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겨진 퀴어영화를 찾아서: 1996년 이전 한국 퀴어영화들(계속)

2021-02-01 ~ 계속
숨겨진 퀴어영화를 찾아서: 1996년 이전 한국 퀴어영화들(계속)
한국 최초 퀴어영화로 공식 기록된 작품은 <내일로 흐르는 강>(1995, 박재호)이다. ‘왜? 이 영화가 최초의 퀴어영화냐?’고 묻는다면 일반적으로 게이 정체성을 지닌 주인공이 등장하고 성소수자 문화를 재현했기 때문이라고 답할 수 있겠지만, “퀴어영화는 퀴어다움의 정의에 따라 얼마든지 그것을 소급적으로 적용해 그 외연을 확장해갈 수 있다. 따라서 최초의 퀴어영화 자리는 각자의 기준에 따라 언제나 뒤바뀔 수 있다.”(김경태, 『한국퀴어영화사』) 고 답하는 것이 ‘퀴어’가 담고 있는 다양한 의미를 드러내는 데 더 적합할 것이다. 즉 ‘퀴어영화’는 그 자체로 고정된 범주가 아니므로 관객의 독해에 따라 그 정의는 달라질 수 있다.

이번 기획전 ‘숨겨진 퀴어영화를 찾아서’는 <내일로 흐르는 강> 개봉 이전 한국영화들 중 성소수자를 재현한 영화들을 상영하는 프로그램이다. 물론 지금 이 영화들을 보는 것이 다소 불쾌하게 느껴질 가능성도 존재하지만 이동윤 프로그래머가 책에서 밝혔듯 “과거 성 소수자에 대한 시선이 사회적으로 왜곡된 현실에서 이상적인 퀴어영화를 찾는 것은 오히려 퀴어영화에 대한 논의를 협소하는 결과”(이동윤, 『한국퀴어영화사』)를 초래할 수 있으므로, 재현 및 시선에 불편함이 느껴지더라도 포함해 상영하고자한다. 상영하는 영화들은 이미 발굴된 영화들이지만 새롭게 독해하고자 하는 바람에서 ‘숨겨진’이라는 수식어를 달았다. 나아가 새로운 퀴어다움을 발견하고 아직까지 발굴되지 않은 한국영화들을 퀴어링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길 희망한다.

영화 목록은 프라이드 영화제에서 발간한 『한국퀴어영화사』와 『한국트랜스젠더영화사』의 분류를 기초로 하고 있다. ‘퀴어영화’와 ‘트랜스젠더영화’는 입장에 따라 서로 견제하는 위치이지만 이번 기획전에서 ‘퀴어영화’와 ‘트랜스젠더영화’를 정치(精緻)하게 나누는 것이 목적이 아닌 만큼 다소 범박하게 ‘이성애 규범에 벗어나 이에 맞선 것’을 ‘퀴어영화’로 규정하고 ‘트랜스젠더영화’들 또한 퀴어영화에 포함시켰다. 

※ <금욕>, <달빛 멜로디>, <밤의 열기속으로>는 화질이 떨어져 관람이 힘들 수 있으나, 그동안 온라인을 통해 볼 수 없었던 영화라는 점에서 공개를 결정함.
※ 상영작은 프라이드 영화제에서 출간한 한국퀴어영화사를 기초로 작성하였음.


상영작품
  • 01. 갯마을 김수용, 1965
    바닷가 갯마을, 마을 남자들을 태운 고깃배가 출항한다. 배가 돌아올 무렵 불어 닥친 폭풍우에 해순의 남편 성구는 죽음을 맞이한다. 상수는 과부가 된 해순을 끈질기게 쫓아다니고 결국 관계를 맺는다. 둘은 갯마을을 떠나 채석장, 산속으로 향하지만 결국 정착하지 못하고 상수가 죽음을 맞이하자 해순은 갯마을로 돌아온다. 

