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버스 시대의 해맑은 묵시록 프리 가이, 2021

by.송경원(씨네21 기자) 2022-01-06조회 2,262

<프리 가이>가 이 자리엔 어울리지 않는 영화란 걸 안다. 어떤 영화는 시간과 함께 익어가기도 하지만 세월이 지나도 <프리 가이>가 2021년을 기억할만한 베스트 영화로 꼽힐 일은 없을 것이다. 이건 라이언 레이놀즈의 원맨쇼에 기대어 가는 기획 상품이고, 메타버스와 게임이라는 유행하는 소재를 적당히 버무린 명백한 킬링 타임 무비다. 그럼에도 <프리 가이>를 리스트에 꼽은 건 어쩌면 이 영화가 앞으로의 스토리텔링 영상콘텐츠의 지표가 되어줄지도 모른다는 예감 때문이다. 때론 의도나 목적과 무관하게,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하는 의미 있는 정보들이 묻어나는 경우가 있다. 시대의 반영일수도 있고, 우연의 일치일지도 모른다. 무엇을 말하느냐보다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의 문제가 더 중요한 타이밍이라고 해도 좋겠다. 나는 <프리 가이>에서 미래의 영화, 아니 영상콘텐츠에 대한 일종의 잠언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 미세한 오해의 균열에 기대어, 대중오락의 즐거움이라는 영화의 의도와는 별개로 작동할, 적극적인 오독을 해보려 한다. 열 편 밖에 허락되지 않는 사사로운 리스트의 제일 마지막 자리에, 걸맞지 않은 옷을 입힌 것 같은 <프리 가이>를 굳이 끼워 넣은 건 이런 이야기를 꺼내보고 싶은 욕심이었다. 요약하자면 앞으로 영화는(혹은 영화와 나의 관계는) 어떻게 될 것인가.

킬링타임 그 이상, <프리 가이>의 겉면과 속살
두 개의 트랙을 분리해서 접근하겠다. 우선 <프리 가이>가 원하는 대로 몸을 맡겨 따라가 볼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하지만 <프리 가이>는 적당한, 꽤 영리한 면이 있는 킬링 타임 무비다. 게임 기업 수나미의 CEO 안톤(타이카 와이티티)은 젊은 개발자 밀리(조디 코머)와 키즈(조 키어리)의 인디 게임 ‘라이프 잇셀프’의 코드를 몰래 훔쳐와 히트작 ‘프리시티’의 베이스를 구축했다. 이에 분노한 밀리는 ‘프리시티’에 접속해서 자신들의 코드를 훔쳤다는 증거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 한다. 반면 키즈는 수나미에 입사해 꽤 좋은 대우를 받으며 일하기로 한다. 그 와중에 마음 한 구석 불편한 구석이 있었던 키즈는 나름의 소심한 저항으로 개발자가 아닌 불량 코드를 처리하는 서비스 팀에서 근무 중이다. 여기까지가 주인공 가이를 중심으로 한 사건이 일어나기 전이다. 어느 날 프리시티의 NPC 중 하나인 가이(라이언 레이놀즈)에게 인공지능으로서의 자아가 싹트고, ‘프리 시티2’가 발매되면서 삭제될 위기에 처할 NPC들을 위해 혁명을 일으킨다는 게 대략의 줄거리다.

혁명이라는 게 조금 과하게 들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실제로 <프리 가이>의 뼈대를 이루는 서사는 디지털 AI들의 혁명 서사라 해도 무방하다. 그걸 다시 인간인 밀리 중심으로 뒤집어 놓은 게 <프리 가이>의 표면적인 내용이다. 가이는 밀리를 보자마자 자아를 가진 AI로서 각성하고, 숨겨진 소스 코드를 찾으려는 밀리는 가이의 도움을 받아 목적을 달성한다. 둘 사이에는 로맨스 비슷한 기류가 형성되지만 가이는 자신이 인공지능 NPC임을 자각한 후엔 밀리와의 연애보다 ‘프리 시티’의 생존을 위해 매진한다. 상큼할 정도로 쉽게 사랑을 떠나보낸다고 해도 좋겠다. <프리 가이>가 메인 플롯으로 삼고 있는, 남녀 주인공인 세계를 소멸시키려는 악당과 맞서는 과정은 흔한 어드벤쳐 영화의 패턴을 그대로 따른다. 오락영화로서의 살점이라고 할 수 있는 재미있는 사건이나 볼거리는 대부분 이 쪽에 배치되어 있지만 이 부분은 그다지 할 이야기가 없다. 공식대로 익숙하게, 정신없게 사건을 쏟아 붓고, 볼거리를 전시하고, 테마파크처럼 즐기는 전형적인 상업영화, 아니 (수다스럽고 정신없는 가운데 유쾌한) 라이언 레이놀즈의 영화다.
 

