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이 기록한 1945년 9월의 해방 조선(계속)

2022-08-12 ~ 계속
미군이 기록한 1945년 9월의 해방 조선(계속)
1945년 8월 15일 히로히토 일왕의 항복 방송은 한국에서도 경성방송을 통해 전역에 송출되었다. 자그마치 36년간 지속된 일제강점기가 거짓말처럼 끝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연합군으로부터 38선 이남의 질서 유지 권한을 위임받은 일본군은 언론과 여론을 통제하고 단기간에 헌병 병력을 증원시키며 한반도 내 치안권을 장악했다. 9월 8일에야 인천에 도착한 미군에 의해 일본은 항복문서에 서명을 했고, 한반도에서 물러나기 시작했다. 9월 9일 조선총독부 앞마당에서 일장기가 내려가고 성조기가 올라가는 순간, 현장에 모여 박수를 쳤던 인파들은 혼란과 갈등 대신 희망으로 가득한 미래를 꿈꿨을지도 모른다. 형무소에 억울하게 갇혔던 죄수들은 석방되기 시작했고, 저마다 감춰뒀던 태극기를 꺼냈으며, 조선말을 금지하는 억압에서 벗어난 당대 문인들은 앞다퉈 해방에 대한 작품을 쏟아냈고, 화가들은 일본화풍을 버리고 조선의 풍토를 관찰한 새로운 그림을 그리자고 다짐했다. 일시적이기는 해도 해방이 가져온 희망의 분위기는 적어도 이승만의 귀국(10월)과 신탁 통치 파동(12월)이 있기 전까지는 지속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번 KMDb VOD 기획전은 1945년 9월의 한반도를 담은 기록영상 다섯 편을 통해 1945년 해방 직후의 표정들을 일부분이나마 엿보고자 한다. 미군이 제작한 이 영상들에 담긴 해방 직후의 한반도의 초가을은 고즈넉해 보일 정도로 조용하고(<경성 비행장>), 새 시대에 대한 기대와 왠지 모를 흥분으로 가득하며(<1945년 부산의 미군 진주 환영 시가행진>), 평화로운 가운데 활력이 넘치고(<경성에 진주하는 미군들, 제주도의 일본 항복 조인식>) 무엇보다 미편집된 영상자료 특유의 꾸미지 않은 아름다움을 갖고 있다. 2013년과 2015년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로부터 고려대학교 한국사연구소와 함께 수집하여 최상의 화질로 복원한 다섯 편의 기록영상은 온라인 VOD 형태로는 최초로 공개되는 것이다.

*이 글은 고려대 한국근현대영상아카이브의 해당 영상 관련 해제와 한국영상자료원 1950년 이전 기록영상 연구용역(2021, 연구: 석지훈)을 토대로 작성되었습니다.
*상영작은 모두 사운드가 없는 무성이니, 관람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상영작품
  • 01. 경성에서 일본의 항복 , 1945
    미 해군부가 제작한 영상으로, 항복문서 조인식이 열리는 1945년 9월 9일 조선총독부 부근의 이모저모를 담았다. 총독부 로비 입구에서 항복문서 조인식에 참여할 인사들을 기다리는 사병들의 모습이 긴장감을 자아낸다. 이윽고 현장에 도착한 연합군 측 인사들이 일본 측 인사들과 테이블을 가운데 두고 항복문서 조인식을 시작한다. 총독부 바깥에서는 일장기가 내려가고 성조기를 게양하는 식이 거행된다. 카메라는 총독부 앞에 위치한 해태상을 화면 왼쪽에 놓고 성조기와 일장기의 모습을 번갈아가며 보여주고 있으며, 저 멀리에서 편대를 이뤄 상공을 비행하는 전투기들의 모습 또한 포착하고 있다.
  • 02. 조선에서 일본의 항복 , 1945
    역시 미 해군부가 제작한 영상으로, <경성에서 일본의 항복>이 조선총독부 부근의 이모저모를 담았다면, 본 영상에서는 1945년 9월 9일 오후 4시, 연합군과 일제의 종전 협정에 대한 항복문서 조인식이 열리기 시작한 조선총독부 제1회의실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담았다. 미군 장성들이 회의실을 가득 채운 가운데 고즈키 요시오 육군 중장, 야마구치 기사부로 해군 제독, 아베 노부유키 조선총독이 입장한다. 그 후 하지 중장, 아치볼드 아널드 (9월 10일부로 초대 미군정 군정장관이 됨) 등 미군 측 인사들이 차례로 입장하여 항복문서 조인식이 시작된다. 마지막 조선총독이었던 아베 노부유키의 입을 꾹 다문 모습, 몸이 좋지 않은 듯 크게 기침을 하는 모습 등이 인상적이다. 실제로 그는 8월 15일 일본이 패전하자 할복을 시도했지만 실패한 직후였다. 그는 일본으로 송환된 직후 A급 전범 혐의로 체포되었지만 후에 알 수 없는 이유로 기소자 명단에서 제외되었다.
  • 03. 경성 비행장 , 1945
    도심부와 가까우면서도 고립된 섬이라는 입지 조건을 고려하여 여의도에 1916년에 개설된 우리나라 첫 비행장인 여의도비행장은 일제강점기 일본-조선-중국 대륙을 연결하는 항공로의 중간기항지 역할을 했다. 그러나 홍수 때 상습적으로 침수되거나 활주로 길이가 짧아 비행장으로서는 한계가 있었고, 1944년 일제가 김포비행장을 조성하면서 1945년 해방을 기점으로 점점 그 역할과 비중이 축소되어 갔다. 미군이 김포비행장을 전용하는 등의 이유로 여의도비행장은 그 후에도 상당 기간 비행장 기능을 유지했지만 1970년 공군 여의도기지가 성남으로 이전함에 따라 완전히 폐쇄되었다. 이 영상은 미 육군 항공대가 제작한 것으로, 1945년 9월 20일과 22일의 여의도비행장의 모습을 담고 있다. 격납고, 도열한 전투기들, 전투기에 장착한 폭탄, 활주로의 모습 등을 보여준다.

