틈과 빛에 관한 영화 <노매드랜드>에 대하여 노매드랜드, 2020

by.조지훈(무주산골영화제 프로그래머) 2022-01-03조회 1,715

2021년이 끝나갈 무렵에는 코로나19 발생 이전으로 돌아가지 않을까 하는 헛된 기대는 오미크론 변이 바이러스로 인한 확진자와 중증환자의 급증으로 산산이 깨졌다. 작년 연말이 돼서야, 이젠 2020년 2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완전히 다른 시대가 도래했다는 걸 확신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눈으로 보이는 세상의 풍경이 그렇게 달라진 건 아니다. 밤이 되면 사람들이 좀 덜 돌아다니고, 모두가 마스크를 쓰고 있긴 하지만 어딜 가든 조금만 유명한 곳들은 여전히 사람들로 북적인다. 하지만 극장의 풍경은 다르다. 코로나 상황 때문에 신작이 사라지기도 했지만, 잠시 활기를 띨 만하면 방역 조치가 강화되는 악순환이 2년째 반복되면서, 극장은 점점 조용해지고 있다. 이렇게 적은 관객들로 극장이 유지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들기도 한다. ‘영화론자’나 ‘영화주의자’들이 극장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극장에서 영화보는 일을 찬미하지만, 상상할 수도 없었던 극장의 죽음은 이젠 가까운 미래의 일이 되어버렸다. 관객이 사라진 조용하기도 스산하기도 한 극장에 갈 때마다 쓸쓸했다. 이 고요함 속에서 때론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고통은 늘 낮은 곳부터 고이므로 실질적 피해는 영화산업을 하부에서 받치고 있는 작은 회사들과 독립창작자들로부터 시작되고 있다. 극장에 갈 수 없는 관객에게는 OTT가 대안일 수 있겠지만, 산업 안에서 고통받는 이들에게도 거대 자본이 만들어낸 OTT는 대안이 될 수 있을까? 그래서였을 것이다. 올해의 사사로운 리스트에는 가급적 극장에서 보았던 영화들을 더 많이 포함시키고 싶었다.

올해에는 나의 2021년 사사로운 리스트 10편의 영화 중 클레이 자오의 <노매드랜드>에 대해 써보기로 마음먹었다. 이미 좋은 평론가들의 훌륭한 글에 더 보탤 말이 있을까 싶었지만 그래도 <노매드랜드>가 품고 있는 고통과 아름다움에 대해 몇 마디 더하고 싶었다. 무엇보다 극장에서 본 영화였고, 올해 본 영화 중 가장 마음 깊숙한 곳을 건드린 영화였다. 그럼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노매드’는 누구인가?
영화 <노매드랜드 Nomadland>의 제목은 떠돌이, 뜨내기, 부랑자, 정착하지 못하는 자, 유목민, 유랑자, 방랑자 등등의 뜻을 가진 ‘Nomad’와 땅 또는 지역이라는 뜻의 ‘Land’가 합쳐진 단어인데, 원작도 같은 제목이다. 그런데 저널리스트 제시카 브루더가 쓴 이 원작 논픽션에는 부제가 달려 있다. “21세기 미국에서 살아남기 Surviving America in the Twenty-First Century.” 그는 2014년 하퍼스 매거진에 ‘은퇴의 종말: 노동을 그만둔 삶을 감당할 수 없어질 때’라는 제목의 글을 기고했다. 이 글은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이후 글을 읽고 감동 받은 주변 사람들의 권유로 「노매드랜드」를 출간했다.

여기서 ‘노매드’는 ‘노매드 노동자’, 혹은 ‘워캠퍼(workapmer = work+camper)’라고 불리는 사람들을 말한다. 이들은 2007년과 2008년 사이 발생한 서브프라임모기지 사태로 인해 미국 사회에 새롭게 등장했다. 주로 이 시기에 평생에 걸쳐 쌓아온 경제적 기반을 잃어버린 은퇴자들인데, 전통적인 형태의 벽과 기둥으로 된 집을 포기함으로써 집세와 주택담보대출금의 족쇄를 끊어버린 사람들이다. 이들은 밴과 RV, 트레일러를 집 삼아 좋은 날씨를 따라 단기 일자리에서 다른 단기 일자리로 이동하면서 이곳저곳을 여행하고, 계절에 맞는 노동을 통해 생계를 유지한다. 물론 이들이 단지 경제적인 어려움만으로 떠밀리듯 이런 삶을 선택한 건 아니다. ‘노매드’로서의 삶은 은퇴 후의 경제적 불안을 해결하기 위해 스스로 선택한 삶의 방식이고, 이런 삶을 유지하기 위해 비슷한 처지의 ‘노매드’들끼리 적극적으로 연대하기도 한다. 저자 제시카는 2014년부터 무려 3년 동안 실제 RV에서 살면서 ‘노매드’들을 따라 약 2만 4천 킬로미터를 이동하면서 이 책을 완성했다.
 

