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영화사를 한자리에서 만나다
1970년대 이기 팝과 함께 베를린에 살았던 데이비드 보위의 최근 앨범 중 ‘Where are we now?’라는 곡을 들어보면, 그가 추억하는 베를린에서 가장 처음 등장하는 곳이 바로 포츠다머 플라츠(Potsdamer Platz)다. 베를린영화제 기간 가장 북적대는 이곳은 제2차 세계대전 때 완전히 파괴되었고 이후 베를린 장벽이 관통했던, 베를린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심장부다. 그 중심에 필름하우스(Filmhaus) 건물이 있다. 필름하우스에는 영화박물관과 도서관을 운영하는 독일시네마테크 외에도 유기적인 관계를 갖고 있는 아르제날 극장(Kino Arsenal), 독일영화TV아카데미가 함께 둥지를 틀고 있다. 베를린영화제에서는 독일시네마테크가 회고전을, 아르제날 극장을 운영하는 아르제날 필름비디오협회(Arsenal-institut für film und videokunst)가 독립영화 섹션인 포럼 부문을 맡아 기획한다.
방대한 자료를 자랑하는 독일시네마테크 1963년 베를린 시는 영화감독이자 수집가이던 게어하트 람프레히트(Gerhard Lamprecht)가 보유했던 방대한 영화 컬렉션을 인수해 이를 보존하고 활용할 새로운 기관, 독일시네마테크를 설립했다. 이후 독일시네마테크는 영화는 물론 텔레비전 매체의 역사와 기술 변천에 관한 모든 것을 수집해왔고, 2000년부터 영화박물관을 통해 대중에 공개했다. 독일시네마테크는 1만3,000편의 영화필름을 소장하고 있는데, 아방가르드 영화, 실험영화, 다큐멘터리에 방점을 찍고 있다. 그 외에도 100만 점이 넘는 영화스틸, 약 3만 점의 시나리오, 1만6,000점의 포스터, 그리고 수많은 영화기자재를 소장 중이다. 1919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세트디자인 스케치와 모형, 현대영화의 특수효과 컬렉션도 포함된다. 필자의 눈길을 끌었던 것은 독일 영화인과 관련된 문서, 개인 소품들까지 비중 있게 수집하고 있는 점이다. (이 지점에서 한 번 이사 갈 때마다 상당량의 영화 자료를 버리셨다며, “그걸 어떻게 짊어지고 다녀” 혹은 “아이고, 그거 다 쓰레기야”라고 말씀하시던 한국의 원로 영화인분들이 생각나면서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
영화박물관은 전체 4층으로 이루어졌는데 두 개 층은 독일영화의 역사를 보여주는 상설 전시로, 나머지 두 개 층은 기획전으로 구성된다. 상설 전시는 역시 독일의 표현주의 영화와 마를렌느 디트리히(Marlene Dietrich)를 위해 많은 공간을 할애했지만, 뉴저먼시네마로부터 현재까지는 예상과는 달리 각각의 감독별로 매우 공평하게 작고, 똑같은 크기의 공간만을 할애해 이들에 대한 평가를 조심스럽게 다음 세대로 넘기고 있다는 인상을 남겼다.
독일 영화사 속을 걷다, 상설 전시 박물관의 초입은 심플하고 함축적인 메시지를 주면서 공간적으로 좁아져 첫 번째 전시장부터 탁 트이게 전환되는 느낌을 주는 게 보통인데, 독일시네마테크의 영화박물관은 모든 차원에 반사경을 설치하고 곳곳에 대표적인 독일영화 영상을 큼직큼직하게 보여주는 대담함으로 미래 영화 속을 걷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이 선 굵은 기획은 이후 상설전시의 클라이맥스라 할 수 있는 프리츠 랑의 <메트로폴리스> 전시와 흐름을 같이한다. 초기 영화 전시는 촬영과 영사 기자재의 기술적 측면보다는 ‘개척자와 디바’라는 제명에 걸맞게 인물 중심으로 흥미롭게 풀어놓아 첫 번째 방부터 발길을 붙잡았다. 1912년 베를린에 지어진 바이오스코프(Bioscope Studio)의 설계도가 남아 있어 흥미로웠고, 아스타 닐센(Asta Nielsen) 같은 무성영화 시절 스타들이 인물별로 정리된 영화 장면뿐 아니라 타블로이드 기사 같은 다양한 자료를 터치스크린으로 생동감 있게 살려내고 있었다.
두 번째 방은 독일 표현주의 영화의 시작을 알리는 <칼리가리박사의 밀실>(1920). 베를린 근교에 지어진 유리로 만든 무성영화 특유의 스튜디오를 축소 모형으로 재현했다. 스케치와 문서 자료를 바탕으로 조명의 정확한 위치까지 잡아냄으로써 표현주의 트레이드마크인 불안하게 뒤틀린 공간, 길게 드리워지는 강렬한 그림자 등을 재현한다. 바이마르공화국 시기. 무르나우(F.W. Murnau)의 <마지막 웃음>(1924)에서 에밀 야닝스가 입었던 호텔 포터 유니폼이 멀쩡하게(!) 전시되어 있고, 조 메이(Joe May)의 <아스팔트>(1929)를 위해 그려진 스케치들은 지금 봐도 꽤나 모던하고 정교하다. 프리츠 랑(Fritz Lang)의 < M >(1931) 스튜디오 모형은 들여다보며 카메라 위치를 실제 화면과 맞추어보는 재미가 있다.
다음은 <메트로폴리스>(1927) 전시장. 두 개 층을 이어서 공간적으로도 훌륭하게 연출하고 있는데, SF영화의 원형이 되는 미래 도시 이미지들은 그야말로 압도적이다. 마를렌느 디트리히 전시장에는 디트리히 팬이라면 흡족해할 만큼 다양한 소장품을 전시 중이다. 그녀의 가족들이 유품을 모두 독일시네마테크에 기증했기 때문. 이후 나치 정권 시기의 <올림피아>(1938)와 프로파간다 필름의 흐름을 볼 수 있는데, 특히 이 시기 미국으로 망명했던 독일 영화인들을 비중 있게 다루고 있다. 또한 기획전시에서는 할리우드로 건너가 활동했던, 최근 가장 영향력 있는 독일인 프로듀서이자 제작자 베른트 아이힝거(Bernd Eichinger, 1949~2011)를 조명하고 있다. <브루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1990)에서 드러나듯 초기에는 아웃사이더에 관심을 보였고, 이후 <레지던트이블> 시리즈 같은 히어로물을, 최근에는 <향수>(2007)를 제작했다. 영화박물관을 전면에 내세우며, 세계영화사의 중심에 자리했던 독일영화를 소개하고 있는 독일시네마테크의 전략은 성공적으로 보인다. 특히 영화 팬이라면 독일 표현주의 영화의 정교한 스케치와 모형을 보며 꽤나 즐거운 시간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by.최소원(독일통신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