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여름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기자 시절, 필자는 청량리역 근처의 한 극장을 취재한 적이 있다. 지금은 사라진 해천극장. 당시 그 극장은 강북에 거의 유일하게 남아 있는 동시상영관이었고, 강남엔 사당동의 이수극장 정도가 있었다. 7080세대에겐 잊을 수 없는 추억의 공간인 동시상영관(업계 용어로는 ‘이본(二本) 극장’)의 소멸. 돌이켜 생각해보면, 이것은 1980년대부터 조금씩 진행된 한국 관객 문화의 대격변이 완벽하게 마무리되었다는 것을 상징하는 작은 사건이었다.
지난 10년의 한국영화계는 어떤 대안도 없이, 과거와의 ‘단절’에서 일단 시작했고 변화를 추구했다. 그 방향이 옳았는지는 모르겠지만, 2000년 이전의 영화 환경과 현재를 비교해보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다르다. 한국영화의 시작을 1919년의 <의리적 구토>라고 볼 때, 지난 10년은 이전의 80년과 맞먹을 만큼의 극심한 변화의 시기였다. 1990년대에 기업과 금융 자본이 들어왔다고는 하지만, 21세기에 영화는 드디어 ‘중요한 산업’이 되었다.
한국 영화문화의 도약
21세기의 첫 10년 동안 한국영화는 정신없이 롤러코스터를 탔다. 1999년 <쉬리> 이후 한국영화 르네상스가 열리는 듯 보였지만 최근 2~3년은 다시 불황기로 접어들었고, 2009년 회복기에 접어들었다고는 해도 상황이 긍정적이지만은 않다. 한때 ‘한류’ 붐 속에서 해외 시장이 열리나 싶었지만 그 문은 너무나 금방 닫혔고, 영화사들의 ‘우회상장’과 ‘코스닥 진출’과 ‘인수 합병’ 열풍도 3~4년 사이에 실속 없는 일이라는 게 판명되었다.
이처럼 정신없이 돌아가던 영화계에서 유일하게 꾸준했던 분야가 있다면 바로 극장이다. 지난 10년 동안 극장 수,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스크린 수’는 매년 상승곡선을 그리며 증가했고 이에 따라 관객 수도 늘어났다. 그 중심인 멀티플렉스는 한국 영화산업과 관람문화의 화두가 되었다. 인구 5000만 명이 안 되는 나라에서 이른바 ‘천만 영화’가 다섯 편이나 나올 수 있었던 건, 2004년부터 1500개에 육박하기 시작한 스크린 수 때문이다. 영화진흥위원회의 통계 자료를 보면, 2003년까지 1132개였던 스크린 수는 2004년에 1451개로 급증했고, 2008년엔 2004개에 이른다. ‘천만 영화’가 나온 시기가 2004~2009년 사이라는 걸 생각하면, 그 신화는 ‘와이드 릴리징’의 규모를 키울 수 있었던 ‘스크린 수 급증’이라는 물적 토대를 기반으로 한 것이다. 지난 10년 한국의 관객문화를 한 단어로 요약하자면 그것은 ‘규모’이며, 모든 것은 숫자로 환산되었고 대량화되었으며 규격화되었다. 이것은 1990년대의 관객 문화가, 그토록 뜨겁고 역동적이었던 시기를 보낸 후 마침내 도착한 지점이기도 했다. ‘영화문화’에 한정시킨다면, 한국영화사에서 20세기의 마지막 10년만큼 뜨거운 시기는 없었다. ‘1990년대’는 비디오 대여점을 중심으로 한 소프트웨어 시장의 황금기였고, 시네마테크의 맹아기였으며, 1995년엔 동숭시네마텍이 개관하면서 ‘아트 필름’ 문화가 시작되었고, ‘왕가위 열풍’은 당시 마니아 문화를 대변하는 신드롬이었다. 1994년에 시작된 ‘서울단편영화제’는, IMF로 4회까지만 열리긴 했어도, 한국영화 문화에 만만치 않은 영향을 주었다. 1996년 부산국제영화제와 1997년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의 개막은 ‘우물 안 개구리’ 수준이었던 한국의 영화 문화가 뛰어오를 수 있는 도약대가 되었다. 한편 강한 산업적 드라이브도 있었다. 1980년대 말에 들어온 직배 영화는 격렬한 저항을 거친 후 결국은 극장가에 안착했고, 여기엔 1990년 겨울 <사랑과 영혼>이 기폭제 구실을 했다. 1994년엔 프린트 벌수 제한이 풀리면서 와이드 릴리징의 기반이 마련됨과 동시에 재개봉관은 서서히 사라지게 되었다. 1998년엔 ‘강변 CGV11’이 개관하면서 이전의 복합관을 뛰어넘는 멀티플렉스 문화가 시작되었다. 1998년 <타이타닉>과 1999년 <쉬리>의 흥행은 한국 극장가에서도 ‘메가 히트’가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했다.
