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버세이션 김덕중, 2021

by.이용철(영화평론가) 2021-12-21조회 3,094
*영화의 전개 과정을 마구마구 적어놓은 글입니다. 딱히 반전이 있는 영화는 아니지만, 영화를 아직 보지 않은 분은 나중에 읽는 게 낫겠습니다. 

<에듀케이션>을 보면서 따로 제목의 의미를 깊이 생각하지는 않았다. 교육에 관한 영화? 그렇게 읽으면 좀 웃겨지지 않나. 그런데 김덕중이 만든 두 번째 장편의 제목이 <컨버세이션>이니까 제목을 유심히 보게 된다. 이 감독이 제목에 영어 한 단어를 계속 붙이는 이유는 뭘까. 생각만 계속하니 제목의 굴레에서 벗어나기가 힘들었다. <컨버세이션>은 대화에 관한 영화일까? 그래서 대화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게 되고, 대화하는 내용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굴레가 덫이 되고, 대화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거나 들리지 않고, 이상한 지경에 빠졌다. 기억해 보니 이 영화를 여러 번 본 것도 아니고, 딱 한 번 봤을 따름이다. 그런데 그들의 대화의 경연에 여러 차례, 그것도 줄곧 눈과 귀를 대고 있다는 착각까지 일어난다. 이건 무슨 주술 같은 것에 빠진 건가. 슬슬 피곤함이 몰려와 영화에 대해, 정확하게는 그들의 대화에 대해 생각하기를 멈추기로 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날 즈음 나는 다시 이 영화를 꺼냈다.

<컨버세이션>은 대화에 관한 영화다, 이런! 역시나 나는 같은 생각으로 이 글을 쓰고 있다. 사람의 목소리로 페이드인하면, 세 명의 여자 – 은영, 명숙, 다혜가 웃으면서 대화를 나누는 중이다. 환한 햇살이 그들 사이로 비친다. 아무리 봐도 나이 차가 나 보이는데, 그들은 친구처럼 말을 놓는다. 대화의 내용으로 미뤄 그들은 모두 파리에서 유학하며 살았던 모양이다. 그들의 대화 내용을 만약 프랑스인이 듣는다면 콤플렉스에 빠진 아시아인이라고 코웃음 칠 테고, 한국인이나 아시아인이 듣는다면 별로 친근하게 지내고 싶지 않은 재수 없는 인간이라고 흉볼 것 같다. 10분이 지나고, 다음 장면에서 명숙과 다혜가 어둑어둑해진 아파트 비상계단에서 담배를 피우며 대화한다. 대화 속 관계의 영역이 더 넓어지는데, 한 번 박인 밉상의 인이 더 깊어진 탓인지 특히 명숙과 다혜에 대한 비호감은 좀체 회복되지 않는다. 대화를 마치고 은영의 집으로 되돌아가려고 할 때, 비상문이 열리지 않아 추위에 떠는 모습을 보면서 깨소금 맛이라고 여기면서도 미안하지 않다. 다음 장면은, 술에 취한 은영이 택시를 타고 어디론가 이동하는 걸 보여주는데, 앞선 장면과 시간상 연결이 되지 않는다. 기사와의 대화 내용으로 보아 프랑스로 떠나기 전날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이어지는 장면에서는 은영과 명숙이 프랑스의 한 카페에서 대화를 나누다 성가신 상황을 겪고, 다음 장면은 다시 현재(대화 도중 ‘한남’이란 단어가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로 돌아와 한밤에 은영과 두 친구가 대화하는 모습을 담는다. 첫 시퀀스에서 대화의 주제로 나온 대로 그들은 프랑스어로 이야기하기를 시도한다. 은영은 곁에 있는 아기가 깨지 않도록 신경이 쓰인다.
 

<컨버세이션>은 챕터로 나뉜 영화가 아니지만, 인물이 들어가고 나가는 시점을 기준으로 편의상 몇 개의 장으로 구분할 수 있다. 44분까지 전개되는 첫 번째 챕터는 은영을 중심으로 흘러간다. 사건이랄 게 없거니와 이야기를 들려주는 방식도 친절하지는 않다. 한 예로, 이 챕터는 대략 다섯 개의 시퀀스로 이루어져 있는데, 쇼트의 숫자로 쳐도 여섯 개에 불과하다. 두 개의 쇼트로 이뤄진 첫 시퀀스를 빼면, 전부 하나의 쇼트로 하나의 시퀀스가 구성되며, 제목 그대로 대화하는 모습만을 기록하고 있어서 정적이란 인상을 준다. 압권은 제일 긴 쇼트인 택시 내부 장면이다. 은영과 기사의 대화가 주 내용인데, 영화는 오직 은영만을 보여준다. 나는 화면 바깥에 있는 기사의 모습을 10분 넘도록 상상만 해야 한다. 현재의 어느 하루의 낮, 저녁, 밤 시퀀스와, 그 사이에 낀 과거의 두 시퀀스가 부드럽게 연결된 편도 아니다. 시간과 시간이 불쑥 드나드는 까닭에, 과거의 장면이 현재를 설명해 주지도 않는다. 이러한 특징들이 평범한 영화는 아니라는 판단을 하게 하지만, 온갖 괴상한 영화가 설쳐대는 요즘에 <컨버세이션>의 형식이 유달리 신선하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택시 장면에서 문득 설렘을 느꼈으나, 첫 번째 챕터가 끝날 때까지 나는 <컨버세이션>에 깊이 빠져들지는 않았다. <에듀케이션>을 만든 영민한 감독의 소포모어징크스인가, 그런 생각만 했더랬다.

