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에서 두번째 세계’에서 온 영화 신혼부부, 1955

by.신은실(영화평론가) 2022-05-02조회 4,876
신혼부부 필름에 적힌 감독 윤룡규

2020년 7월 7일부터 2021년 2월 10일까지 한국영화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해방 공간의 영화인들: 혼돈의 시간, 엇갈린 행로〉라는 전시가 열렸다. 전시장에 설치된  ‘북한영화특별관’에서, 모니터와 헤드폰을 이용해 북한영화 13편을 관람할 수 있었다. 이들 중 극영화 〈용광로〉(민정식, 1949), 〈향토를 지키는 사람들〉(윤용규, 1952), 〈정찰병〉(전동민, 1953), 기록영화 〈수풍에프런공사〉(천상인, 1948), 〈영원한 친선〉(1948), 〈38선〉(강홍식, 1948), 〈남북련석회의〉(천상인, 1948), 북조선 국립영화촬영소 제작 〈조선시보〉 4편 등 11편은 국내에서 처음 공개되는 작품들이었다. 이 전시를 공동주최한 한상언 영화연구소와 한국영상자료원에 감사드린다. (한국영상자료원 사이트의 전시 소개에서 전시 리플렛과 도록을 내려받을 수 있으며, 지금도 한국영상자료원 홈페이지 해당 메뉴 에서 온라인 전시를 체험할 수 있다. 또, 한국영상자료원 유튜브 계정에서 한상언 박사가 전시 내용을 설명하는 강연도 볼 수 있다.) 

위 13편 중 〈내 고향〉(강홍식, 1949)과  〈신혼부부〉(윤용규, 1955)는 2003년 제8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다른 북한 영화 5편과 함께 상영된 적이 있다. 2000년 6월 사상최초의 남북정상회담이 열린 뒤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에 북한이 대표단을 파견하며 남북 문화교류 바람도 촉진되어, 2003년 봄 전주국제영화제·대종상에서 북한영화 신작〈살아있는 령혼들〉(김춘송, 2000), 〈청자의 넋〉(표광, 2003) 등이 소개되었다. 또, 2002년 10월 이두용의 〈아리랑〉(2002) 평양 상영회 때 남한 영화인들이 방북했고, 2003년에는 ‘남북영화교류추진특별위원회’가 조직되어 2차 교류가 이어졌다. 영상물등급위원회 영화 및 비디오 심의에서 제한상영가·등급 보류 판정을 연거푸 받기는 했지만 개봉 및 비디오 출시를 목적으로 북한 다큐멘터리 〈동물의 쌍붙기〉(1987)가 이즈음  수입되기도 했다. 이전에 남한의 극장에서 공개 상영된 북한영화라고는 2000~2001년에 연이어 개봉하거나 특별상영으로 소개된 신상옥·최은희 부부의 〈불가사리〉(1985)와 〈소금〉(1985)뿐이었으니 변화가 실감되는 시기였다. 물론 노태우 정권이 ‘북방정책’을 추진하던 1990년에 관계부처가 북한영화를 신청자에게 제한상영하거나, 〈안중근, 이등박문을 쏘다〉(엄길선, 1979)가 TV에서 방영된 사례가 있긴 했다. 근년에는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에 이은 4·27 판문점 남북정상회담으로 다시 여러 영화제에서 북한영화들을 소개하려는 바람이 일었으나, 2019년 베를린 교류추진특별위원회 회담은 불발로 끝났다. 2019년 제1회 평창국제평화영화제(당시 명칭은 평창남북평화영화제) 개막작이 〈〉(림창범, 1992)라는 소식을 들었을 때엔, 이 영화를 ‘불법’ 상영하던 90년대 초의 대학가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북한 사회주의 정권 수립 과정을 다루는 〈내 고향〉은 국정원이 상영불가 의견을 낸 바람에 2003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선 배지 소유자만을 대상으로 제한상영 되었다. 이와 달리 〈신혼부부〉는 같은 해 부산영화제에서 공개 상영되었기에 누구나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영화제 개막 직전에 언론들은 〈신혼부부〉의 감독을  (이번 전시에서도 〈신혼부부〉 시나리오 작가인 주동인의 동생으로 소개되었고, 영화제작자 출신으로 미국으로 이주했다고 알려진)  ‘주동진’이라고 보도했다. 2003년 영화제 개막이 임박해서야 성사된 고 안상영 당시 부산시장 겸 부산국제영화제 조직위원장의 방북, 그에 이은 북한영화 상영 결정 과정 및 영화제 폐막 이후 상영작 프린트의 한국영상자료원 소장 경위 등은 고(故) 김지석 프로그래머가 부산일보에 연재한 칼럼으로 꽤 소상히 알 수 있다(김지석, 〈[스무 살 BIFF, 뜨거웠던 순간들] 19. 또 다른 전쟁 ‘프린트 반입’〉(《부산일보》, 2015년 5월7일자). 한데 2015년에 게재된 칼럼인데도, 〈신혼부부〉의 감독 이름을 ‘윤룡구’라며 여전히 부정확하게 썼다. 이는 북한으로 간 윤용규의 활동과 영화를 남한에서 잘 모르고 있었다는 뜻이다. “해방 후 조선영화의 최고봉의 신기록을 지은 수작”(이태우, ‘조선영화의 발전’, 《경향신문》, 1949년 1월 6일자, 이준엽·함충범, 2018:2 재인용)이라는 윤용규의 대표작 〈마음의 고향〉을 제작자 이강수가 파리에서1993년에 다시 공개하고, 문화재청이 문화재보호법에 의거해 문화재 등재 필름으로 2008년에 등록한 뒤에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던 듯하다. 국내에서 ‘연출 윤용규’라는 이름이 적시되어 〈신혼부부〉가 일반 공개된 것은 이번 전시가 처음이다. 

윤용규 감독

1. 북으로 간 영화감독

일본으로 건너간 윤용규는 도요타 시로 감독의 〈항구는 바람풍 港は浮気風〉(1937) 등 ‘도쿄발성’이 제작하고 ‘도호’가 배급한 작품들의 연출부로 활동(이준엽·함충범, 2018:11)한 뒤 귀국했다. 1939년 초연된 함세덕의 희곡 「동승」을 영화화한 〈마음의 고향〉(1949)으로 윤용규는 감독으로 ‘입봉’했다. 〈마음의 고향〉은 공개되자마자 서울특별시 문화상 영화부문상을 받았고, 경무대에서 이승만과 프란체스카가 관람할 정도로 전국적 명성을 얻었다. 또, 최초의 한불 영화 교류작으로 1950년 파리에서 상영되었다. 그러나 〈마음의 고향〉에 쏟아진 갈채와는 별개로, 윤용규가 남한에서 활동하는 데는 어려움이 적지 않았다. 윤용규는 해방 직후 잇달아 설립된 ‘조선영화건설본부’와 ‘조선프롤레타리아영화동맹’이 1945년 12월 16일 통합한 조직인 ‘조선영화동맹’ 서울시 지부 집행위원으로 활동했다. 그리하여 윤용규는 남한 단독정부 수립 후 좌익 인사로 분류되어 감시 받았으며, 〈마음의 고향〉 촬영 현장과 후반 작업과정도 경찰이 사찰했다.(박철, 「서정적 수법이 탁월한 공훈배우 윤룡규」, 《조선예술》, 1957.8., 90쪽. 이준엽·함충범, 2018:14). 