1990년대 한국의 관객 문화엔 팽팽한 긴장과 보이지 않는 균형 감각이 존재했다. 문화로서의 영화와 산업으로서의 영화. 그 필요성들에 대해 관객들은 매우 긍정적이며 적극적으로 반응했다. 예술영화전용관의 성공은 주류 수입업자들마저 자극해, 수많은 작가영화와 예술영화들이, 극장 상영이 불가능하다면 최소한 비디오 출시를 통해 관객과 만났다. ‘으뜸과 버금’이나 ‘영화마을’ 같은 비디오 체인, ‘문화학교 서울’ 같은 사설 시네마테크는 마니아들의 든든한 토대가 되기도 했다. 부산영화제와 부천영화제에 몰린 관객들의 반응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러면서 관객들은 직배 영화의 물량 공세에도 현명하게 대처하며 옥석을 가려냈고, ‘신문물’인 멀티플렉스에 대해서도 적극적이었다. 사실 ‘강변 CGV11’는 많은 반대 속에서 탄생했으나, 관객들의 뜨거운 반응은 이후 한국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지각 변동을 예상케 했으며, 2000년에 생긴 코엑스의 메가박스는 메가플렉스(13개관 이상) 시대를 열었다.
‘구획’과 ‘소통’과 ‘분배’
하지만 21세기로 넘어오면서 그 긴장과 균형은 서서히 ‘산업’ 쪽으로 기울었다. 그 중심엔 ‘한국영화 르네상스’가 있었다. 복기해보면, <쉬리> 이후 한국영화의 선전에 대한 평가는 대부분 양적인 부분에 치중된 것이었다. 2000년의 <공동경비구역 JSA>, 2001년의 <친구>, 평단의 뭇매 속에서도 건재했던 ‘조폭 코미디’ 신드롬, 사뭇 로또와도 비슷해 보이는 ‘천만 영화’의 등장…. 지난 10년 동안 한국영화의 절대적 화두는 ‘흥행’이었고, 그 과정에서 관객들은 알게 모르게 많은 것을 잃어야 했다. 그것은 영화라는 ‘정서적 경험’의 상실이었다.
어느덧 영화는 수백 개의 상영관에서 한꺼번에 개봉되어 3주 안에 소비되는 상품이 되었다. 서울시네마테크의 김성욱 프로그래머는 “극장이라는 곳엔 두 가지 기능이 있다. 배급 창구로서의 기능과 정서적 기능. 옛날엔 한 극장에서 한 편의 영화를 장기 상영했다. 특정 극장에 대한 인식이 강했고, 그 안에 사람들이 모 여들었다. 그것은 며칠 몇 시에 몇 명 정도의 사람들이 모여서 같이 영화를 본다는 정서적 경험이며, 그 기억을 공유하는 커뮤니티가 형성되는 셈”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21세기 한국의 영화관은, 소수의 극장을 제외하곤 그런 기능을 상실했다. 전국 어디를 가더라도 똑같은 인테리어에 똑같은 팝콘을 파는 멀티플렉스에서, 대량 살포된 몇 편의 영화 중에 한 편을 선택해야 한다. 마케팅 비용은 급증했고, 각종 매체의 영화 관련 저널들은 미친 듯이 신작을 소개하며 영화 자본의 회전 속도를 높였다.
물론 ‘흥행중심주의’와 ‘물량주의’가 파생시킨 문제점들에 대한 반성과 보완도 꾸준히 있었다. 2000년에 생긴 ‘서울시네마테크’, 2001년에 있었던 ‘와나라고 운동’, 2002년에 시작된 아트플러스 시네마네트워크, (실효성은 거의 없었지만) 2004년에 만들어진 제한상영관 제도, 끊임없이 제기된 상영관 독과점 논쟁, 부산?부천?전주 이외에 여러 지자체의 지원과 다양한 방식을 통해 탄생한 수많은 영화제…. 특히 영화제 문화는 지난 10년의 관객 문화에서 비약적으로 발전한 부분이다. 이제 영화제는 일상적 이벤트가 되었다. 1년에 크고 작은 규모로 거의 100개에 달하는 영화제가 열리며, 항시적으로 특별전과 회고전을 기획하는 시네마테크들도 있다. 영화제의 주체도 지자체에서 벗어나 점점 다양해졌고, ‘여성’ ‘인권’ ‘청소년’ ‘환경’ ‘다큐멘터리’ ‘건축’ 등 그 콘셉트도 세분화되었다.
