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는 ‘연산군’을 어떻게 상상해 왔는가
역사공간은 영화 스크린 속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모습으로 부활한다. 역사에 남아있는 기록은 시나리오 작가와 영화감독의 역사적 상상력에 의해 호흡을 얻고 미술감독의 공간적 상상력을 통해 몸을 얻는다. 역사극을 만드는 작업은 특별한 창작의 과정이다.
한국영화를 따라 시간여행을 하다가 박물관 중앙으로 눈을 돌리면 어느새 사극영화의 세계 속으로 이동한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영화박물관이 마련한 개관 특별기획전인 「역사의 공간, 상상의 공간」이다. 이 특별한 공간에서 사극영화 프로덕션디자인의 현재를 한눈에 감상할 수 있다. 이번 기획전 공간에는 세트를 재현한 「스캔들 - 조씨 부인 방」과 <취화선>을 비롯한 2000년대 사극영화의 밑그림을 감상할 수 있는 「스케치의 방」, 사극영화의 디테일을 완성하는데 큰 몫을 하는 「소품 창고」 등 세 개의 방과 네 개의 사각기둥 위에 표현한 「연산군 기획전」이 마련되어 있다. 이곳에서 네 명의 서로 다른 연산군을 만나볼 수 있다.
한국영화사에서 연산의 이야기는 역사 속 그 누구의 이야기보다 대중의 흥미에 부합하는 이야기인 것이 분명하다. 연산의 일대기는 한국인이 좋아하는 대표적 이야기인 <춘향전> 다음으로 많이 영화화되었다. 시대마다 대중을 사로잡았던 연산군을 주제로 하는 이번 기획전에서는 최초로 연산을 다룬 1962년 화제작 <연산군> 연작과 1987년 경작으로 화제가 되었던 <연산군>과 <연산일기>, 그리고 2005년 천만관객을 돌파한 <왕의 남자>를 전시한다.
신상옥 감독의 <연산군> 연작은 1960년대 전반 유행한 궁중사극을 대표하는 영화로 박종화의 소설 <금삼의 피>를 원작으로 했다. 이 영화는 제작 당시 전·후편으로 구성돼 있었는데 5시간30분이라는 방대한 상영시간 때문에 1962년 신정(<연산군 - 장한사모 편>)과 구정(<폭군연산 - 쾌걸복수 편>)에 나눠 개봉했다. 전편은 왕위에 오른 연산이 생모인 폐비윤씨에 대해 알게 된 후 폭군이 되어가는 과정을, 후편은 폭정을 더해가던 연산이 반대세력과의 갈등 끝에 몰락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이 영화에서는 전옥이 연기하는 카리스마 넘치는 인수대비와 신영균이 연기하는 광기에 사로잡힌 연산의 갈등과 연산을 둘러싼 화려한 드라마가 부각되었다. <연산군> 연작은 화려한 복식, 실제 궁내 촬영, 막대한 물량 투입, 호화 캐스팅 등으로 천연색 시네마스코프 영화의 장점을 잘 살리고, 화려한 액션과 군무 등으로 스펙터클을 제공하며 흥행에 성공했고 1962년 각종 영화상을 휩쓸었다.
1987년 추석 개봉한 <연산군>(이혁수,1987)은 신상옥 감독의 <연산군> 연작과 마찬가지로 소설 <금삼의 피>를 원작으로 했다. 연산군과 장녹수의 관계를 부각시킨 이 영화는 다른 연산군 영화에 비해 장녹수를 좀 더 비중 있게 다뤘으며 연산군 역에 이대근을, 장녹수 역에 강수연을 캐스팅했다. 이 영화에서 장녹수는 정치적 야심에 가득 차 연산군을 쥐락펴락하는 희대의 요부로 그려지고 있다.
1988년 2월 설날 개봉한 <연산일기>(임권택,1987))는 폐비가 된 후 사약을 받고 죽은 생모에 대한 번민과 부왕인 성종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갈등하는 인간 연산의 모습을 보다 부각시킨다. 유인촌이 연기한 입체적인 연산은 새로운 해석을 이끌어내고 있다. 이 영화는 인물들 간의 갈등과 극적인 구성, 연기 등에서 호평을 받았으며 대종상 작품상과 감독상, 그리고 영평상 남우주연상 등을 수상했고 제42회 칸영화제에 초청됐다.
연극 <이(爾)>를 영화로 만든 <왕의 남자>(이준익, 2005))는 2005년 12월에 개봉해 전국 1230만 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기존의 연산군을 다룬 영화와 달리 <왕의 남자>는 “별 거 아닌 왕 얘기를 하며 왕을 갖고 놀던” 떠돌이 광대 장생(감우성)과 공길(이준기)이라는 인물을 통해 폭군 연산(정진영)을 조망하고 있다. 연산과 공길, 연산과 장녹수(강성연), 공길과 장생 사이의 갈등을 강조한 이 영화는 광대극을 눈요깃거리로 활용하고 동성애코드를 곁들이는 등 사극과 현대극을 조화시키며 2000년대 판 연산군 이야기를 창조해냈다.
이번 전시는 네 편의 영화를 통해서 시대마다 대중이 역사를 어떻게 상상하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각 영화들은 각기 연산군의 어떤 점을 부각시키고 있는지, 인수대비와 폐비윤씨, 장녹수는 어떻게 다른지, 의복과 두발은 시대마다 어떻게 재현했는지 비교해보는 재미를 줄 수 있을 것이다.
by.공영민(영화사연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