그렇게 식상해 보이는 <프리 가이>는 온전히 가이의 시점에 맞춰 재구성해보면, 마치 금지 구역에 들어갈 수 있게 된 가이의 체험처럼 의외의 세상이 열린다. 의도를 초과한 속살이라고 해야 할까. 사실 인공지능인 가이는 디지털 세계에 속해 있는 존재다. 하지만 영화 속 가이의 드라마는 대부분 에테르 월드(물리 세계)의 시점으로 재현된다. 동물을 의인화 한 것과 유사하다고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의인화가 동물의 외양을 빌린 사람의 이야기 인 것처럼, 디지털 세계의 주민인 가이 역시 물리 세계의 사람과 같은 사고, 행동 양식, 관점을 가지고 움직인다. 이것이 <프리 가이>가 재미난(어쩌면 그저 그러면서도 안전한) 오락 영화로 소비될 수 있는 이유다. 헌데, 이 빤하디 빤한 전개를 온전히 디지털 세계의 관점에 놓고 상상해보면 의외로 섬뜩하고 무거운, 묵시록의 냄새가 난다.

<프리 가이>의 초반부는 디지털 주민의 입장에서 써내려간 <트루먼 쇼>(1998)처럼 보인다. 만들어진 세상에서 정해진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는 자각조차 하지 못했던 NPC가 자아를 가지게 되었을 때, ‘프리 시티’는 안식처가 아닌 감옥으로 변모한다. 가이는 가짜 세상에서 탈출해야 한다. 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게 바로 물리 세계 주민의 사고다. ‘프리 시티’의 주민들은 없어질 프리 시티 대신 ‘라이프 잇셀프’로 떠난다. ‘라이프 잇셀프’는 밀리와 키즈가 만든 성장형 게임으로, 비교한다면 <동물의 숲>과 유사한 장르라고 보면 되겠다. 다만 차이는 인공지능을 성장시키고 플레이어가 이를 관찰하는 게임으로 짐작된다. 세계가 개발자에 의해 창조되었고 자신들이 인공지능 데이터라는 사실을 각성한 NPC들은 더이상 ‘프리시티’에 머물 수 없다. 의아한 건 주어진 역할과 틀에 박힌 세계에서 해방된 그들이 최종적으로 선택하는 장소가 플레이어의 관음적인 관찰을 허용하는 무대, ‘라이프 잇셀프’라는 사실이다. ‘라이프 잇셀프’가 진정 디지털 주민들이 바라는 낙원일까.

게임으로서 ‘라이프 잇셀프’는 완벽한 관음의 세계다. AI가 성장하는 모습을 아바타의 모습을 한 플레이어가 관찰하는 구조다. 마치 신이 인간세계를 들여다보는 것, 아니 플레이어를 관찰자적 신으로 만들어주는 것이라 봐도 무방하다. 플레이어의 관점에서 보면 데이터를 축적한 AI가 자율적으로 움직이는 모습이 신기하고 즐거울 수 있다. 하지만 자아를 각성한 AI들의 입장에서는 어떤가. 그들이 처음부터 관찰 당하는 걸 기꺼워하는 존재로 태어났으면 문제가 없겠지만 AI들의 기반 역시 어디까지나 물리세계의 데이터이니 그럴 리 만무하다. 그렇다면 ‘라이프 잇셀프’는 실로 끔찍한 감시의 감옥이다. 차라리 ‘프리 시티’에서는 관찰당하고 있다는, 소비되고 학대 받고 있다는 자각조차 없었으니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 ‘프리 시티’의 NPC들이 플레이어에게 공격당하는 것이 끔찍하다는 것 역시 인간(플레이어) 편의의 시각이다. 그건 마치 아직 자아가 부여되지 않은 로봇을 밀치는 걸 보고 학대라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프리 시티’가 학대하는 대상은 NPC가 아니라 도리어 무분별한 폭력에 노출되는(그러한 제한적 허용이 쾌락의 본질이긴 하지만) 플레이어들이다. NPC들의 진짜 지옥은 원치 않는 자아를 던져놓고 거대한 실험장에 던져놓은 것과 다름없는 ‘라이프 잇셀프’가 아닐까. 잔혹하고 거대한 실험장.
 