윤용규가 북으로 간 계기를, 2000년 12월 15일자 조선일보에 실린 〈초창기 북한 영화와 일본인〉에서 일본 영화연구자 몬마 다카시가 진술한 바 있다.(지금은 온라인에서 해당 기사를 볼 수 없다.) 초창기 북한영화 편집에 참여한 키시 토미코에게 들은 내용을 근거로, 몬마는 윤용규가 ‘월북’하지 않고 ‘납북’됐을 가능성을 제시한다. 키시 토미코는 닛카츠 영화사 등에서 편집을 배운 뒤 ‘만주영화협회(이하 만영)’에서 활동하던 중 일본 패전을 맞는다. 이후 만영은 중국 공산당 정권 하에서 ‘동북전영제편창(東北電影制片廠, 이하 동북전영)’으로 개편되었다. 키시는 동북전영에서 북한영화 제작에 조력했는데, 처음 담당했던 북한영화가 바로 윤용규의 〈향토를 지키는 사람들〉(1952)이었다. 영화 제작 중에 윤용규는 자신이 북한으로 간 경위를 키시에게 설명했다 한다. 전쟁 중 찾아온 북한군 병사들이 북으로 가고 싶은 사람은 20분 내로 준비하라고 했고, 윤용규는 집으로 돌아가 가족과 만나거나 준비할 틈도 없이 따라 나섰다고 키시는 전한다. 기실, 윤용규는 서울영화사의 창립 4주년 기념작 〈하얀 쪽배〉를 만들려던 참이었다.(〈서울영화사서 「하얀 쪽배」 제작〉, 《자유신문》, 1950년 5월 18일자. 이준엽·함충범, 2018:15~16 재인용) 결국 전쟁 중 북한으로 활동 무대를 옮긴 윤용규는 〈소년 빨치산〉(1951)과 〈향토를 지키는 사람들〉(1952)을 연출한다. 

이즈음, 한국전쟁 초기부터 제공권을 선점한 미군의 폭격으로 평양은 철저히 파괴되었다. 이 시기의 참상은 전후에 프랑스와 북한이 합작한 〈모란봉Moranbong, chronique coréenne〉(1958, 이 영화에 강홍식과 함께 출연한 엄길선은 후일 1원짜리 구 화폐에 등장할 만큼 북한을 대표하는 감독 겸 배우가 되었고, 〈신혼부부〉의 주연 배우 김현숙과 1962년에 결혼했다.)을 보아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연출자 장클로드 보나르도와 각본을 쓴 극작가 아르망 가티가 크리스 마커·클로드 란즈만 등과 방북하여 제작한 〈모란봉〉은 유엔군의 평양 폭격이 적나라하게 그려진다는 이유로 프랑스에서도 2010년까지 상영할 수 없었다. 1947년 건립된 북조선국립영화촬영소도 파괴되어 촬영은 물론 후반작업도 어려운 지경이었다. 폭격을 피해 강계로 소개했던 북한영화인들은 1951년 5월부터 1953년 11월까지 장춘의 동북전영에서 중국 정부의 인력 협조와 물적 지원을 받아 영화를 만든다. 기록영화와 시보 여러 편 외에도 〈소년 빨치산〉(윤용규, 1951), 〈또 다시 전선으로〉(천상인, 1952), 〈향토를 지키는 사람들〉(윤용규, 1952), 〈비행기 사냥꾼조〉(강홍식, 1952), 〈정찰병〉(전동민, 1953) 등 5편의 ‘예술영화’(극영화)가 장춘에서 제작되었다. 북한 정부는 이 시기 중국의 도움을 공식적으로는 부인하며, 평안북도 의주·수풍·창성과 자강도 만포군 등에 소개한 촬영소에서 김일성이 영화 제작을 지휘하여 온전히 북한 영화인의 힘으로만 전쟁 시기를 극복했다고 주장한다.(유우, 2010:249~250)  1954년 말에야 촬영 및 제작 기반 시설이 복구되어 북한영화인들은 1955년을 전후해 평양으로 모두 귀환했다. 한데 휴전 이후 윤용규가 연출한 〈빨치산의 처녀〉(1954)는 장춘에서 평양으로 이행하는 시기에 제작되었기에 마무리가 늦어져 1955년 1월에야 공개되었다.(한상언, 2011:289~290) 작업이 지연된 이유는 김일성이 외국영화와 비슷한 장면이 있다며 추가 촬영 및 보완을 지시했기 때문으로 일단 알려졌다. 그런데, 장춘에서 제작 중이던 〈빨치산의 처녀〉 작업이 늦어진 데는 주연배우 문예봉이 카를로비바리영화제에 참석한 직후에 사적으로 술회한 여행담 때문에 ‘반쏘분자’로 지목된 탓도 있었다. 휴전 직후부터 남로당계 숙청이 시작되어 1953년 8월에는 임화가 처형당했고, 남한출신 인사들에 대한 견제가 이어진다. 월북 직후인 1949년에도 남편 임선규가 공격 당한 적이 있었던 문예봉은 이 위기를 어쨌든 넘긴다.(한상언, 2020:95~97)

2. 휴전 직후, 신혼부부의 세계

전쟁 중 북한이 제작한 극영화가 5편인데 그 중 윤용규가 연출한 작품이 2편이었으니, 감독 윤용규의 역량을 남북한 모두가 공히 인정한 셈이다. 윤용규 이전에 북한에서 극영화를 연출한 강홍식ㆍ주인규는 모두 배우 출신이었고, 연출 수업을 경험한 극영화 감독은 1951년부터 작품 활동을 한 남한 출신 민정식과 윤용규가 첫 세대였다. 윤용규가 북에서 처음 연출한 〈소년 빨치산〉은 1950년 10월 말 미군이 점령한 어느 마을에서 ‘미 제국주의’의 만행에 맞서는 소년들을 영웅으로 그린다. 이 작품은 1952년 6월 중국에서 열린 ‘제6차 국제영화축전’에서 ‘자유를 위한 특별상’을 수상하며 베이징의 13개 극장에서 상영되었고, 이듬해 중국의 ‘신년 경축 특선’에서도 북한 영화로는 유일하게 선정되는 등 국제적인 주목을 받았다.(유우, 2016:259) 〈향토를 지키는 사람들〉은 유엔군이 수복한 강원도 고성을 배경으로 ‘인민유격대원’들의 투쟁을 그리는 영화이고, 휴전 다음해에 나온 〈빨치산의 처녀〉는 인민군이 ‘전략적 후퇴’를 감행한 1950년 하순 후방 농촌 마을에서 투쟁을 이어가는 민간인들을 보여준다. 〈신혼부부〉를 만든 다음에 윤용규가 연출한 〈어랑천〉(1957)도 전쟁 중 그가 만들었던 작품들이 구축한 시공으로 회귀한다. 이 영화는 1950년 11월, 미군에 밀려 패퇴하다 어랑천을 사수하려는 전투원들의 영웅주의와 인민들의 지원을 다룬다. 이렇듯 1957년까지 윤용규가 만든 영화들이 당대 북한 영화의 주된 소재였던 항일·반제·반미·공습과 학살의 기억(한상언, 2011:295~301)을 되불러오는데, 〈신혼부부〉는 예외다. 휴전 성립 후 전후 복구 체제를 본격적으로 가동하기 시작하는 당대를 그리며 삶을 재구축하려는 개인과 공동체, 국가의 시도를 다루는 〈신혼부부〉의 세계는, 애인이 미군 간첩임을 알게 되자 주저 없이 그를 사살하는 〈어랑천〉 주인공 박순봉(조효경)의 세계와는 판이하다. 무자비한 폭격을 당했던 평양에 막 복귀한 영화인들이 갓 세운 조선예술영화촬영소 안팎에서 만든 영화임에도, 〈신혼부부〉는 근과거였던 전쟁의 잔혹함이나 전후의 비참함을 재현하는 대신 ‘현재’라는 시공 속에서 인물들의 관계가 자아내는 활력을 우선 포착하려 한다. 