 
클레이 자오의 영화와 그의 세계
제시카의 시점으로 서술되는 원작에는 저자의 취재를 도와 노매드의 세계로 안내해주는 가이드 역할을 하는 인물이 등장한다. ‘린다 메이’라는 이름의 이 인물은 영화에도 같은 이름으로 직접 출연하는데, 영화에서도 남편을 잃고 고향을 떠난 펀(프란시스 맥도먼드)을 노매드의 세계로 안내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영화 <노매드랜드>의 제작자이기도 한 배우 프란시스 맥도먼드가 오래된 동료 제작자인 피터 스피어와 함께 이 책의 판권을 구입한 후 원작의 설정을 그대로 영화로 옮겼다면, 그 영화는 아마도 저자인 제시카나 린다 메이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노매드들의 일상을 따라가는, 그럼으로써 미국 사회의 또 다른 현실을 들여다보는 정치적이고 시사적이며, 고발적인 영화, 차갑고 딱딱하고 쓸쓸한 톤의 영화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프란시스 맥도먼드의 러브콜을 흔쾌히 받아들인 클레이 자오는 뻔하고 쉬운 길을 가지 않았다. 클레이 자오는 원작의 세 번째 챕터에 나오는 미국의 오래된 기업의존형 도시인 엠파이어를 고향으로 둔 ‘펀’이라는 인물을 새롭게 만들어냄으로써, 원작이 그려낸 부조리한 미국 사회를, 꿈과 결핍을 숙명처럼 안고 사는 사회적 약자들이 살고 있는 클레이 자오의 세계로 끌어들였다. 그리고는 자신만의 장기를 살려, 실제 ‘노매드’들을 영화에 출연시켜 자신의 삶에 대해 발언하게 함으로써, 원작의 르포르타주적인 면을 다큐멘터리적인 방식으로 영화화했다. <노매드랜드>는 마치 실제 ‘노매드랜드’라는 현실 속에 전문배우인 프란시스 맥도먼드와 데이빗 스트라탄을 투입하여 영화를 찍은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감독과 훈련된 전문 배우들은 노매드들의 진짜 이야기를 끌어내면서 함께 들어주고, 카메라에 담긴 이들의 이야기는 <노매드랜드>의 서사를 떠받치는 중요한 축이 되는 것이다. 이런 영화만들기 방식은 캐나다 퀘백 지역을 대표하는 드니 코테 감독이 2009년 연출한 다큐멘터리이자 극영화인 <카르카세스>를 떠올리게 한다. 이 영화에서 드니 코테는 수백 대의 자동차의 무덤에서 살아가는 한 노인의 집 마당에 4명의 다운증후군 아이들을 의도적으로 투입하여 서사에 긴장을 만들어냄으로써 서사를 진행시켰다. 클레이 자오 감독은 이처럼 자기만의 영화만들기 방식을 통해 다루는 주제와 소재, 인물과 사회적 맥락의 역학 관계에 대해 깊이 이해하는 한편, 어떤 영화에도 자신만의 스타일을 이식하고, 자신만의 인장을 찍어왔다.

그의 경력과 전작을 살펴보면 그는 정말 '이상하고 특별한' 감독이다. 그는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라지 않았으면서도 미국적 가치와 정서를 정확하게 꿰뚫고 있으며, 그걸 섬세하게 영화에 담아내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이 특별한 재능은 <노매드랜드>에서 정점을 찍었다. 1982년 베이징에서 태어난 그는 15살 때 영국으로 건너가 사립학교를 다니다가 미국에서 고등학교를 마쳤다. 그리고는 뉴욕대에서 영화를 전공하기 전 에밀리 디킨스의 모교였던 마운트 홀리오크 칼리지에서 정치학을 전공했다. 그는 자신의 정체성과 관련된 “도대체 왜 중국인들은 함께 모여 사는가?”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정치학을 시작했지만 그는 이 시기를 거치면서 미국 사회에 대해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장편 데뷔작 <내 형제가 가르쳐준 노래>(2015)와 두 번째 영화 <로데오 카우보이>(2017)를 연달아 만들었다. 배경, 인물, 주제, 배우, 연출방법 등 여러 가지 면에서 연작이나 다름없는 이 두 영화에는 클레이 자오의 영화 세계를 떠받치는 주요 특징들이 모두 담겨 있다.