감기려고 하던 눈이 반짝 떠진 것은 44분까지의 은영 챕터가 끝나고, 갑자기 낯선 인물들로 두 번째 장이 시작될 무렵이었다. 이때부터 한동안 은영은 스크린 밖으로 사라져 나오지 않는다. 여기선 승진과 필재의 씁쓸한 사랑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렇다면 은영이 나중에 그들 사이로 어떻게 들어온단 말인가. <컨버세이션>은 별개의 이야기로 나뉜 옴니버스영화일까. 그런저런 예상을 하면서 영화를 보게 된다. 첫 장의 스타일은 이후에도 바뀌지 않는다. 쇼트의 길이는 길고, 인물(의 관계)에 대한 설명이라곤 없으며, 시간과 시간 사이로 갑자기 그와 그녀가, 그와 그녀의 이야기가 들어왔다 나간다.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바깥 공간의 개입에서 비롯되는데, 첫 장에서 갇혀 있던, 그래서 움직이지 않고 입으로만 대화하던 인물들이 바깥의 공간에서 움직인다는 점이다. 두 번째 장의 인물인 승진과 필재는 대화하면서 움직이는 존재다. 승진이 “걸을까”라고 말한 뒤 유모차를 끌며 앞장서 걸으면, 필재가 그를 따라 공원 한 귀퉁이를 도는 장면이 그러하다. 몸의 움직임과 함께 대화가 끌려 나오고, 그들은 원래 위치로 돌아온다. 그리고 다시 움직인다. 이러한 신체의 움직임은 인물의 변화를 보여주면서 동시에, 대화에 에너지를 부여한다. ‘인물이 느끼는 감정, 인물 관계의 변화’ 같은 것들에 대화가 어떻게 관여하는가, 그것이 신기하게 눈에 조금씩 들어오기 시작한다.
 

과거는 기억 속에서 미화될 가능성이 높다. 현재와 과거를 오가는 이런 작품에선 더욱 그러하다. 첫 번째 장에서 은영이 딸 라온을 둔 시점을 현재로 상정한다면, 이후에 튀어나오는 것들은 대부분 과거의 언제일 확률이 높은데, 묘하게도 과거의 어떤 이미지들이 뜻 모를 아름다움을 제공한다. 어느 날 밤, 집 앞에 차를 주차하지 못한 필재가 좁은 공간을 배회하는 장면이 그 중 하나다. 그는 차를 몰고 어디를 다녀온 길일까, 골목을 왔다갔다 하면서 그는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이 장면은 저 뒤에 나올 열차 장면과 쌍을 이룬다. KTX 안, 아마도 필재와 만나고 돌아오는 길인 듯한 승진은 종이를 꺼내 편지를 쓴다. 그의 말대로 그건 아주 슬픈 편지다. 골목을 오가던 필재는 그런 편지를 받을 줄 모르고 있을 테지. 그런저런 생각들로 두 개의 이미지를 엮는 일은 곧 ‘애통의 미를 관조’하는 것을 뜻한다. 마찬가지로 아름답지만, 다른 정서와 마주하게 하는 장면은 승진과 필재가 버스킹을 구경할 때다. 여기서도 공연하는 가수는 화면 밖에서 목소리만 들려줄 뿐, 나는 승진과 필재만 쳐다볼 수 있다. 무심한 듯 앉은 필재에 비해, 승진의 앉은 자세는 어딘가 어색하다. 그는 안절부절못한다. 마침내 뒤로 누운 그의 손길은 가슴 속에서 주문하는 행동을 옮기지 못해 허공을 맴돈다. 짧은 아스라함이지만, 나는 이 장면에서 <모리스>를 처음 보았을 때의 감정이 전달됨을 느꼈다. 이 장면과, 승진과 은영이 산행에 나선 마지막 시퀀스는 대구를 이룬다. 앞선 장면과 달리, 승진의 태도는 자연스럽고 대담하다. 앞의 버스킹 장면이 있기에, 산행 장면의 승진을 보며 나는 미소 지을 수 있는 것이다. 그 사이에 놓인 열차 장면이 승진에게 어떤 확신을 준 것일까, 이 영화의 대다수 장면이 그러하듯 ‘그렇다’고 나는 확신하지 못한다. 

