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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필름 아카이브, Big Four
제 64회 국제필름아카이브연맹(FIAF, International Federation of Film Archives) 총회가 지난 4월 말 파리의 시네마테크 프랑세즈(Cinematheque Francaise)에서 열렸다. 정회원 및 준회원 승인과 더불어 ''필름 아카이브와 저작권법''을 주제로 한 심포지엄, 아프리카 지역의 필름 아카이브 현황을 논의하는 워크숍이 열린 이번 총회에는 360여명의 필름아카이브 관련자들이 참석하였다. 참으로 많은 필름아카이브들이 모인 것이다. 그러나 70년 전 바로 이 곳 파리에서 첫 번째 모임을 가질 때 참석한 아카이브는 ''original Big Four''로 불리는 4개의 기관이었다. 정확하게 1938년 6월 17일, 미국의 현대미술관Museum of Modern Art 필름 도서관Film Library의 아이리스 베리Iris Berry와 존 애보트John Abbott, 독일의 제국필름아카이브(Reichfilmarchiv)의 프랑크 헨젤(Frank Hensel),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의 앙리 랑글루아(Henri Langlois) 그리고 영국의 국립필름도서관(National Film Library)의 오웬 버그한(Olwen Vaughan)이 모여 FIAF 제1차 총회를 가진 것이다.
제국 승리의 기록 혹은 영화 연구의 메카
이 4개의 아카이브는 영화문화가 발전한 나라의 대도시에 설립되었으며 비영리적 목적을 위해 영화필름을 수집하고 상영한다는 점에서 유사하지만 각각의 독특한 성향을 가지고 있다. 우선 1935년 2월 독일 베를린에 설립된 제국필름아카이브는 국가에서 운영하는 국립 아카이브였다. 1933년 권력을 장악한 나치는 레니 리펜슈탈(Leni Riefenstahl)의 <의지의 승리>, <올림피아>를 포함한 많은 영화들을 당선 전용으로 보급하였고 자신들의 영원한 제국의 승리에 대한 기록을 남기기 위해 이 자료들을 적정한 조건하에 보관하여야 했다. 정부의 후한 재정적 지원을 받으며 성장하였던 이 기관은 1940년 FIAF 제3차 총회를 준비하기도 하였지만 제2차 세계대전 시 파괴되는 불운을 견디어야 했다. 전후 이 곳에 소장되어 있던 일부 영화필름자료들만이 동독으로 이전되었다.
같은 해 뉴욕에 있는 사설기관인 현대미술박물관은 록펠러 재단의 후원으로 필름 도서실을 운영하게 된다. 박물관 부속인 이 필름 도서실은 필름의 보존보다 활용을 통한 영화연구에 초점을 맞추었다. 인근 대학과 소규모 시네클럽(필름 소사이어티)에 적은 비용을 받고 영화필름을 대여해 주며 영화상영과 토론을 활성화시켰는데 그 결과로 미국 대학의 영화교육이 발전하였다 해도 전적으로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이 모든 활동을 주도적으로 이끈 사람이 바로 ‘아이리스 베리’다. 현대미술박물관에서 사서로 일을 시작한 그녀는 할리우드의 스튜디오를 설득하여 필름 자료를 그녀의 필름 도서실로 옮겨왔고 심지어 나치의 ‘제국필름아카이브’을 설득하여 독일 내에서 포르노영화로 취급되는 <푸른 천사>를 제외한 다수의 영화필름들을 가지고 왔다.
“필름의 영구적인 가치를 보관할 장소”
이로부터 1년 후인 1936년 9월 프랑스 파리에서 시네마테크 프랑세즈가 공식적으로 문을 열게 된다. 당시 21살이었던 영화광 앙리 랑글루아가 1949년 <짐승의 피>라는 다큐멘터리로 감독 데뷔한 23살의 조르주 프랑주Georges Franju와 함께 자신들만의 시네클럽을 필름 아카이브로 승격시킨 것이다. 그러나 랑글루아는 전설적인 시네필답게 수집한 영화를 틀기만 했다. 그에게는 소장한 자료들을 어떻게 카달로깅 할 것인가, 그리고 이를 어떻게 보존할 것인가를 고민할 시간이 없었다. 그는 열정적으로 영화필름을 모았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이 영화들을 보여주어야 했다. 그의 첫 번째 프로그램은 엡스탱Epstein의 <어셔 가(家)의 몰락>, 비네Wiene의 <칼리가리박사의 밀실>, 레니Paul Leni의 <마지막 경고>였는데, 랑글루아는 시네마테크 내에서 영화에 대한 논쟁을 허락하지 않았다고 한다.
랑글루아가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에서 영화를 보여주는데 모든 열정을 바쳤다면, 그 해 영국 런던에서 "필름의 영구적인 가치를 보관할 장소"로 창립된 국립필름도서관은 자료보존을 제일의 목표로 삼았다. 1933년 설립된 영국영화연구소British Film Institute 소속인 이 국립필름도서관은 창립이래로 필름보존 기술을 개발하는데 엄청난 노력을 투여했다. 이 보존을 최우선에 두는 정책은 일정 정도 린드그렌Ernest Lindgren의 영향 때문이었는데 랑글루아가 거대한 체구를 가진 열광적인 영화광이었다면 린드그렌은 마르고 단정한 체구의 내성적인 아키비스트였다. 그는 질산염 필름을 안전필름으로 변환하여 영구적으로 보존하는데 온 관심을 쏟았고 필름의 수집 역시 다소 선택적으로 진행하였다.
다양한 형태와 모습의 아카이브
30년대 말 설립된 위의 아카이브들의 초기 역사를 보면 아카이브의 형태와 쟁점들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아카이브는 크게 제국필름아카이브처럼 국가의 재정으로 운영되는 국립 아카이브와 현대미술박물관 필름도서관처럼 사설 기관에서 기증과 기금을 받아 운영하는 사립 아카이브 두 종류로 나뉘어 지며, 이 후 시에서 운영하는 시립 아카이브(뮌헨 영화박물관), 대학에서 운영하는 대학부속 아카이브(UCLA 필름 아카이브) 등 다양한 형태의 아카이브들이 설립된다. 재정이 어디에서 나오는가에 따라 수집의 방향이 달라지며 운영원칙도 차이가 나게 된다. 또한 자료 발굴, 수집, 복원, 보존, 활용 중 어디에 방점을 찍을 것인가에 대한 선택의 문제가 도출되며, 재정과 인력의 한계라는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어느 작품부터 수집하고 복원해야 하는가에 대한 또 다른 가치판단의 문제가 떠오른다. 이 문제들은 70년이 흐른 현재에도 ''큰'' 문제이고 이에 대한 정답을 찾기란 향후에도 그리 쉽지 않을 것이다.
다음에는 질산염 필름을 둘러싸고 벌어진 일들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
by.
오성지(한국영상자료원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