장편 데뷔작 <Songs My Brother Taught Me>는 - 국내 포털에 <내 형제가 가르쳐 준 노래>라는 제목으로 올라가 있다. 그런데, 여기서 ‘Brother’는 ‘형제’가 아니라 ‘오빠’로 번역되는 것이 맞다. 이 영화가 국내에서 정식으로 상영된 후에 포털에 제목이 올라갔다면, 이 영화의 제목은 아마도 <오빠가 가르쳐준 노래>가 되었을 것이다. -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오빠와 여동생, 남매의 이야기다. 영화의 주인공은 사우스 다코타의 파인 릿지 인디언 보존지구에서 살고 있는 10대 소년 조니인데, 그는 졸업 후 여자친구와 함께 이곳을 떠나 LA에 가서 살고 싶어한다. 그러나 그의 발목을 잡는 건 자신을 의지하고 있는 여동생이다. 한편, 그로부터 2년 후 같은 지역에서 촬영된 두 번째 영화 <로데오 카우보이>의 주인공은 이제는 한물간 로데오를 사랑하는 브래디다. 그는 로데오 경기 중 치명적인 부상을 당한 후 가족을 위해 자신의 간절한 꿈을 포기하는데, 여기에도 핸디캡을 가진 여동생이 등장한다. 이 두 영화는 모두 가족 때문에 꿈을 포기하는 청년과 여동생으로 상징되는 가족, 그 상관관계에 대해 이야기한다. 너무나도 미국적인 이 두 편의 영화 속에 각기 다른 모습으로 등장하는 여동생은 마치 클레이 자오 감독처럼 느껴지는데, 감독은 이런 방식을 통해 그가 품었던 ‘가족주의’에 관한 질문과 그 답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영화에 담아낸다.
 

클레이 자오가 담아낸 노매드의 세계
클레이 자오가 <노매드랜드>에서 창조한 ‘펀’이라는 인물 역시 상실감과 결핍으로 가득한 삶을 사는 인물이다. 펀은 2편의 전작에서 창조한 두 청년과 여러모로 닮아있다. 남편을 잃은 ‘펀’은 마치 이들의 40년 또는 50년 후의 모습 같다. 꿈을 포기하고 가족을 선택한 이 두 청년들은 평생 결핍과 상실감은 숨겨둔 채 살다가, 가족마저 사라지면 그들의 어깨에는 허무함이 하나 더 얹어질 것이고, 결국 그들은 평생을 부유하듯 살게 될 것이다. 뗄 수 없는 결핍과 상실감을 숙명처럼 안고 살아가는 인물들은 <이터널스>에서도 변함없이 등장한다. 게이, 흑인, 애정 결핍, 치매, 청각 장애 등 너무 정치적이어서 오히려 재미없는 지경이 되어버린, 초능력과 함께 결핍을 부여받은 히어로들, 결국 지구인에 대한 애정으로 창조주를 배신한 그 히어로들은 영원히 상실감을 껴안고 살아갈 것이다. 클레이 자오의 세계에 존재하는 중요 인물들은 이런 상실감과 결핍으로 규정된다.

