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만이 희망이다
가끔 시나리오를 쓰다 보면 나는 왜 이렇게 주인공을 벼랑 끝에 몰지 못해서 안달일까 싶을 때가 있다. 그의 본능과 욕망을 위한 일이라고 스스로 합리화하지만 그의 인생을 감싸 안을 만한 마음의 여유가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자신이 만든 인물을 끝까지 책임지고 사랑하며 그의 삶을 응원하는 것. 자신이 만든 인물의 삶을 자극적인 설정이 아닌 깊고 담백한 정서적인 방식으로 관객을 설득하는 것. 요즘 두 번째 장편 영화를 준비하면서 매일 고민하는 지점이다. 문득 ‘나에게 그런 영화가 무엇이었을까’라고 떠올렸을 때 가장 먼저 생각난 영화가 바로 <꽃피는 봄이 오면>(류장하, 2004)이다.
찾아갈 가족도, 찾아올 가족도 없이 잠으로 시간을 버티던 2004년의 추석날, 이 영화를 보고 돌아오던 고갯길에서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PC방에 들러 이 영화에 울려 퍼지던 트럼펫 음악들을 mp3에 왕창 다운로드해 하룻밤 가득 돌려 들었었다. 당시 열여덟밖에 안 된 나이에 나는 뭐가 그리 가슴 깊이 사무쳐서 그 영화를 마음에 오래도록 묻고 싶었던 것일까. 오랜 자신의 꿈을 포기하고 새 삶을 시작한 중년 교사의 속사정이야 머릿속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었지만 내가 이 영화에 마음을 두었던 것은 외로운 사람이 새 삶을 찾아간 그곳에도 여전히 외로운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직장도 잃고, 사랑도 떠나버린 현우는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강원도 도계의 중학교 관악부 임시교사로 부임한다. 한때는 탄광으로 유명했지만 탄광이 없어지면서 모두들 도시를 떠나고 휑하니 비어 있는 동네. 동네 사람들이건 관악부 아이들이건 서울에서 온 현우를 지나칠 정도로 경계하며 낯설어하지만 이미 지칠 대로 지친 현우는 자신을 설득하거나 강요하지 않고 서서히 자신의 방식으로 다가간다. 반항과 사고로 바빴던 아이들이 하나씩 마음의 문을 열면서 현우의 악단은 앙상블을 만들어나가고 현우도 지쳤던 자신의 삶을 다시 돌아 보며 꽃피는 봄을 준비한다. 외로운 선생과 외로운 아이들이 음악으로 서로를 위로하던 풍경에 나는 많은 위안을 받았다. 태어난 팔자와 주어진 운명도 결국 사람 앞에선 아무것도 아니구나.
영화를 보고 일 년이 지나 스무 살을 준비하던 어느 겨울 날. 나는 무심코 기차를 타고 영화의 배경이 되었던 강원도 도계로 여행을 다녀왔다. 아이들이 악기들을 짊어지고 오르던 고갯길, 마을과 현우의 등대가 되어주던 연이약국, 탄광은 사라지고 사람만 남아 있는 판자촌까지 영화는 떠났지만 그 풍경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가끔 나는 보란 듯이 잘 살고 있는데 왜 이렇게 행복하지 않을까, 만족스럽게 먹고 자고 일하면서도 왜 나는 여전히 공허하고 외로울까 싶을 때마다 이 영화가 오롯이 생각난다.
by.김태용(영화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