    갯마을엔 과부들의 공동체가 있다. 이들의 관계는 친분으로만 설명할 수 없는 “남사스러움”이 존재한다. 그녀들은 바닷가에서 서로 정을 통하며 이것이 특별한 일이 아니었음을 영화는 명징하게 제시한다. ‘갯마을’을 ‘여성 퀴어 공동체’로 본다면, 공동체를 벗어난 마을 밖은 남성 중심의 폭력적 시공간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한국퀴어영화사> 참고]
  • 02. 화분(꽃가루) 하길종, 1972
    서울 근교의 거대한 한옥 ‘푸른 집’에 현마의 첩 세란과 여동생 미란, 식모 옥녀가 살고 있다. 현마와 그의 새로운 비서 단주가 집에 들른 날, 자신의 첫 월경이 놀림거리가 되자 화가 난 미란은 집을 나간다. 현마는 단주에게 미란을 찾아오라고 시킨다. 둘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사랑에 빠져 도피여행을 떠난다. 현마는 단주에 대한 집착에 사로잡혀 그를 찾아내 구타하고 ‘푸른 집’에 가둔다. 
    부도가 난 현마는 일본으로 도피하고, 세란, 미란, 옥녀는 단주를 욕망한다. 어느 날 ‘푸른 집’에 빚쟁이들이 몰려오고 그 와중에 세란은 성폭력을 당한다. 세란이 죽고 미란이 떠난 후 단주도 집을 떠난다. 

    이 영화의 흥미로운 지점은 현마가 떠난 뒤 젠더적 위계질서가 무너지고 난 후 가장 하위에 놓인 자가 남성 게이/양성애자가 아닌 여성 이성애자라는 점이다. [<한국퀴어영화사> 참고]
  • 03. 금욕 김수형, 1976
    패션모델로 무대에 선 영희는 세 명의 청년에게 성폭행을 당했던 트라우마로 괴로워하며 쇼를 망친다. 그런 영희를 인상 깊게 본 화가 노미애는 영희에게 자신의 모델이 되어 줄 것을 제안한다. 노미애 또한 과거 남편의 가정폭력에 시달렸었기에 영희의 회복을 적극적으로 돕는다.  회복 된 영희는 노미애의 도움으로 줄리앙의 쇼에 모델로 선다. 줄리앙은 영희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가고 영희 또한 줄리앙을 사랑하게 된다. 노미애는 영희를 말리지만 그녀는 줄리앙에게 떠나고 노미애는 영희를 잃은 슬픔에 생을 마감한다. 줄리앙이 다른 여자와 있는 모습을 본 영희는 상처입고 돌아가지만 이미 숨진 노미애를 발견하고 자신이 상처 입었던 숲으로 향한다. 

    여성의 동성애 성향을 남성 폭력에 의한 것으로 상상한 70년대의 무의식을 반영한 것일 수 있다. 하지만 여성의 동성애 관계가 남성의 폭력에서 벗어나 진정한 유토피아를 가능하게 한다는 상상의 결과이기도 하다. [<한국퀴어영화사> 참고]
  • 04. 달빛 멜로디 이황림, 1984
    외딴 섬의 산장을 지키는 이노인의 딸 송이는 강가에서 낯선 남자를 발견하고 돌본다. 조금씩 건강을 회복한 남자는 숲속에서 외딴 비석을 발견한다. 
     재벌 2세 요한과 한추는 이노인이 지키는 산장으로 신혼여행 온다. 그 날 저녁, 갑작스러운 정전이 발생하고 한추는 창밖의 괴한을 발견한다. 그를 쫓아 숲으로 들어간 요한은 동성애인 산도와 함께 만들었던 가면을 발견한다. 다음 날 숲 속에서 피리 소리가 들려오고 요한은 숲으로 달려간다. 과거 애인사이였던 산도와 요한은 한추를 보고 첫눈에 반한다. 요한은 산장에서 산도를 죽이고 익사로 위장했지만, 죽은 줄 알았던 산도는 송이에 의해 목숨을 구하고 그 들을 위협한다. 한추와 요한은 섬에서 탈출하려 하지만 배에 물이 새어 들어와 섬에 갇히고 만다. 산도는 계속해서 둘을 위협하고 요한은 산도를 칼로 찌르고 함께 바다에 빠진다. 