클레이 자오는 남편이 죽은 후 남편과 함께 살았던 하지만 이제 망해버린 엠파이어를 떠난 펀의 이야기, 그리고 펀이 길 위에서 만난 노매드 노동자들의 이야기, 이 두 개의 이야기를 교차시킨다. 그리고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결핍과 상실감을 표현하기 위해, 인물들의 상처와 고통을 어루만지는 도구로써, 미국 서부의 눈부시도록 쓸쓸하고 아름다운 실제 풍경을 영화 곳곳에 배치한다. 그는 이 풍경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 약 5개월간 25명의 스텝과 함께 일곱 개 주를 돌아다녔다. 하지만 이 영화는 이런 표현법 때문에 너무 낭만적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가능한 비판이겠지만, 기억할 것은 아무리 고단한 인생이라도 삶의 숨통을 띄워주는 낭만의 순간들을 에너지원 삼아 한발 한발 전진한다는 것이고, 또한, 항상 슬픈 표정으로 있어야만 피해자가 아니며, 가난하다고 해서 늘 고통받고 힘든 표정으로 사는 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늘 피해자에게는 피해자답기를 요구하고, 가난한 사람에게는 가난한 사람답기를 기대한다. 그렇게 살지 않으면, 그들이 진실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런 면에서 이 영화는 의도치 않게 사회가 약자와 피해자들에게 강요하는 이른바 ‘약자성’ 또는 ‘피해자성’의 문제를 끄집어낸다. 펀의 내면은 이미 황폐할 대로 황폐해졌고, 그는 생계를 유지할 충분한 돈도 없다. 그럼에도 그는 편하게 정착해 살 수 있는 기회를 거절하고 다시 길 위에 선다. 이제 길 위에서 살아야 하는 존재가 된 것이다. 따라서 그가 담담한 표정으로, 주어진 노동을 하고, 밴을 타고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차박’을 한다고 해서 그의 삶이 진실하지 않거나, 그가 고통스럽지 않은 건 아니다.
 

서부극으로써의 <노매드랜드>
영화를 보다가 이 영화의 장르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건 ‘펀’의 여동생이 던진 말 때문이다. 이해할 수 없는 삶을 사는 언니를 방어해주기 위해 동생은 이렇게 말한다. “노매드들이 하는 일은 개척자들이 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해요. 난 펀이 미국 전통의 일부라고 생각해요.” 이 말은 이 영화를 자연스럽게 서부극과 연결시킨다. 이미 클레이 자오는 서부극으로 유명해졌다. 그의 두 번째 영화 <로데오 카우보이>가 공개된 후 언론은 이 영화를 ‘웨스턴’ 장르로 이해했고, 인디와이어는 이 영화에 대해 ‘한 중국 이민자 출신의 영화감독이 미국의 가장 오래된 장르(웨스턴)를 혁신적으로 바꾸어냈다’고 평했다. 실제로 클레이 자오 감독은 <노매드랜드>에서도 웨스턴을 염두에 두었다. 그는 <이터널스> 전까지 자신의 모든 영화를 촬영했던 촬영감독 조슈아 제임스 리처드와 함께 <노매드랜드>를 촬영하면서 몇 가지 원칙을 정했다. ‘펀’이라는 인물은 결국 집을 떠나 황야로 걸어 들어가는 존 웨인의 현대적인 캐릭터이어야 하고, 존 포드의 고전 영화를 시작과 끝에 등장하는 쇼트들이 영화의 시작과 끝에 배치되어야 한다고. 이렇게 해야 그들이 살고 있는 세계에 포획된 한 인물을 제대로 그려낼 수 있다 생각했다.

그러나 서부극에 등장하는 서부개척자들 또는 영웅들과 노매드들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서부극의 인물들은 도착과 정착을 원하지만, 노매드들은 떠남과 방랑을 원한다. 서부극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집과 마을을 지을 장소를 향해 전진한다. 그들은 항상 수평선을 향해 걸어가고, 그 너머에 있는 것을 궁금해한다. 하지만 <노매드랜드>의 노매드들은 정착했던 곳을 떠남으로써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들은 수평선을 향해 가지만, 그 너머를 궁금해하지 않는다. 그들의 집은 길이다. ‘펀’이 분명하게 말했던대로 그들은 houseless지만 homeless는 아닌 것이다.
 