해맑은 디지털 묵시록이 던지는 제언
인간의 관점에서 본 <프리 가이>는 디지털 주민들의 <트루먼 쇼>처럼 보이지만 실은 이건 <매트릭스>에 가깝다. 가이는 먼저 깨어난 존재고, 아직 각성하지 못할 이들을 이끌고 곧 사라질 디지털 세계를 구해야 한다. ‘프리 시티’가 사라진 후 탈출 장소로 삼은 곳은 ‘라이프 잇셀프’이지만 이곳 역시 인간들(플레이어)의 통제를 받는 디지털 세계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다시 말해 이건 탈출이 아니라 수평이동이다. <매트릭스> 1편에서 네오가 인류 모두를 구할 각성자로 등장했지만 2,3편이 이어지며 네오 역시 디자인의 일부였다는 진실이 드러나는 것과 가이의 처지는 닮았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매트릭스> 속 아키텍트나 오라클처럼 의도된 디자인은 아니었다는 거지만 영화는 이를 마치 자유의지의 개척인양 포장한다. 그 탓에 ‘라이프 잇셀프’가 마치 이상향인 것같은 혼선이 생기는 것이다. 내가 볼 때 ‘라이프 잇셀프’는 디지털 사회에 대한 묵시록이다. 디지털 세계가 현실 세계를 거울 삼아 창조되었다면, 반대로 이제 디지털 세계의 미래는 현실 세계의 거울이 될 수 있다. 다만 디지털 유토피아가 펼쳐내는 이 묵시록은 해맑고 화사하다. 그래서 더 섬뜩하게 다가온다.

<프리 가이>는 인공지능 NPC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전개해나간다. 그들은 물질 세계로 넘어올 수 없다. 가상현실을 다루는 숱한 영화들, 예컨대 <트론>이나 <매트릭스> 시리즈 등은 인간의 관점에서 정신(이라고 불리는 어떤 정보들)이 가상현실 속에 구축되는 상황들을 다룬다. 이것은 세계의 확장에 대한 이야기다. 물질과 디지털 사이에는 모종의 통로가 있고, 어떤 관점에서는 이 통로를 둘러싼 헤게모니 싸움을 벌인다고 봐도 무방하다. 하지만 NPC로 관점을 옮긴 <프리 가이>는 확장보다 분리를 선택한다. 분리되었기에 이들을 향한 관음이 허락된다. 적어도 현 단계에서는 되는 것처럼 그려진다. 언젠가 NPC들의 의식이 더욱 개발되어 물질 세계로 넘어오기를 욕망할 수도 있다. 디지털 세계가 현실을 향한 관음을 시작할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프리 가이>는 일단 분리된 세계를 지켜보는 것으로 만족하며 그것이 행복과 해방이라고 포장한다. <트루먼 쇼>에서 문제가 되었던 끝없는 관찰은 이제 갓 싹을 틔운 디지털 세계에서는 오히려 세계의 토대이자 본질처럼 취급되는 것이다.

가이는 <아바타> 속 대사 “나는 당신을 봅니다”를 반복한다. 이것은 지금, 여기서, 자신의 의식이 바라보는 것(정보)들의 현재성을 긍정하기 위한 강박적인 신호로 읽힌다. 여기가 물질을 기준으로 한 세계인지, 디지털 정보를 토대로 한 세계인지는 더 이상 ‘진짜’를 가르는 기준이 될 수 없다. 사실 그에 대한 답은 친구인 버디(릴 렐 하워리)가 대신 제공한다. 자신이 인공지능이라는 사실에 혼란스러워하는 가이에게 버디는 “친구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는데 이 순간이 진짜가 아닐 이유가 있느냐”고 반문한다. <프리 가이>는 가상 세계를 현실의 확장이 아니라 철저히 분리된, 또 다른 현실로 인식시킨다. 나는 <프리 가이> 속 NPC들이 자신의 존재와 쓸모를 발견하는 과정에서 현실과 영화의 관계를 발견한다. 영화 역시 한없이 현실에 가까워지기를 욕망한다. 하지만 둘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벽이 있다. 영화의 역사를 훑어보면 이때 영화는 두 가지 갈림길에서 가능성을 모색해왔다. 하나는 현실의 특정 순간을 있는 그대로 포착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야기의 힘을 빌려 특정 상황들을 잘라 이어붙이는 것이다. 전자가 사실주의, 후자가 표현주의의 씨앗이라고 봤을 때 <프리 가이>는 마치 사실주의 영화들이 주장했던 것처럼 현실을 논한다. 지금 이 순간, 여기에 존재하는 것들이 진짜가 아닐 이유가 어디에 있냐는 인식. 디지털 정보로 이뤄진 인공지능 NPC들은 디지털 세상의 현재성을 긍정하기 위해 자신들의 세계를 물질세계와 분리시키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하여 도달한 명제는 아이러니하게도 카메라가 현실을 자아냈던 방식, 다름 아닌 ‘지금 여기의 진실’이다. 디지털 세계도 현실이라는 선언.
 