공장에서 5년 동안 선반 일을 하던 은실(첫 주연작 〈신혼부부〉의 연기부터 큰 호평을 받고 엄청난 인기를 모았던 은실 역의 김현숙은 〈모란봉〉의 원정희, 윤용규가 시나리오를 쓴 〈정방공〉(오병초, 1963)의 최부실, 김정일의 두번째 반려자였던 성혜림 등과 함께 북한영화의 5~60년대를 대표하는 여성 연기자이며 연기 교육자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은 철도 노동자 김영철(〈내 고향〉에서 유격대원 관필 역할을 맡았던 유원준이 연기했다. 그는 1998년 타계할 때까지 북한의 ‘아버지’ 상을 구현한 배우로 통했다.)과 결혼하며 전업주부가 된다. 육아와 일을 병행하는 반장(반장 역을 맡은 문예봉은 유원준과 더불어 〈내 고향〉의 주연이었다.)과 막내 옥단 등 공장 동료들이 은실을 자주 찾아주지만, ‘노동역군’의 자리를 떠난 은실의 낙담은 가시지 않는다. 그러던 중 자신처럼 결혼 후 공장을 떠났다가 공사장에서 다시 일하는 옛 동료를 우연히 만난 은실은, 일터를 떠난 자신이 떳떳하지 못하다는 생각을 떨치지 못한다. 여성을 집안에 잡아두고 싶다는 영철과 여성 노동자로서 이대로 주저앉고 싶지 않다는 은실의 갈등은 그리하여 깊어간다. 철도노동자로서 목표량 달성에 성공하여 기쁨에 들뜬 영철은 은실에게 이렇게 말한다. "내가 하면 당신이 한 것과 다름없는데 바깥일 참견할게 뭐 있소. 나만 보고 산다며?" 은실은 조목조목 반박한다. 소꿉놀이 같은 집 안에만 아내를 가두어 두는 태도는 잘못이며 여성을 노리개나 보상물로 보는 것이라고, 또 아버지가 어머니를 대하던 가부장적 태도를 답습하는 것이 아니냐며, “당신을 옳게 도우려면” 자신도 공장에서 일을 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은실의 싸움에 버팀목이 되어주는 이들은, 경험이 풍부한 반장을 비롯해 목표 작업량을 달성하는 공장 여성반 동료들이다. 

여성이 혁명투쟁과 생산에 앞장서는 모습은, 북한에서 윤용규가 연출한 영화에서 예사롭게 등장한다. 미군이 점령한 마을의 여성동맹위원장인 주인공을 유경애가 연기하는 〈향토를 지키는 사람들〉(1952, 〈소년 빨치산〉과 이 작품의 시나리오를 쓴 윤두헌이 숙청된 뒤부터   집체작으로 기록됐다.)이나, 〈어랑천〉(1957, 시나리오 한성)의 사례가 그러하다. 역시 여성이 주인공인 60년대 뮤지컬 영화 〈정방공〉의 시나리오도 앞서 언급했듯 윤용규가 썼다. 한편, 〈빨치산의 처녀〉(시나리오 김승구)의 문예봉과 〈어랑천〉 속 박순봉이 연기한 역할을 계승하듯 미군에 맞서는 여성전사(조유경)가 등장하는  〈녀성영웅광부〉(윤용규, 1960)의 시나리오는 〈신혼부부〉의 주동인이 썼으니, 은실과 같은 입체적이고 능동적인 여성 인물 조형은 윤용규와 협업한 당대 북한 영화인들의 공동창작 결과라 하겠다.  

1955년 4월에는 ‘조중 영화배급 계약’이 체결되는데, 1956년 북한영화의 대표격으로 중국에 유일하게 소개된 영화도 〈신혼부부〉였다. 〈신혼부부〉가 1956년 8월 15일부터 8월 21일까지 베이징에서 상영될 때, 중국 언론은 “노동경쟁에서 나타난 개인영웅주의와 여성 노동자의 가치를 무시하는 잘못된 관점을 비판하는” 작품이라 소개한다.(유우, 2020:157)

3. 소리와 노래

〈신혼부부〉에서 영철과 동료 철도노동자들은 휴식 시간에 아코디언을 연주하고, 언덕을 산책하는 부부와 은실의 공장 동료들은 창공을 배경으로 이렇게 노래한다. 

"그대와 함께 푸른꿈 키우며 / 당신과 나는"

부분적으로 뮤지컬 장르 양식을 채용한 〈신혼부부〉 가 제작되기 직전에 평양에서 만들어진 영화는 무용 가극 공연을 채록한 〈아름다운 노래〉(전동민, 1954)였다. 그리고 북한 ‘예술영화’ 중 공연 채록을 제외한 평양 복귀 후 첫 작품이 바로  〈신혼부부〉였다.(유우, 2020:142) 〈신혼부부〉가 만들어진 이듬해인 1956년에는, 광주 출신 음악가 정추의 형이며 일본 니혼대학에서 유학했던 정준채가 시나리오와 연출을 맡아 최승희의 무용극을 옮긴 〈사도성 이야기〉도 나온다. 컬러 필름으로 인민적 전통과 민족문화를 다루는  영화들의 시초라 할 작품이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윤용규도 1958년에 북한의 네 번째 컬러 극영화 〈춘향전〉을 연출한다.(「북한에서 만든 영화 <춘향전>」, 한상언 블로그)

〈신혼부부〉가 나오기까지, 북한영화에 음악은 물론 사운드 기술이 도입된 기간은 기실 그리 길지 않았다. 북한의 첫 발성(토키)영화는 〈인민위원회〉(1947)였다. 정준채 감독이 다큐멘터리 제작 제안을 받아 1945년에 월북한 뒤 연출한 〈인민위원회〉는, 소련 기술진들의 도움으로 녹음설비를 구축하여 1947년 준공되었으나 전쟁으로 파괴될 평양의 북조선국립영화촬영소에서 만들어졌다. 그런 까닭에 초창기 북한 영화는 소련 영화계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사운드와 뮤지컬 장르의 도입에서 그 영향은 명백하다.  

소련 영화사에서 사운드 녹음 기술을 처음 도입한 작품은, 1929년 11월에 상영된 아브람 룸 감독의 〈위대한 파업의 계획Plan velikikh rabot〉으로 알려져 있다. 러시아학 연구자 김수환은 〈위대한 파업의 계획〉을 예로 들며, 서구뿐 아니라 소비에트 러시아에서도 사운드 기술이 처음부터 생산 및 산업의 문제, 노동과 기계의 소리를 담았다는 점이 의미심장하다고 분석한다. 김수환에 따르면, 소련 무성영화는 발성영화로 단숨에 옮겨가지 않았다. 소련에서 처음 토키영화가 상영된 1929년 11월은  “신경제정책이 제1차 5개년 계획으로 바뀌는 시기”였고, 1920년대를 뒤흔들었던 혁명적 아방가르드 영화의 실험적 미학주의가 ‘형식주의’로 공격당하고, 2년 뒤인 1934년에 소련의 문예 창작 공식 지침으로 채택될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얼개를 드러내던 때이기도 했다. 이 시기를 거치며 혁명기의 전위적 몽타주 영화는 “만인을 위한 영화”인 토키영화로 변모해갔다. 

사운드를 채용한 소비에트 영화는 크라카우어 식으로 표현하자면, ‘대기실’의 기간을 가져야 했다. 하나의 세계가 다른 세계로 변화되는 중에 있던, 아직 혁명이 완수되어 모든 것이 확실해지기 이전의 세계, 그런고로 불투명한 잠재성과 가능성의 다발들이 공존할 수 있었던 “끝에서 두번째 세계”.  혁명기의 “실험적인 파토스”가 잦아들었고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세계가 다가오고 있음을 느끼지만, 도래할 그 무엇을 정확히 예측하지는 못 하는 때.  한 시대가 종말을 고하고 이를 대체할 시대가 목전에 다다른 이 상황은, 크라카우어가 말한 역사의 “대기실 풍경”, 혹은 “끝에서 두번째  세계”(크라카우어, 2012:232)와 흡사했다. 

