말에 이런 경향의 대중예술이 크게 늘어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닌 것이다. 이런 경향이 해방 후까지 이어지면서, 1950년대에 물밀듯 들어온 <쿼바디스>나 <십계> 같은 할리우드 사극 영화를 모방하고 싶은 욕망까지 덧붙여진 것이다. 전쟁의 폐허 위에서 낭만적 사랑 이야기를 구가하고 싶은 대중들의 욕망에, 이렇게 복잡한 역사인식과 세계인식이 결합되어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 시대 영화를 그저 ‘웃기는 짜장면’이라고만 치부해버릴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