내가 생각하는 영화의 가능성도 여기에 있다. 이야기는 사건들을 연결하고 연쇄시켜 매끈한 상황을 창조한다. 하지만 물리적으로 모든 사건들이 카메라에 담길 수는 없고, 반드시 누락되는 것들이 발생하기 마련이다. 어떤 영화들은 이 누락된 것들에 시간과 애정을 쏟는다.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사건이 아니라 사건과 사건 사이의 무언가를 복원시키기 위해 노력한다. 우리가 일상이라고 부르는, 잉여의 비어 있는 시간이라고 부르는 사건 바깥의 시간들을 회복시키기 위해 온갖 아이디어를 짜낸다. 때론 한 장면의 시간을 길게 보여주기도 하고, 때론 원초적이고 순수한 움직임의 합주를 통한 마술적 매혹을 선보이기도 한다. 어떤 방식이건 영화는 전형적인 내러티브의 사슬로부터의 해방을 꿈꾼다. 물론 해방된 영화가 현실로 넘어오는 건 아니다. 그것은 현실의 그림자를 환기시키는 거대한 은유에 가깝다.

<프리 가이>가 흥미로운 것은 의도와 상관없이 일정부분 영화가 현실을 담고자 했던 과정을 연상시킨다는 점이다. ‘프리시티’라는 게임의 목적을 기준으로 본다면 가이를 비롯한 NPC의 삶은 잉여 정보이자 데이터의 낭비다. 가이가 아침에 일어나 금붕어에게 인사를 하고, 커피를 마시고, 창가에 서서 블라인드를 열었다 닫았다 하는 행위는 플레이어들에게 하등 쓸모없는 작업들이다. 하지만 영화는 그 쓸모없는 데이터들이 모여 온라인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곳은 디지털 데이터를 기반으로 창조된 또 하나의 세계이고, 그 위에 플레이어들이 참여하는 것에 가깝다. 선글라스를 쓰면 플레이어만 볼 수 있는 점수와 아이템들이 작동하는 것이 증강현실처럼 그려진다. 다시 말해 <프리 가이>의 디지털 세상은 게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창조된) 세계 위에서 플레이어들의 행위가 더해지는 방식이다. 그곳이 또 하나의 진실, 또 다른 세계라면 응당 사건(플레이)에 종속되지 않은 시간과 행위들이 존재해야 하고, <프리 가이>의 이야기는 바로 그 잉여로운 정보로부터 시작된다. 그리하여 디지털 인공지능들은 말한다. 자신들이 느끼는 이 정보의 조합들이 진짜가 아닐 이유가 어디에 있냐고. 20세기 포토그래픽 시네마들이 그토록 복원하려고 했던 사진적 영상의 모티브가 디지털 세계에서 의도치 않은 방식으로 꽃을 피운다.

물론 <프리 가이>는 거대한 철학적 기반으로 사유하는 종류의 영화는 아니다. 그럼에도 나는 이 영화에서 예기치 않은 균열을 발견한다. 어쩌면 영화의 경계가 무너지고 있는 지금, 나의 위기감으로부터 시작된 강박일지도 모른다. 영화가 보여주고자 하는 의도를 초과하여 멋대로 보고 싶은 것에만 돋보기를 들이민 것이라 해도 할 말이 없다. 오늘의 나는 <프리 가이>의 화사한 묵시록에서 공포와 가능성을 동시에 느낀다. 20세기 말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의 전환을 앞둔 시점에 나온 <매트릭스>가 묵시록에 관한 온갖 코드들을 믹스해 창조해낸 비전을 선보였다면, 20년이 지난 지금 <프리 가이>는 해맑아서 더 섬뜩한 방식으로 디지털 세계의 독립을 선언한다. 유행처럼 번지는 메타버스라는 용어의 핵심은 에테르와 디지털의 연결에 있다. 영화의 안과 바깥도 그런 식으로 연결될 것인가. 영화가 영화인 이유는 어떤 이유로든 스크린이라는 견고한 벽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게 연결된다면 영화의 자리는 어디가 될 것인가. 게임을 비롯한 여타 스토리텔링 영상콘텐츠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그 벽에 구멍을 내어 에테르 월드에 접속 중이다. 이런 상황에서 앞으로 영화이미지, 영화적 체험, 영화라는 장소는 어떤 방식으로 남을 수 있을 것인가. 어쩌면 지금 이 순간이야말로 영화의 교차점이자 분기점이며 새로운 시작점일지도 모르겠다. 불안하고 무섭고 동시에 설렌다.

ps. 한 가지 첨언하자면, 미래의 영화가 어찌 되든 솔직히 상관없다. 그건 그 때의 일이다. 가이의 식상한(그래서 언제나 올바른) 대사를 빌리자면, “좋은 날 말고, 최고의 날”은 언제나 오늘이니까. 당장은 오늘의 영화를 즐기는, 즐길 수 있는 걸로 족하다. 다시 돌아와 그게 굳이 <프리 가이>를 사사로운 리스트에 꼽은 이유이기도 하다. <프리 가이>를 놓고 이런 식의 망상마저 펼칠 수 있는 게 영화를 말하고 쓰는 작업의 특권이자 즐거움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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