끝으로 향하기 위한 “대기실”의  풍경을 보여주는 이행기의 영화로 김수환은 〈홀로Odna〉(그리고리 코진체프·레오니드 트라우베르크, 1931)를 꼽는다. 〈홀로〉는 정치, 사회, 문화, 예술 등 모든 분야에서 하나의 세계가 다른 세계로 변화하는 총체적인 ‘이행기’에 출현했다. 무성영화로 만들어진 〈홀로〉는 개봉 때 발성 대사를 더했으며, 쇼스타코비치가 작곡한 영화음악(작품번호 26번, 가사가 있는 노래도 포함되어 있다.)을 사운드 트랙으로 채용했다. “혁명적 아방가르드 영화의 ‘시작’과 ‘끝’ 사이”에 걸쳐져 있는 영화. 무성영화라고는 할 수 없지만 전형적 발성영화도 아닌, 1920년대 아방가르드 영화 양식에서는 이미 벗어났지만, 아직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독트린으로 따르지도 않는  ‘양가성’이 〈홀로〉를 특징짓는다. ‘다수의 집단적 주체’가 아니라 한 평범한 젊은 여성이 주인공이며, 제목이 이 개인성을 전면적으로 드러낸다는 점은 1920년대의 혁명적 아방가르드 영화와는 확연히 다르다. 감독들은 이 제목이 시나리오가 나오기 전에 정해졌으며, 당시로선 논쟁적인 것이었다고 밝혔다. 그 후 정태적 사실이 아니라 혁명 과정에서 운동하는 현실을 담으라는 정언명령인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의거해 소비에트 영화는 “만인을 위한 영화”를 자임하며  완전한 발성영화로 전환했으며, 그 과정에서 “승리한 계급의 요구이자 권리”로서 “마땅히 도래”해야 하며 “있어야 할” “흥겹고 즐거운” 소련을 제시하는 ‘스탈린 식 뮤지컬 코미디 영화’라는 변종을 낳는다. 이 새로운 장르는 현실 사회주의 체제 내에서 할리우드의 대체물로 작동했다.(김수환, 2017:436, 440, 443, 449, 450, 452, 457~458, 460, 462)

〈신혼부부〉의 양상들도 “이행기의 영화”인 〈홀로〉와 여러 모로 닮았다. ‘신혼부부’라는 제목이 표상하는 개인들의 내밀한 생활과 가정이라는 소우주도 ‘소년 빨치산’, ‘또다시 전선으로’, ‘향토를 지키는 사람들’, ‘비행기 사냥꾼조’, ‘정찰병’, ‘빨치산의 처녀’ 등 투쟁하는 공동체의 일원 혹은 집단을 호명하던 북한 ‘예술영화’(극영화)의 제목과는 퍽 다르다. 한편, “노동계급의 노동투쟁” 영화(유우, 2019:150)라고도 일컬어지는 〈신혼부부〉의 평양 선반 공장 노동자 은실, 열차 노동자인 영철과 그 동료들은 이전 북한 영화에 주로 등장했던 농업 공동체와는 절연한 상태다. 전쟁의 기억도 전혀 술회하지 않는 그들은 도시의 공장과 기관차·철로변에서 기계와 더불어 일하고, 직장 기숙사와 평양의 노동자 주택에서 여가를 보내며 평화롭게 노래한다. 신혼부부가 다투거나 속삭이는 말소리 외에도, 영화의 사운드 스케이프는 노동 생산 과정에서 분출되는 기계 소음,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노동자들의 토론과 노래에 초점을 맞춘다. 이들의 음성과 노랫소리는 기계음, 도시를 복구하는 건설 소음들과 함께 인간 내면의 목소리를 영화의 표면에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 때로는 새로운 소비에트에서 경험하는 삶의 내밀한 감정을 발산하고 때로는 당의 명령과 자신의 소명에 회의를 토로하는 주인공의 마음을 방백처럼 들려주는 〈홀로〉의 사운드가 담당한 몫과 〈신혼부부〉의 소리와 노래의 역할은 특히 비슷하다.

3년을 넘긴 전쟁으로 초토화된 평양, 그 중에서도 집중적으로 폭격을 받아 큰 피해를 입은 대동강변을 건설노동자들이 재건하는 장면을 익스트림 롱쇼트로 조망하거나, 평양 상공을 장식하는 불꽃놀이를 신혼부부가 바라보는 장면은, SF영화처럼 단숨에 혁명 소비에트의 수도를 세워 올리던 〈새로운 모스크바Novaya Moskva〉(알렉산드르 메드베드킨·알렉산드르 올레닌, 1938)를 떠오르게도 한다. 전쟁 중이던 1951년에 작성된 작성된 「평양시복구건설 총 계획도」는 전후 인민경제 복구발전 3개년계획의 수립과 함께 수정되었는데, 실상은 제대로 실행되지 못했다 한다. 평양의 도시재건도 영화 스튜디오 건립의 경우처럼 소련과 동유럽 기술진 및 건축자재 원조에 기대어 진행되었으며, 건축설계자와 건설노동자들은 휴전 후 다시 발표된 「제2차 평양시 복구위원회 결정」에 따라 평양 중심부를 재설계하고 정치적 상징공간을 조성한다. (김태윤, 2022:97, 128) 〈신혼부부〉는 한국전쟁 이전 ‘민주기지’의 중심도시였던 평양이 전후복구 과정에서 명실상부한 북한의 수도로 자리매김해가는 이 과정을 집약하면서도,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스크린에 재현하기 보다는 “있어야 할 세계”를 향한 사회주의적 열망으로 평양이라는 도시의 새로운 공간들, 노동자들의 일터와 집을 묘파한다. 사람들과 사물들 사이로 신작로가 닦이며 건물이 다시 들어서고 사람들이 그곳을 지나갈 때, 인간 관계 및 계급, 유기물이나 비유기물을 포괄하는 새로운 우주가 형성되는 듯하다. 그런데 이 신세계에서 간간히 불리는 관조적인 노래들은, 스탈린 집권 이후의 소련 뮤지컬 코미디들이 지닌 무작정 흥겹고 쾌활한 음조나 동화와 같은 정조에는 아직 도달하지 않고 있었다. 해방부터 휴전에 이르기까지 북한 문학예술을 지배한 사조는 소위 ‘고상한 사실주의’였다. 신생 국가의 바른 ‘기풍’을 위해 고상한 덕성을 갖춘 모범인물을 창출하는 문예창작을 주문하는 지침이었다. 동구권 사회주의 국가들은 대개 1930년대 이후 소련이 정초한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따랐으나, 해방 직후 북한의 ‘혁명단계’는 아직 사회주의를 달성하지 못한 인민민주주의 단계로 여겨졌기에, 이행 단계를 상정하는 개념을 구상한 것이었다. 그러다 〈신혼부부〉가 세상에 나온 직후인 1956년 즈음, 김일성 일인 지도 체제가 확고해지고 중공업 우선정책을 채택하여 생산력이 증대하자 북한도 ‘사회주의적 사실주의(사회주의 리얼리즘)’를 공식 기조로 언급하게 된다.(정영권, 〈북한영화의 역사와 미학-1945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씨네21》, 2018. 06. 27.) 사회주의로 가는 이행기로 치부된 전시 공산주의와 달리, 스탈린의 지도 하에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구현하는 세계는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이 교시로 삼았던 ‘사적 유물론’에 따르면 마지막 세계, 즉 묵시록의 시간을 이미 거친 시간이었다. 그리고 1969년에 이르러, 〈신혼부부〉의 서정적인 노래들은 피와 불의 바다를 재현하는 ‘혁명가극’으로 변모할 것이다.
 