    <달빛 멜로디>의 흥미로운 인물은 요한이다. 산도를 죽인 요한의 행동이 한추를 쟁취하기 위한 범행이었는지 사랑을 배신간 대가였는지 모호하게 그린다. 영화의 요한-한추-산도의 관계는 삼각관계를 넘어 폴리아모리적 관계로 묘사된다. [<한국퀴어영화사> 참고]
  • 05. 밤의 열기속으로 장길수, 1985
    민기는 반항적이고 반사회적인 젊은이로 이태원 지역을 무대로 밀매와 퇴폐행위를 일삼는다. 어느 날 민기가 술에 취해 지하철에서 난동을 부리는 사건이 일어나고, 그 사건을 계기로 민기와 인희가 알게 된다. 민기는 그녀를 폭행하며 소유하려다가 실패한 후 오히려 사랑에 빠진다. 인희도 민기의 위압적인 얼굴 뒤에 숨은 고통을 이해하게 되고 민기는 거래하던 미카엘 일당과 손을 끊는다. 그러나 미카엘 일당이 보복으로 인희를 납치, 추행하자 민기는 미카엘 일당의 아지트로 가서 격투를 벌여 인희를 구한다

    <밤의 열기 속으로>의 이태원은 법과 도덕 교양과 취향이 반영되지 않는 사회 구조 밖의 공간이다. 무법 지대이지만 동시에 소수자가 모여 살아가는 커뮤니티이기도 하다. 영화는 이태원 뿐만 아니라 동두천을 포함해 미군 부대 주변으로 낯선 이국적 풍경으로 드러내고 잇는 도시 공간들을 중심으로 그곳에서 살아가는 이들을 재현한다. [<한국퀴어영화사> 참고]
  • 06. 사방지 송경식, 1988
    간성(間性)으로 태어난 사방지는 시주승의 구원을 받아 미륵사에서 성장하게 된다. 남편의 탈상제를 지내러온 과부 이소사는 사방지를 자신의 몸종으로 거둔다. 둘 사이의 관계는 날로 깊어져 육체/정신적 관계를 맺는다. 그러나 그들의 사랑이 집안 어른들에게 발각 당하고, 소사는 사방지를 배신한다. 죽을 위기에 처한 사방지를 무녀 묘화가 구해내고, 묘화는 사방지를 이용해 사대부가 마님들을 상대로 복수를 시작한다. 결국 둘의 계획이 발각되고 묘화는 죽임을 당한다. 다시 절로 돌아간 사방지를 찾아온 이소사는 용서를 구하고 둘은 재회하지만 문중 어른들의 추궁으로 소사는 자결하고 사방지도 그녀를 따른다.  

    <사방지>는 조선실록 세조 28권 428일에 기록된 내용을 바탕으로 제작되었고 국내 최초로 간성(間性)를 다룬 영화이다. 사방지 역할을 맡은 이혜영 배우로 인해 영화 초반 여성 또는 레즈비언의 사랑으로 상상하게 만들지만 충격적인 쇼트 이후 사방지의 젠더 정체성을 표현한 대목에서 그 관계는 전복된다. [<한국퀴어영화사> 참고]
  • 07. 여자가 더 좋아 김기풍, 1965
    성격이 여성적인 규칠은 여자직업기술학교의 음악강사로 제자 영숙과 연인사이다. 규칠이 영숙의 엄마와 그녀의 의사 삼촌에게 선을 보이고 딱지(여자 같다고 해서 성전환 수술 권고까지 받는다)를 맡게 되고, 영숙은 밴드마스터인 문기에게 시집을 간다. 규칠은 음악선생의 체면이고 뭐고 자신이 그토록 사랑하는 영숙이 다른남자에게 시집간 것에 단념하지 않고 복수를 꿈꾸며 문기 집의 식모로 들어간다. 제발 잊어달라는 영숙의 애원에도 규칠은 짓궂게 매달린다.