로드무비로써의 <노매드랜드>
그러므로 <노매드랜드>의 인물들은 정착하고 머물던 곳을 떠나 길 위에 선다는 점에서 보면 이 영화는 서부극이라기보다 오히려 로드무비라고 하는 게 맞을지도 모르겠다. 일반적으로 서부극은 마지막에 갈등이 해결되고, 로드무비는 끝날 때 목적지에 도착한다. 그 과정에서 인물은 변화하고 성장한다. 그런 면에서 태반의 로드무비는 성장영화와 동의어다. 하지만 <노매드랜드>는 이런 일반적인 로드무비와 다르다. <노매드랜드>의 펀은 길 위에 있지만, 목적이 없다. 그는 생존을 위해 길을 선택한 자다. 그의 목적은 방랑이다. 그래서 그는 정착을 두려워한다. 그는 영화 속에서 두 번씩이나 정착할 기회를 얻는다. 한번은 여동생에게서, 한번은 남자친구에게서, 그러나 그는 편안한 침대를 뒤로 한 채 집을 나선다. 모두가 이런 삶을 이해할 수 없겠지만, 사실 마음의 불편함을 해소하기 일부러 육체적 불편함을 선택하는 일은 그렇게 낯설거나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이 영화는 몬티 헬만의 마스터피스 <자유의 이차선>의 낭만주의 버전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1968년 파격적인 결말을 담은 전설적인 로드무비 <이지라이더>가 세상에 나온 지 3년 만에 나온 이 영화는 건조하고 불친절하지만 도전적인 로드무비이면서 <이지라이더>보다 훨씬 더 파격적인 결말을 가진 영화다. 몬티 헬만의 최고 걸작이며, 영화사에서도 <분노의 총성>과 함께 종종 언급되는 영화다. 로드 무비의 장르적 컨벤션을 전복시키는 이 영화는 제대로 된 이름도 부여받지 못한 인물들이 왜 차를 집처럼 여기면서, 자신의 모든 걸 걸고 끊임없이 자동차 경주를 하면서 앞으로만 달리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그들은 끊임없이 질주한다. 목적지가 동부인 것 같지만, 왜 거기까지 가야 하는지 아무도 모른다. 이유 따윈 중요하지 않다. <자유의 이차선>이 내재하고 있는 주제는 이렇게 <노매드랜드>의 주제와 연결된다. 그리고 이 두 영화 모두 어딘가를 향해 달리는 차의 이미지로 끝이 난다. 물론 <자유의 이차선>이 한 발 더 나아가지만, 목적과 목적지 없이, 오직 차로 달리는 것만이 목표인 로드무비는 50년 후에 한 이방인 출신의 미국 감독의 손을 통해 환생했다. 물질적 풍요 속에서 격변의 60년대를 방황하던 <자유의 이차선>의 이름 없는 젊은이들은 50년 후 <노매드랜드>에 이르러 경제적으로 파산한 ‘노매드’의 모습으로 다시 길 위에 선 것이다.
 

“어디에나 틈은 있어. 빛은 그 틈을 통해 들어오지“
제시카 부르너의 <노매드랜드>의 원작 첫 장에는 레너드 코먼의 문구가 써 있다. "어디에나 틈은 있어. 빛은 그 틈을 통해 들어오지." 클레이 자오의 <노매드랜드>는 원작을 클레오 자오의 방식으로 변주한 영화지만, 원작과 마찬가지로 ‘틈과 빛’에 관해 이야기한다. 자본주의의 틈에 끼어 옴짝달싹 못 하게 된 사람들이, 자본주의의 세상을 살아내기 위해, 집이 아닌 길을, 정착이 아닌 방랑을 선택한 자들에 관한 영화. 그‘노매드’들이 틈을 통해 들어오는 빛을 찾아가는 영화다. 이 영화가 아름다운 건 단순히 사회적 약자를 따뜻하게 그려냈다거나, 눈부신 미국 서부의 풍경 때문이 아니다. 살아갈 이유가 사라져버린 희망 없는 인생도 살아낼 수 있는 세계, 동산과 부동산으로 이루어진 자본주의 시스템 밖에서도 가능한 삶이 존재하는 세계, 전통적인 사회적 통념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의 존재를 정치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긍정했기 때문이다. 이 아름답고 쓸쓸한 세계에선 가족을 지키기 위해 돌아오고(오빠가 가르쳐 준 노래), 결국 가족을 위해 꿈을 포기하며(로데오 카우보이), 살기 위해 길 위에서 노동을 하고(노매드랜드), 각자 결핍을 가진 초능력자들이 사랑 때문에 창조주(부모)의 명령을 거부한다.(이터널스). 이렇게 클레이 자오의 세계 속에는 꿈 같은 거 없이 상실감과 결핍 속에서 허덕이면서도 존엄한 인물들이 살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좁은 틈으로 비치는 한 줄기 빛을 바라보고 있다.

초기화면 설정

초기화면 설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