    참고문헌
    *염복규, 「일제하 여의도비행장의 조성과 항공사업의 양상」, 『서울과 역사』 제104호, 서울역사편찬원, 2020)
  • 04. 1945년 부산의 미군 진주 환영 시가행진 , 1945
    하지 중장이 이끄는 제24군단 소속 미군 7사단이 인천에 상륙한 후, 9월 중순부터는 부산에도 40사단이 진주하기 시작했다. 이 영상은 미 육군 통신감실이 제작한 미편집 영상자료로, 1945년 9월 중순에서 10월 초순 사이로 추정되는 어느 날의 부산의 모습을 담았다. 연합군의 부산 진주를 환영하기 위해 모인 인파들이 각계각층의 주도로 시가행진을 하는 모습이다. 성인 남성들, 제복을 입은 남자아이들과 여자아이들, 흰색 한복을 입은 부인들이 각각 행렬을 지어 시가지를 행진하며, 이들 행렬을 보며 만세를 부르거나 박수를 치며 환호하는 시민들의 얼굴은 새 시대에 대한 기대와 흥분으로 가득 차 있다. 카메라를 잔뜩 의식하며 지나가는 인파들의 표정과, 유독 즐거워하는 까까머리 소년들의 해맑은 모습이 당시의 들뜬 분위기를 전해준다. 이 외에도 부산을 방문한 아치볼드 아널드 군정장관을 비롯한 미군 장성들이 미군을 격려하는 장면이나, 앳된 얼굴의 미군 사병들이 모의훈련을 하고 군용차량 위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 등 다양한 풍경이 담겨 있다.
  • 05. 경성에 진주하는 미군들, 제주도의 일본 항복 조인식 , 1945
    미 육군 통신감실이 제작한 미편집 영상으로, 1945년 9월 24일경 서울에 진주 중인 미군들의 일상생활 모습과 1945년 9월 28일 제주도에서 있었던 일본군 항복문서 조인식의 모습이 담겨 있다. 제주의 일본군 항복문서 조인식 영상은 기존에 방송 매체를 통해 몇 차례 공개된 바 있지만 생생한 화질로 공개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9월 초부터 조선에 진주하기 시작한 미군들은 초가을에 들어선 서울을 한가로이 거닐면서 상점에 가서 뭔가를 사기도 하고, 구두수선공에게 가서 군화를 고치기도 하며, 식사를 하기 위해 중화요리집에 들어가기도 한다. 이들이 거니는 서울 어딘가의 풍경과 길에서 만나는 서울 시민들의 모습은 극영화에 등장할 법한 익숙한 활력을 지니면서도 미편집 영상만이 전달할 수 있는 우연적인 아름다움과 꾸밈없는 매력을 보여주고 있다.
    그다음으로 등장하는 영상은 제주에서 있었던 항복문서 조인식으로, 일제강점기 일본군 제58군 사령부가 있던 옛 제주농업학교를 배경으로 한다. 제주도는 주둔하던 일본군 병력 규모가 매우 컸기에 미군에게 있어 서울과 별도의 항복문서 조인식을 가질 정도로 중요한 곳이었다. 미군 측의 로이 그린 대령과 월든 중령, 일본군 측의 제58군 사령관 도야마 노보루 중장, 제주도 주둔 해군 사령관 하마다 쇼이치 중령, 제주도 부도사 센다 센페이가 참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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