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사무실에서 생긴 일 ( 온라인 ) : 1961년 전후 서울의 오피스극(계속)

2021-09-10 ~ 계속
어느 사무실에서 생긴 일 ( 온라인 ) : 1961년 전후 서울의 오피스극(계속)
사무실은 단순히 누군가가 밥벌이를 하는 곳만은 아니다. 어떤 누군가에겐 그 사람의 특정 생애주기를 함께하며 거의 모든 종류의 희로애락을 경험하게 하는 삶의 터전이고, 그렇게 모인 개개인들이 특정 목적하에 일정한 결속의 형태로 커뮤니티를 형성하는 작은 사회이다. 그런 공간이 전염병 시대에 집단 감염을 매개하는 위험도 높은 공간으로 전락할 것이란 사실을 예측한 사람은 많지 않았을 것이다. 코로나 시대에 ‘사무실’이란 공간은 급격하게 위상 변화를 겪는 중이다. 아이들이 학교에 가지 못하는 것이 아이들의 커뮤니티 경험 형성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리라 예측되는 것처럼, 많은 직장인들도 재택근무, 유연근무, 시차제 출퇴근, 단축근무 등의 근무 형태가 정착되면서 커뮤니티 경험에 많은 변화를 겪고 있다.
급격한 변화에는 문화 지체 현상이 따르기 마련이다. 듬성듬성 비어있는 사무실이 일하기엔 더 편할 것 같았지만, 출근해서 동료들의 빈자리를 보고 있노라면 딱히 그렇지만도 않다. 이따금씩 수신자를 찾지 못해 갈 곳을 잃고 끝내 조용히 사그라지는 전화벨소리, 하루가 멀다 하고 줄기차게 들려오는 누군가의 코로나 검사 소식 등을 듣고 있다 보면 사무실은 이제 삶의 터전이라기보다 어딘지 모르게 불충분하고 불안정하며 조금은 심심한 공간으로 여겨져버린다. 지금의 사무실은, 혼란을 주는 공간이다.
이번 기획전은 코로나 시대에 급격한 위상 변화를 겪고 있는 ‘사무실’에 초점을 맞춘다. 우리에게 사무실은 어떤 공간이었는가를 떠올려보기 위해 사무실과 직장인을 소재로 제작된 한국영화 12편을 끄집어내 보았다. 오늘날 장르화된 ‘오피스물’이라고 단정 짓기엔 애매하지만 등장인물의 삶과, 인물들이 연루되는 주요 사건에 회사 또는 사무실이라는 공간이 주요하게 등장하는 영화들이다. 서양의 근대 문물이 본격적인 생활양식으로 이식되기 시작했던 1950년대 후반에서 1960년대 초반에 제작된 영화들과 1970년 완공된 서울의 대표적인 오피스빌딩인 삼일빌딩을 주요 로케이션으로 삼은 70년대 영화, IMF가 오기 직전 경제적 활황 시기였던 1980년 말부터 1990년대 초중반 사이에 제작된 영화들을 온/오프라인을 통해 공유한다.

(시네마테크KOFA 9월 기획전 ‘어느 사무실에서 생긴 일’ 링크:
https://www.koreafilm.or.kr/cinematheque/programs/PI_01361)

이중 온라인에서는 <여사장>, <삼등과장>, <월급쟁이>를 비롯한 1961년 전후에 제작된 영화 6편을 선보인다. 올해 한국영상자료원의 기관 키워드이기도 한 ‘1961년’을 전후로 하여, 사무공간을 배경으로 하는 어떤 영화들이 있었는지 감상할 수 있는 시간이 되기를 기대한다.


상영작품
  • 01. 여사장 한형모, 1959
    명동 미도파 백화점 앞에서 유쾌하지 못한 첫 만남을 가진 요안나와 용호는 《신여성》이라는 여성지를 펴내는 신여성사의 여사장과 신입사원으로 다시 만나 불편한 관계를 이어간다. 하지만 어느새 둘 사이엔 예기치 못한 감정이 피어오르는데…. <여사장>은 신여성사를 무대로 한 유쾌한 로맨틱 코미디다. 잡지 《신여성》은 당시 높은 판매 부수를 자랑했던 대표적인 여성잡지 《여원》을 모델로 한 것으로 추정된다(영화 말미에 《신여성》은 무려 당시 꿈의 판매 부수인 10만 부를 달성하기도 한다). 당대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워커힐호텔 공연 장면이나 페기 리의 노래 ‘자니 기타’(극 중에선 신인가수였던 이금희가 부른다), 자비에 쿠거의 ‘차차차’ 같은 인기 팝송을 적재적소에 활용하고 있는 점도 관전 포인트이다.
     