    <여자가 더 좋아>는 트랜스젠더 정체성을 여성 혹은 남성으로 규정지으려 했던 60년대 중반 당시 대중의 무의식을 확인할 수 있다. [<한국트랜스젠더영화사> 참고]
  • 08. 십오야(의 복수) 임권택, 1969
    반정을 도모하던 현감 박만도는 이성계를 위해 벼슬살이를 하러 길을 떠나려는 김진국과 그의 아내, 자식을 죽이려한다. 도망치던 김진국의 아내는 갓 낳은 아들을 어느 집 대문 앞에 내려놓고 죽음을 당한다. 때마침 딸을 낳은 박만도의 부인은 자기가 낳은 딸과 대문 앞에 버려진 사내아이를 바꿔치기한다. 버려진 박만도의 딸은 김진국의 아버지의 손에 길러진다.  
     20년 후, 김진국의 아들은 박만도의 아들 검웅으로 자라나 뛰어난 무술 실력으로 아버지를 보필한다. 김진국의 아버지를 할아버지로 모시고 살아온 박만도의 딸 매화는 할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박만도에게 복수를 결심한다. 검술실력이 뛰어난 매화는 남장을 하고 검웅과 맞붙는데, 위기의 순간 이름 모를 나그네가 나타나 매화를 구해준다. 매화와 나그네는 한편이 되어 박만도 부자와 대결한다. 

    검웅은 매화를 보며 여장한 매화를 상상하고 그녀에게 사랑을 느낀다. 검웅은 자신의 감정이 괴로워하지만 남자로서 매화를 부정하지 않는다. 서사의 조력자는 암행어사이지만 매화의 입장에서 조력자는 검웅이라 할 수 있다. [<한국트랜스젠더영화사> 참고]
  • 09. 내것이 더 좋아 이형표, 1968
    시골에서 상경한 성춘은 갈데가 없어 거리를 방황하던 중 친구인 봉수를 만난다. 그는 봉수를 따라가나 하숙집 주인이 워낙 까다로워 봉수는 부득이 성춘을 시골에서 온 아내라고 한다. 그리하여 성춘은 본의 아니게 여장을 하고 봉수의 아내 행세를 한다. 그러던 중 그는 이웃집 아가씨와 사귀게 되어 마침내 행복한 내일을 약속하기에 이른다. 

    <내것이 더 좋아>는 동시대에 등장한 복장 전도 영화보다 성 역할 한계를 더욱 자유롭게 표현한다. 성춘은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상황에서도 여성으로 행동하고 목욕을 하러 갈 때도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여탕으로 들어가는 장명은 성춘을 트랜스젠더로 이해함에 무리가 없다. [<한국트랜스젠더영화사> 참고]
  • 10. 남자와 기생 심우섭, 1968
    허사장의 회사에서 쫓겨난 태호는 기생집에서 지배인으로 일하는 후배의 권유로 여장을 하고 기생 산월이 된다. 산월이 된 태호의 인기가 높아지고 그를 해고시킨 허사장이 접근해온다.  태호와는 정반대로 괄괄한 성격의 태권도 사범인 여동생 태숙은 허사장의 아들과 약혼한다.  허사장 아들 동일과 청자의 상견례 자리에서 태호는 자신이 산월이 행세를 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이야기 해 허사장을 설득시켜 판매과장으로 복직된다. 허사장의 가정에도 화목한 기운이 감돌아 아내는 서비스가 좋아지고, 허사장은 아내에게 다정하게 키스한다. 

    <남자와 기생>은 남성 중심의 가족 이데올로기로 철저히 봉합된다. 하지만 <남자와 기생>은 젠더 전복을 통해 남성성에 비판을 가하기도 한다. [<한국트랜스젠더영화사>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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