4. 대기실의 몽타주

〈신혼부부〉는 뮤지컬 장르를 일부 채용하지만, 사회주의 리얼리즘 시대 뮤지컬 코미디의 전형과는 궤를 달리한다. 물론 미디엄 쇼트와 바스트 쇼트가 주를 이루는 〈신혼부부〉의 화편화 전략은 언뜻 봐선 1950년대 소련 영화의 주된 경향들과도 닮아 있다. 그러나, 무수한 회의와 망설임 끝에야 비로소 재건 중인 국가의 부름에 응하겠다는 결심을 하는 은실이나, 자신의 아내가 사회적 노동가치를 생산하는 노동자이기도 하다는 걸 많은 시행착오 후에 깨닫는 영철은, 유토피아 건설을 향한 무한한 신념으로 무장한 ‘전형적 주인공’들과는 거리가 멀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의거하자면 되레 ‘부정적 인간형’에 가까울 이들 부부가 마침내 결단하는 순간을 보여주는 - 〈현기증〉과 같은 히치콕의 연출작에서 자주 만나기도 했던 - 줌인트랙아웃 쇼트는 여전히 아방가르드적이다. 문예봉이 분한 반장이 과거의 피땀어린 작업을 술회하는 시퀀스는, 전경에 기계를 배치하고 인물은 초점을 흐린 채 후경에 둔다. 공업 중심 정책을 밀어붙이기 시작한 신생국가 북한의 이념을 형상화하는 표현주의적 연출이라고 부연할 만한 장면이다. 비로소 자신의 잘못을 깨달은 영철이 사과하여 공장에 복귀하기까지 은실이 주로 머무는 집 내부와, 은실을 찾아와 집 밖에서 부르는 공장 동료들의 활력을 때로는 나누고 때로는 합하며 재배치하는 〈신혼부부〉의 편집 방법론은 1920년대 소비에트 아방가르드 영화의 몽타주를 전범으로 삼은 듯 보인다. 

1957년에 공개된 윤용규의 〈어랑천〉을 보고 쓴 박철(평론가로 추정)의 아래 글(「서정적 수법이 탁월한 공훈배우 윤룡규」, 《조선예술》, 1957.8)은 윤용규의 작가적 역량, 특히 그의 몽타주에 대한 당대 북한 영화계의 높은 평가를 어림하게 한다. 전문은 한상언 박사의 블로그에서 볼 수 있다.(현재 통용되는 표준 한국어 규정과 다른 표기 용례를 고치지 않고 원문 그대로 두었다.) 

“(전략) 전후에 제작한 〈신혼부부〉에서는 전쟁에서 승리하고 복구 건설에 궐기하고 있는 인민들의 생활 화폭이 경쾌한 수법으로 묘사되고 있다. 이 작품에서는 일군들의 머릿속에 남아 있는 공명주의와 개인주의가 우리의 건설 사업을 어떻게 방해하고 있는가를 보여 주었고 한편 가정에 대한 낡은 관념이 발전되고 있는 현실 속에서 어떻게 극복되여 가는가를 이야기 해 주었다.
이 영화는 평화와 행복을 창조하고 있는 공화국 근로자들의 영웅적 노력투쟁과 이 과정에서 힘차게 일떠서는 전후 복구 건설의 웅장한 모습들을 소개하고 있다. 작가는 이 작품에서 노동의 빠포스를 일관시키면서 공화국의 불패의 생활력을 과시하였다.
이상과 같이 윤룡규는 창작 사업을 시작하면서부터 우리 인민들의 사상 감정을 작품에 정확히 반영시키고 있으며 역사 발전의 중요 모멘트에서 버려지고 있는 사변들을 감동적으로 모사하면서 자기 자신도 현실과 함께 발전해 나갔다.

(중략)

선이 굵고 서사적인 수법에 능한 예술가와 섬세하고 서정적 수법에 능한 연출가를 구분할 수 있다면 윤룡규는 보다 후자에 속하는 작가다.
그의 이와 같은 창작적 특성은 영화의 분위기 묘사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난다. … 뜨락또르 엔진 소리가 들려온다.
마을 안 골목길들에서 아이들이 환성을 올리며 달려 나온다.
길목에서 모이를 쪼아 먹는 닭이며 돼지들이 달려드는 뜨락또르에 놀라서 기급하여 달아난다.
마을 아이들과 아낙네들의 신기로운 시선이 뜨락또르에 집중되자 운전대에 앉아 있던 명춘보는 그들에게 눈인사를 보내면서 의기 양양행서 뜨락또르를 몰아간다.……
이것은 영화 〈향토를 지키는 사람들〉의 한 장면이다.
얼핏 생각하면 이 장면은 전체 구성으로 보아 주선과는 그다지 관련이 없는 것으로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세심하게 살펴보면 이 장면이 전후 관계 속에서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놀고 있는가를 알게 된다.
조상 때부터 물려받은 낙후한 생산도구로 농사를 지어 오는 농민들에게 있어서 근대적 농기계인 뜨락또르의 출현은 경이할 일이 아닐 수 없다.
윤룡규는 이와 같은 정황을 신기한 괴물의 출현에 놀라서 혼비백산하는 닭, 돼지들의 유모라스한 화폭과 마을 어린이들과 아낙네들의 감정과 또 앞으로 농촌의 개변에 중요한 역할을 놀게 될 뜨락또르 운전수의 궁지에 찬 시선을 통하여 집약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와 같은 서정적 분위기가 안받침되여 있기 때문에 관객들은 개간지에 뜨락또르가 도착하였을 때 이를 환영하는 농민들의 환희에 찬 감정을 쉽게 이해하게 된다.
이와 같은 수법은 〈신혼부부〉에서도 재치 있게 적용하고 있다.
례를 들어 신혼부부들이 시내로 구경을 나왔을 때 부닥치는 분위기 묘사는 지금까지 신방을 지키고 있던 신부의 감정에 큰 파문을 일으킬 수 있을 정도로 우수하게 형상되였다.
복구 건설에서 로력적 위훈을 세우고 있는 인민들의 씩씩한 모습, 힘차게 일떠서는 웅장한 거리르 이 모든 정황은 신부가 상상하던 지난날의 그것이 아니다. 이와 같은 벅찬 현실 속에 신부를 안내했기 때문에 그는 모든 것이 자기를 뒤에 남겨 두고 훨씬 앞으로 나가고 있는 것을 자각하게 되며 온화하던 그의 감정 세계에서는 파문이 일게 되는 것이다.
이밖에 윤용규는 인간의 감정 세계에 침투하는 예리성으로써 신혼부부의 섬세한 감정의 교차를 파악하고 형상에 옮겨 놓음으로써 백화점 장면 또는 가정 내에서의 생활 분위기들에서 갓 결혼한 젊은 부부들의 생활 감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게 하였다.
이와 같이 윤룡규는 섬세하고 예리한 감각을 가지고 인간들의 생활감정에 침투하며 생활적 디테일을 발굴하여 인물들의 성격을 형상해 내는 우수한 재능을 가지고 있다.