하지만 ‘대세’에 비한다면, 이러한 움직임은 그다지 충분한 수준이 아니다. 대부분의 ‘일반적 관객’들은 개인화되고 파편화되었다. PC 통신의 동호회 같은 커뮤니티도 사라졌고, 영화 저널도 관객을 충족시키지 못한다. 공적 기관도 ‘관객’에 대해서는 손을 놓은 상태다. 수용자에 의한 영화 담론의 형성과 소통은 사라지고, 그 자리를 블로그와 평점이 차지하고 있다. 물론 주체적인 관객들은 차별화된 상영관과 영화제를 찾음으로써 ‘저항’한다. <원스>나 <블랙> 같은 영화의 알찬 흥행은 좋은 예다. 하지만 이것은 정말 희귀한 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극장 문화의 획일성을 보완할 만한 것이 없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짚고 넘어갈 부분은, 지난 10년 관객 문화의 중요한 키워드 중 하나인 ‘다운로드’다. 개봉 영화에 대한 불법적 접근을 제외한다면, 다운로드 문화는 영화의 문화적 소비를 위한 관객들의 궁여지책처럼 여겨진다. ‘숨은 비디오 찾기’ 같은, 부지런한 관객들의 영화 유희는 이제 옛 추억이 되어버렸다. 대신 21세기의 관객들은 하드 디스크에 자신만의 아카이브를 만든다.
이것은 대여점으로 상징되던 소프트웨어 시장이 궤멸함으로써 고전영화를 볼 수 있는 통로가 차단된 상황에선 어쩌면 필연적인 일이다. 인터넷을 통해 동서고금의 영화에 대한 정보는 급격히 팽창했지만, 공적인 루트를 통해서는 그 다양한 영화에 대한 욕구를 채울 수 없다. 베리만과 파졸리니와 고다르의 영화를 도대체 어디서 구할 수 있을까. 한국에 DVD로 출시된 고전영화는 말 그대로 ‘한 줌’ 수준이며, 사실 DVD 셀스루 시장이 성립되려면 1인당 국민소득이 최소한 2만 달러 이상은 되어야 한다(우린 아직 그 밑이다). 대신 영화 소프트웨어 시장은 IPTV와 합법 다운로드 시장으로 재편되고 있는데, 2008년에 미약하게 가시화되었으며 2009년에 와서야 비로소 어느 정도 시장 기능을 하기 시작했다. 렌털 시장이 2004년을 전후로 붕괴된 것을 생각하면, 5년의 공백 끝에 등장한 다소 늦은 대안이다.
지난 10년의 관객 수를 살펴보면, 2000년에 6000만 명대에서 시작해 꾸준히 상승세를 타던 그래프는 2006년에 1억5000만 명을 넘긴 후부터 수평 상태다. 1990년대 말과 비교하면 거의 세 배에 달하는 비약적 성장이지만, 현재 한국의 영화 시장은 포화 상태에 이르렀다. 기적이 일어난다면 모를까, 한국영화 총 관객이 2억 명대를 돌파할 것 같진 않다. 사실, 1억 5000만 명 이하로 떨어지지 않으면 다행이다.
이제 더 이상 개별 영화의 관객 수는 중요하지 않다. 총량이 정해진 상태에서 관건은, 그 ‘구획’과 ‘소통’과 ‘분배’다. 어떤 영화를 시장에서 어떤 방식으로 유통시켜 관객과 더 효율적인 방식으로 소통하게 할 것인가. 상영관에 지나치게 치중했던 시장 구조를 탈피해, 관객과 좀 더 다양하게 만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보고 싶은 영화가 있을 때, 그것이 신작이든 고전이든 손쉽게 볼 수 있는 시스템은 어떻게 만들 것인가. 한국영화계는 앞으로 10년 동안, 좀 더 미시적이면서도 현실적인 고민에 몰두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