  • 02. 백만장자가 되면 정일택, 1959
    한일운수 소속 화물트럭 운전사 창진은 그동안 모은 돈으로 화물트럭을 인수한다. 드디어 ‘차주’가 된 것이다. 약혼녀 정숙과 함께 행복한 미래를 실현하려는 사이, 불의의 교통사고로 죽음을 당해 염라국에 가게 된 창진. 하지만 그의 죽음은 염라국 직원의 실수 때문에 생긴 것으로, 원래 염라국에 오기로 돼 있던 사람은 한일운수 사장 이인근이었다. 창진은 우여곡절 끝에 이인근의 몸을 빌려 다시 살아나고, 무뚝뚝했던 이인근은 창진의 영혼이 들어가게 되면서 사람 냄새 나는 따뜻하고 배려 넘치는 사장으로 변해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웃음기를 뺀 구봉서(이인근 역)의 젠틀한 모습과 담백한 연기가 볼거리이다.
     
  • 03. 구봉서의 벼락부자 김수용, 1961
    “자넨 열흘이면 열흘 영락없이 지각이군?” “그게 제 취미라서….” “뭐야? 그럼 나도 야단치는 게 내 취미야!” 지각을 해도 상사 앞에서 천연덕스럽고 순진하게 대꾸하는 주인공 맹순진의 월급날로부터 영화가 시작된다. 월급을 받기는 했지만 빚쟁이들에게 다 털리고 하숙집에서도 쫓겨나기 일보 직전인 그에게 갑자기 막대한 행운이 굴러들어 온다. 전쟁 때 구해준 한 미군 병사의 아내가 거액의 유산을 들고 맹순진에게 보은하겠다고 찾아온 것. 단, 조건이 있다. 남에게 절대 주지 말고 1년 동안 유쾌하게 즐기는 데만 사용하라는 것이다. 맹순진의 행복한 고민이 시작된다.
     
  • 04. 삼등과장 이봉래, 1961
    삼천리운수 동부출장소 소장으로 재직 중인 구준택은 집에서는 대가족을 이끄는 가장이지만 회사에서는 상사 앞에서 꼼짝 못 하는 직장인일 뿐이다. 마침 딸인 영희가 삼천리운수에 입사하게 되고, 송달순 전무가 자신의 정부인 명옥을 위해 동부출장소 2층에 댄스교습소를 마련해달라는 무리한 부탁을 해오면서 구준택의 회사 생활은 제대로 꼬이기 시작한다. 김희갑이 연기하는 송달순 전무는 요즘으로 치면 ‘갑질’의 전형을 제대로 보여준다. 운수회사와는 거리가 먼 댄스교습소 신설을 구준택의 아이디어라고 뒤집어씌우는 것도 모자라 정부의 존재를 발각당하자 명옥이 구준택의 정부라고 거짓말까지 하는 기가 막힌 갑질 플레이를 실현하는 것. 이 또한 놓칠 수 없는 또 다른 관전 포인트이다.
     
  • 05. 골목안 풍경 박종호, 1962
    ‘서울의 인구는 1960년도 기준 244만 명이 되었다. 이 얼마나 놀랄 만한 인간 인플레냐. 이젠 사람이 사람 등쌀에 밟혀 죽을 지경이다.’ 영화는 내레이션을 통해 이와 같은 정보를 전하며 시작한다. 이때만 해도 불과 26년 후에 서울 인구가 천만을 달성하리라곤 생각도 못 했을 것이다. 주인공 고 주사는 성북구청 세무과 공무원으로, 자식 아홉 명에 노모, 소설가 지망생 동생까지 돌보고 있다. 그의 사무실은 돈 걱정과 한숨으로 가득 찬다. 인물들의 처지가 곤궁하다 보니 요즘 감수성으로는 용납하기 어려운 온갖 험한 말들도 오가지만, 당시 급격하게 팽창하던 도시 인구를 몸으로 체감했던 자들이 그려내는 초상으로 본다면 이해할 여지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 06. 월급쟁이 이봉래, 1962
    동신산업 경리계장으로 재직 중인 박중달은 청렴결백하여 10년간 무사고로 평탄하게 업무를 수행해왔다. 영업부장과 경리과장이 마수를 뻗어오기 전까진 말이다. 사장이 미국에 간 틈을 타 영업부장과 경리과장은 일을 꾸미고, 박 계장을 끌어들여 한탕 해먹을(?) 작전을 계획한다. 하지만 박중달은 고민 끝에 상사들의 작전에 동참하길 거부하고 회사를 그만둔다. 이때부터 남들 퇴직할 나이에 갑자기 취준생으로 전락한 박중달의 눈물겨운 재취업 일기가 그려진다. 말끝마다 ‘젠장’을 내뱉는 시건방진 국민학생 막내로 등장하는 어린 안성기를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 30분 52초 구간부터 원본 사운드의 훼손으로 약 11분간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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