(중략)

우수한 몬따쥬와 영화의 정확한 리즘과 템포의 조성은 관객들의 예술적 감흥을 환기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놀고 있다. 〈향토를 지키는 사람들〉의 개간 장면에서 느낄 수 있는 경쾌한 리즘과 템포는 농민들의 노동에 대한 희열과 노동 과정에서 조성되는 율동과를 정확히 결부시켜 주었다.
〈신혼부부〉에서는 건설장 장면에서 얼마 길지 않은 화면들을 훌륭하게 몬따쥬함으로써 건설의 벅찬 분위기를 집약적으로 묘사하였다.(후략)”

박철은 “역사 발전의 중요 모멘트에서 버려지고 있는 사변들을 감동적으로 모사”한다고 진술하며 윤용규 영화 속 몽타주의 힘을 꿰뚫는다. 그가 언급하는, 은실과 옛 동료가 만나는 공사현장 몽타주와 은실 부부가 산책하는 대동강변 몽타주는 인물들의 의식과 무의식을 선명히 드러낸다. 인물뿐 아니라 꽃, 아코디언, 책, 탁자, 스탠드, 창틀, 그림 엽서, 시계, 벽에 걸린 옷과 모자, 빨래, 사과, 밥상 등 실내 정물을 비롯한 〈신혼부부〉 속 사물들은 몽타주라는 이론과 실천의 근간이 되는 ‘파편’으로 작동한다. 이 “이질적인 시간들의 파편”은 “또 다른 생성의 잠재성을 내포하며 (사유의) 섞임, 교환을 필연적으로 요구”하며, “‘잃어버린 것으로 기억된 것’이자 존재의 희미한 전조”로 현전하며 잠재적 카오스라 할 파편화 상태에서 충돌하고 투쟁하며 길항하다 어느 순간 “단박에 빛의 속도”로 결합하여 지금껏 “존재하지 않았던 전대미문의 관계” (이정하, 2022:118~121, 327)를 미구에 창조할, 새로운 역사 주체 형성의 가능성을 감지하게 하는 몽타주를 이뤄낸다. 
글 서두에서 언급했던 전시 도록 64쪽에, 1956년 중국 영화 잡지 《대중전영》 15호 표지에 실린 〈신혼부부〉 컬러 스틸이 실려 있다. 은실은 사과를 깎고 있고 공장 막내 옥단이가 은실을 지켜보며 엄지손가락을 치켜 올리는 손짓을 한다. 이 장면에서 보이는 사과는 부부생활의 ‘위기’를 맞게 될 은실과 영철의 신혼집 탁자 위에 영화가 전개되는 내내 놓여 있다. 사물과 사람이 부딪히며 접속하여 구축하는 〈신혼부부〉의 리듬과 템포는, “영화의 기계적 지각으로 시각적 무의식 지대, 나아가 일상적 무의식 지대”를 목도할 수 있으며, “이 일상적 무의식 지대가 우리의 의식으로 포착되지 않고 파악되지 않는 비결정적 영역이자 역사에 대한 변증법적 인식의 틀에서도 빠져나가는 영역”이라던 벤야민의  「기계복제시대의 예술작품」 속 한 구절을 상기시키기도 한다.

벤야민의 스승 에른스트 블로흐는 당대의 현실을 복수적이고 공시적인 시간성, 곧 ‘비-동시대성’이란 개념으로 해석할 것을 제안하며 그 방법론을 현대예술의 몽타주에서 찾으려 했다. 블로흐에 따르면 몽타주는 근대 도시의 비-동시대적 시간성에 정합적인 인식 형태이다. 장기지속된 시간 동안 과거의 지층에 잠재해 있다가 현재라는 이질적 공간에 급작스레 출현하는 ‘역사적 징후’를 현시하는 형식인 몽타주는 바로 그러하기에 ‘지금-시간’을 혁명적 아방가르드로 이행시킬 ‘중지(중단)의 방식’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몽타주로 해체된 과거의 대상들에서 이전에 현실화한 적이 없는 잠재적 힘을 포착하여, 사물에 잠재한 힘들을 해방하고 해방된 힘으로 미래를 축조할 초석을 마련하자고 블로흐는 주창한다. 한편 죄르지 루카치가 정초한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익히 알려져 있듯 몽타주를 리얼리즘 미학에 반하는 형식주의 방법론의 정점으로 여겼다. 루카치에게 있어 “통일성을 깨뜨리고 유기적인 것의 소멸을 야기”하는 몽타주는 역사적 데카당스의 징후를 드러내는 명백한 표징일 뿐이었다.(이정하, 2022:326~327, 329, 332~333, 335)

블로흐의 역사의식을 빼 닮은 사유를, 후학인 모스크바-타르투 학파를 대표하는 문화기호학의 창시자이며 영화이론가였던 유리 로트만의 저작 『문화와 폭발』에서 발견할 수 있다. 로트만에 따르면 과거와 미래의 관계는 대칭이 아니다. 미래는 가능태의 공간이며,  현재란 아직 전개되지 않은 의미 공간의 갑작스러운 점화이다. 그것은 잠재적으로 미래의 모든 발전가능성을 자신 안에 담지하고 있다. 이 가능성 중 무언가를 선택하는 일이 인과 관계나 핍진성의 법칙을 따르진 않는다. 미래의 선택은 우연히 실현된다. 그러하기에 그 선택은 극도로 높은 정보성을 지니게 된다. 동시에 폭발의 순간은 잠재적 가능성으로만 남은 다른 노선들을 잘라내고 인과 관계의 법칙이 다시 작동하게 하는 기점이기도 하다.

폭발의 순간은 체계의 모든 정보성이 급격히 늘어나는 장소이기도 하다. 완만한 발전은 이제 완전히 새롭고 예측 불가능한 노선으로 도약한다. 체계 내의 모든 요소가, 혹은 폭발로 인해 미래의 운동가능성이 구축한 망 속으로 우연히 들어온 다른 체계의 요소조차, 폭발의 결과로 태어나 미래의 움직임을 결정하는 지배적 요소로 등장할 수 있다. 하지만 다음 단계에서 이미 그것은 사건들의 예측 가능한 연쇄를 만들어낸다. 폭발적인 역사의 국면에서 이루어진 모든 미래 예측의 경험들이 증명해주는 바는, 역사의 급격한 전환을 정확히 예언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폭발이 소진되는 순간은 전개 과정의 전환 국면을 표상한다. 역사의 영역에서 이는 향후 발전을 위한 출발점이면서 동시에 자기를 인식하는 지점에 해당한다. 이후의 발전 과정은 의식적으로 우리를 폭발의 최초 지점으로 되돌릴 터이다. 이미 발생한 사건이 관찰자의 판단에 투영되며 새로운 존재성을 획득한다. 이때 사건이 근본적인 변모를 겪게 되는데, 즉 우연히 발생했을 뿐인 사건이 이제 유일한 가능성으로 간주되는 것이다. 관찰자의 의식 속에서 예측불가능성이 법칙성으로 탈바꿈한다. (로트만, 2014: 29~32)

『문화와 폭발』을 한국어로 옮긴 김수환은, 로트만이 쓴 구절을 공들여 인용해가며 다음과  같은 역자 해제를 썼다. 

“예술가의 창작 과정을 다룬 이 시(알렉산드르 블로크의 「예술가」)에서 제시되는 영감의 순간은 번역 불가능한 것을 번역 가능한 것으로 바꿔놓는, 예측 불가능한 폭발의 국면과 다르지 않다…. “기호학적 지층에 뚫린 창문”으로서 폭발은 불가피하다. …만일 그 창문이 없다면, ‘기호계’ 역시 존속 할 수 없다. 창문(폭발) 없는 기호계(문화)는 더 이상 약동하는 생성의 메커니즘이 아닌 죽어버린 감옥이 될 뿐이다. 폭발은…가능한 것이 아닌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을 향해 조준된 개념이다…. 문화와 폭발, 그것은 모든 허용된 예측가능성의 경계 너머로 돌파하는 예외적 사건의 행위를 가리키는 이름이다…. ‘모든 것을 포괄하는 작동의 원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뚫고 지나갈 균열의 장소, 곧 “기호학적 창문”을 요구했던바, 바로 그 창문이 ‘폭발’의 이름으로 대두한 것이다.”(로트만, 2014:310~311, 315, 329, 332~333) 

〈신혼부부〉에는 말 그대로 ‘창문’이 수 차례 대두하며 다음과 같은 몽타주를 동반한다.  영철이 누워 있는 직장 기숙사 창문 밖에서 흔들리는 나뭇가지에 걸려 멈춘 달의 형상. 공장을 그만두고 답답해하는 은실이 바깥을 내다보는 창에 걸린 레이스 커튼의 미세한 흔들림. 이 장면들은 연속적 시간에서 벗어나 있는 듯한 찰나의 이질적 아름다움을 경험하게 하며 새로운 시간성을 개시한다. 

다시 김수환을 인용하자면, 폭발은 “기존의 상황을 급변시키는 급격한 단절의 사태 자체라기보다는 오히려 그런 사태를 가능케 하는 어떤 조건의 급작스러운 개시”를 뜻한다. 또, 폭발은 혁명적 사건의 발생이 아니라 예측 불가능한 사건들을 위한 가능성의 급작스러운 열림이다. 이는 연속적 과정들의 시간성 안에서 온전히 재현될 수 없기에 분절되고 탈구된 시간이 되며, 이 ‘빠져나온 시간성’ 안에서 불가능했던 잠재태가 가능태로 변모한다. (로트만, 2014:332, 334) 자신들의 과거와 현재를 점검하고 미래를 탐색하며 창문을 바라보는 은실과 영철 부부는 이 시공에 개시되는 “폭발의 시간성”에 휘말린다. 

해방공간의 전후 동안 남북 양측에서 윤용규의 동료였던 임화도 일제강점기에 쓴 글에서 벤야민과 블로흐, 로트만을 연상하게 하는 역사관을 밝힌 바 있다. 「조선영화발달소사」, 「역사·문화·문학: 혹은 시대성이란 것에의 일 각서」 등 1930년대 말에서 1940년대 초 사이에 임화가 조선영화 및 역사기술을 다룬 저작의 구조를 살피며, 손이레는 임화가 뒤엉킨 시간성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조선영화의 형성 과정을 기술한다고 분석한다.(손이레, 2018:376~379)

손이레에 따르면, 시급히 과거를 탐구하기 위해, 임화는 위기라는 감각을 압도하는 지금-여기의 조건을 강조한다. 역사에 대한 이러한 발견적 접근은 임화의 시간성에 대한 이해와 결부되어 있다. 이는, 현재의 일부분이 아직 과거 가운데 살고 있음에도 우리가 의식하는 것은 과거 가운데 살아 있는 현재가 아니라 현재 가운데에 살아 있는 과거이며, 현재 가운데 살아 있는 미래에 대하여 우리의 주요한 관심이 향해 있기 때문이다. 임화는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성이 뒤얽혀 있음을 “현실성”과 “가능성” 개념을 통해 설명한다. 

-과거 가운데 살아 있는 현재: 과거의 가능성 중 현실화된 것
-현재 가운데 살아 있는 과거: 현실화된 것 중 한때 가능성이었던 것
-현재 가운데 살아 있는 미래: 현재의 가능성 중 미래에 현실화될 것

임화가 역사를 통해 모색하려는 바는 과거에서 현재, 미래로 이어지는 일방통행로에서 도출되지 않는다. 이는 과거의 가능성과 현실화된 가능성들의 관계, 현재 우리가 처해 있는 조건 관계를 인식할 때 가능하다. 그것은 현실성과 가능성 간의 혼종을 내비치지만, 동시에 과거와 미래의 접촉면인 현재의 어떤 가능성이 현실화되는지는 인식하기 어렵다는 점도 임화는 지적한다. 가능성과 현실성의 뒤얽힘에서 가능성이 현실화하는 현재가 생성되고,  현실성의 조건 속에서 또 다른 가능성이 배태되는 것이다. 그러나 임화가 식민시기부터 암중모색했던 이 조건들의 창문은, 그에게만은 휴전 직후에 영영 닫히고 말았다. 

5. 대기실 밖으로 나서다

〈신혼부부〉 제작을 전후한1954-56년 사이에 ‘전후복구3개년계획’이 진행된다. 1956년 말에는 천리마운동이 노동강화·경쟁운동으로 시작되었고, 이후 생산성 향상을 위한 경제 자주노선 천명은 물론 정신개조를 위한 장기 운동으로까지 이어진다. ‘조선필림’ 로고조차 평양 복귀 직후엔 모스필름의 그것과 닮은 인민 형상이었다가, 천리마운동이 시작되고 사람들 사이에 말이 끼어있는 모습으로 바뀌었다. 이 시기는 1953년 스탈린이 죽은 뒤 1956년 흐루쇼프가 소련공산당 대의원 회의에서 비밀연설을 하며 점화한 스탈린 격하 운동의 시기와도 겹친다. 따라서 북한도 소련의 상황에 자극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1955년에는 남로당계를 대표하던 박헌영이 우선 제거되었다. 1956년 8월에는 전후복구를 위한 경제 원조를 청하러 동구권 국가를 방문 중이던 김일성을 윤공흠 등이 비판하려 했으나 실패하자 반당종파분자로 몰린 서휘 등 4인의 연안파는 중국으로 탈출한다. 이른바 ‘8월 종파사건’으로, 연안파 외에도 소련파 등과의 연합정권 성격이 짙었던 북한이 확고한 김일성 단일 체제로 전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사건에는 영화감독 정준채의 동생인 음악가 정추와 모스크바 영화학교 유학생들도 연루되었으며, 이들은 북한으로 돌아가기를 거부하고 소련으로 망명한다. 영화 〈굿바이 마이 러브NK: 붉은 청춘〉(김소영, 2017)가 다루어 우리에게도 낯설지만은 않은 역사다.

이즈음 김일성은 영화 등 예술창작노선에도 직접 개입하기 시작하는데, 윤용규가 〈어랑천〉을 발표하는 해인 1957년 1월17일에는 조선영화예술촬영소에서 연설했고, 1960년 무렵엔 김정일에게 영화예술 ‘영도자’의 지위를 승계한다. 

이 시기에 북한은 자유주의적 문화예술인을 “반동적 부르주아 작가”라 칭하며 ‘반우파 투쟁’도 전개한다. 1956년 1월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상무위원회에서 「문학예술분야에서 반동적 부르주아사상과의 투쟁을 강화할 데 대하여」라는 결정을 내려 기석복, 정률 등을  “협애한 지방주의 및 종파주의” 혐의로 1952년에 비판 받은 김남천, 이태준 등을 지지하는 부르주아 작가이자 종파분자로 지목한 뒤, 같은 해 4월에는 “이러한 부르주아 반동 작가들이 전파한 사상적 악영향”을 완전히 숙청하겠다는 결정을 내린다. 또, ‘8월 종파 사건’ 직후인 1956년 10월에 열린  ‘제2차 조선작가대회’에 나선 김일성은 카프의 사회주의 리얼리즘 문학을 혁명으로 확립하여 “자본주의 사상잔재 버리고 당과 혁명을 위하여, 인민을 위하여 복무하는 예술인”이 되라고 요구한다. 중국에서도 비슷한 양상이 벌어졌는데, 1958년에야 북한과 중국에서 ‘반우파투쟁’이 일단락되며 예술적 자율성을 침해하는 관료주의와 사회주의 리얼리즘만을 천명하는 교조적 통제가 문화예술계마저 지배하게 되었다.(유우, 2020:148)

〈신혼부부〉가 상영된 이듬해에는 천리마노동운동을 처음 다룬 영화인 〈행복의길〉(전동민), 한설야(그는 1960년대 초에 숙청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의 대표작 『력사』를 영화화한 작품으로, 김일성을 항일유격투쟁의 민족영웅으로 자리매김하며 일인 체제 강화를 선전하는 영화 〈백두산이 보인다〉(김락섭)가 연달아 나온다. 북한영화가 끝에서 두번째 세계의 대기실을 나와 “역사 발전의 마지막 단계”에 진입한 때를 이즈음이라 할 수 있겠다.  그 후, 1960년대에는 “당과 혁명에 대한 끝없는 충실성”을 지니고 생산목표 달성을 위해 초인적인 노력을 기울여 기적적인 성공을 거두는 천리마 영웅들이 등장하는 작품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는 1960년 11월 김일성이 ‘작가, 작곡가, 영화 부문 일군들과 한 담화’에서 「천리마 시대에 맞는 문학예술을 창조하자」라는 연설을 통해, 문예 창작에 시대 정신을 반영하는 현실적 주제, 즉 “천리마의 기세로 내달리고 있는 우리 인민의 이 위대한 창조적 생활”과 “천리마 시대 사람들의 보람찬 생활과 영웅적 투쟁 모습”을 형상화하라고 요구했기 때문이었다.(유우, 2020:182) 또, 앞서 언급한 〈정방공〉을 비롯해, 〈갈매기호 청년들〉(1961), 〈붉은 꽃〉(1963) 등 스탈린 식 뮤지컬 영화들도 다수 만들어졌다.(정영권, 같은 기사)

한편, 〈신혼부부〉의 인간형은 곧 시대정신이 되는 천리마 영웅과는 거리가 멀었다. 영철과 은실은 전후 복구와 새로운 국가 건설을 위해 성심을 다하면서도 회의하고 부부싸움도 하는 평범한 소시민적 인간이다. 문예봉이 연기하는 선반 공장의 작업반장 선배도 목표량 달성을 위해 동료들을 곡진하게 추동하지만, 천리마 시대의 초인적 영웅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신혼부부〉는 노동계급을 중심으로 한 전후 복구와 새로운 공화국 건설 과정에서, 개인 영웅주의를 되레 비판하는 작품으로 당대 관객들에게 받아들여졌다. 그들의 세계는 천리마 운동으로 정향된 것이 아니었으니, 그들은 천리마 시대와 이후에 이어지는 ‘고난의 행군’이 아닌 다른 시공으로 향할 수 있었던 가능성을 품고 대기실에 머물러 있었던 셈이다. 이렇듯 사뭇 ‘비-동시대적’인 작품을 창작한 윤용규는 1955년 조선문학예술총동맹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 발탁되고, 1964년에는 중앙위원이 된다. 같은 해에 그는 조선영화인동맹 중앙위원회 상무위원 및 조선문학예술총동맹 중앙위원이 되고, 배우로도 활동하며 공훈예술가 칭호를 받는다. 하지만 이후 ‘복고주의자’로 몰려 한동안 영화계에서 떠나있어야 했다. 

윤용규와 여러 작품에서 협업했던 문예봉도 1969년부터 활동을 중단했다.  잡지《조선영화》 1965년 4월호에 나운규를 회고하며 찬사를 섞은 일이 빌미가 되었다 한다. 윤용규는 1980년 〈춘향전〉을 다시 한번 만드는데, 유원준과 공동연출했다. 일제강점기의 첫 발성영화인 <춘향전>(이명우, 1935)에서 성춘향을 연기했던 문예봉이 이번엔 이몽룡의 모친 역을 맡아 북한영화계에 복귀했다. 또, <마음의 고향>에서 주인공 도성의 어머니로 분했던 김선영이 이 작품에서는 월매로 등장한다. <춘향전> 제작 후에 다시 활동이 뜸하던 윤용규는, 1984년 5월 22일에 “온 사회를 주체사상화 하는 역사적 위업에서 연극 영화 예술인으로서 지니고 있는 자기의 임무와 책임에 충실했”다며 ‘국기훈장’ 1급을 받았다. 이준엽·함충범은 훈장 수여의 실제 연유를 다른 데서 찾는다. 약 한 달 전인1984년 4월 19일, 신상옥과 함께 첫 기자회견을 열어 북한에서의 활동을 기정사실화하고 김정일의 절대적 신임을 얻은 최은희가, 〈마음의 고향〉으로 자신을 주연배우로 부상시켜 준 윤용규에게 사의를 표했다는 해석이다. 훈장을 받은 윤용규는 1986년에 〈가야금에 깃든 사연〉을 연출했는데, 이 작품 이후의 행적은 정확히 파악되지 않고 있다. 북한영화 연구자들은 윤용규가 다시 활동을 중단한 까닭을 최은희·신상옥이 1986년 3월 오스트리아 빈 주재 미국대사관으로 탈출한 사건과 연관하여 유추한다. (이준엽·함충범, 2018:28, 46~48)

무언가 다른 것으로 변모할 수 있었던 전환의 국면이 배태한 영화 〈신혼부부〉와, 시간성이 분기하는 역사와 현실을 현시하는 역량을 지녔던 영화인 윤용규가 ‘오래된 미래’인 과거에서 도래한 2021년. 지금-여기 또한 무언가 다른 것이 드러나기 시작하는 ‘끝에서 두번째 세계’의 대기실일 지도 모른다. 다시 김수환에 기대자면, 혁명의 진정한 아포리아는 그것의 시작이 아니라 끝의 지점에서, 그러니까 그것이 무언가 다른 것으로 변모되기 시작하는 지점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이 대기실에서 〈신혼부부〉를 다시 한번 만나고 싶다. 시네마테크 KOFA의 큰 스크린에서 〈신혼부부〉를 꼭 다시 보고 싶다. 


참고문헌 
- 이준엽•함충범, 「남한과 북한에서 제작된 윤용규 감독 영화에 대한 비교 연구」, 『한민족문화연구』 제63권 63호, 2018.
- 유우, 「한국전쟁기 중국에서의 북한 영화에 관한 연구」, 『현대영화연구』 25호, 2016.
- 한상언, 「6.25전쟁기 북한 영화와 전쟁 재현」, 『현대영화연구』 11호, 2011.
- 한상언, 「전후 북한영화의 재건에 관한 연구」, 『영화연구』 84호, 2020.  
- 유우, 「북한과 중국의 영화 교류 연구(1956~1966)」, 『비교문화연구』 제59집,  2020.
- 김수환, 「혁명과 소리」, 『다시 돌아보는 러시아 혁명 100년 2』, 박종소 엮음, 문학과 지성사, 2017.
- 지그프리트 크라카우어, 『역사: 끝에서 두번째 세계』, 김정아 옮김, 문학동네, 2012. 
- 유우, 「한국전쟁 이후 북한영화의 제작 및 중국에서의 상영(1955∼1960)」, 『영화연구』 82호,  2019.
- 김태윤, 「전후복구시기 ‘수도’ 평양의 탄생과 상징공간의 조성(1953~1956)」, 『도시연구: 역사·사회·문화』 29호, 2022.
- 이정하, 『몽타주』, 문학과지성사, 2022.
- 유리 로트만, 『문화와 폭발』, 김수환 옮김, 아카넷, 2014.
- 손이레, 「도래(해야)하는 식민지 조선영화의 고유성: 임화의 조선영화론 재고」, 『동아시아 지식인의 대화-영화 이론/비평의 감정 어린 시간』, 김소영 엮음, 2018, 현실문화연구

* 가독성을 위해 본문에 필자 이름과 발행시기, 해당 쪽수만 괄호 안에 표기했던 문헌 서지정보를 인용한 순서대로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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