어쨌든 <컨버세이션>의 인물들은 적절한 단어와 몸짓을 갈구한다. 자기 마음속 어떤 감정을 표현할 단어가 쉬 떠오르지 않아, 그것을 마음껏 밖으로 내뱉지 못해 답답해할 때도 있다. 현재의 은영은 결혼과 출산 이후 외로움을 느끼는 것 같다. 남편과의 관계에서 사랑의 감정이 충만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컨버세이션>은 어쩌면 그런 그녀의 감정이 찾아 나선 시간의 해법에 대한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시간이 돌고 돌아 그녀는 끝내 산행에 나섰던 그 날로 되돌아간다. 은영과 승진은 여전히 해야 할 말과,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꺼내지 못하고, 그들의 대화는 다시 한 번 엇갈린다. “말을 해야 진짜인지 가짜인지 안다”고 자신 넘치게 말했던 은영은 “내가 너 사랑한다”는 승진의 말에 말문이 막힌다. 대화의 영화에서 말문이 막히는 순간이 그렇게 오지만, <컨버세이션>은 그 대화의 끝에서 풍성함을 거둔다. 흡사 영화 내내 쏟아져 나오던 수많은 단어들이 하나의 순간을 위해 달려가는 양, 이리저리 맞서고 뒤엉켜 싸우던 감정의 선들이 대화의 결을 따라 정리된다. 하나의 원이 완성되는 순간, 하지만 이것은 진실과는 또 다른 문제다. 버스킹 장면의 승진이 산행 장면의 승진보다 덜 혹은 더 진실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다만, 그들의 관계가 커다란 원을 돌아 하나의 지점에 도착했다는 점에서 나는 그들의 대화가 진실한 것 ‘같다’고 생각했다. 승진이 편지에 썼던 것처럼, 우리는 맞는 길을 걷는 게 아니라, 각자 맞다고 생각하는 대로 사는 것이며, 산행에서 돌아오는 그 순간에 은영과 승진은 적어도 맞다고 여긴 길을 선택했을 것이다.
 

대화의 영화라는 점에서 <컨버세이션>은 대화가 주를 이루는 몇몇 프랑스 영화와 근친 관계를 맺는다. 근래 등장한 프랑스 영화 중에 대화가 중심에 선 작품으로 <러브 어페어: 우리가 말하는 것, 우리가 하는 것>이 있다. 그런데 <러브 어페어>의 대화와 <컨버세이션>의 그것은 다르다. <러브 어페어>는, 남자와 여자가 서로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를 빌려 대화하는 형식의 영화다. 여기서 대화는 구애의 방식이다. 누군가의 비밀을 전달하는 것처럼 대화하면서 남자와 여자는 서로의 감정 속으로 접근하고, 그러한 접근은 결국 두 사람의 관계로 매듭지어진다. 대화는 직접적으로 인물과 인물에게 영향을 주는 수단이며, 진실의 여부와 상관없이 이야기라는 형식을 빌린다는 점에서 다른 영화와 차별화된다. <컨버세이션>에서 은영과 승진이, 혹은 그들이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대화는 시간 순서대로 배치되지 않는다. 이 말인즉 그들의 대화는 이후의 감정에 어떤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영화의 엔딩에서 은영과 승진은 곧장 맺어질 듯이 대화와 감정의 연결점을 취하지만, 그것은 이미 흘러간 몇 년 전의 한 장면에 불과하다. 즉, 이 영화의 엔딩에서 벌어지는 대화의 손길은, 영화의 첫 번째 장에서 부부의 애정을 절감하는 은영에게 직접적인 은혜의 영향을 미칠 수 없다. 만약 그랬다면 은영은 현재의 외로움을 조금은 달랠 수 있을 테지만, 그것은 자기 영역 밖의 일이다. 현재의 은영은 여전히 외로운 아내일 것이다. 다른 사람과 상담할 때는 이런저런 조언을 풀어놓는 그지만, 정작 그 자신의 답은 찾지 못할 것이다. 영화가, 아니면 김덕중이, 그들 – 은영과 승진이 산을 찾아 대화를 나누었던 어떤 시간을 찾아간 것이지, 현재의 은영이란 인물이 과거 어느 시점의 자기 대화를 찾아낸 게 아니라는 말이다. 엔딩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무엇이라 설명하든 – 진실이든 풍성함이든 찬란함이든 신비함이든 농담이든 – 그것은 은영이란 인물과 직접적인 상관이 없으며, 굳이 말하자면 영화가 창조해낸 어떤 것이라고 보는 게 맞다. 그러므로 은영에 대해 안타까워할 이유 또한 없다.

누군가 <러브 어페어>의 리뷰에서 알랭 레네가 연상된다고 써놓은 것을 읽었다. 글쎄다, 레네가 영화적 생명의 중후기에 쌓아 올린 형식적인 경지를 감안한다면, <러브 어페어>보다 <컨버세이션>을 들이미는 게 더 적합해 보인다. 예를 들어, <스모킹 노스모킹>에서 각 인물이 어떤 것을 선택하고 어떻게 말하느냐, 에 따라 알 수 없는 수많은 결과를 낳는 것과, 이런 길과 저런 길을 오가는 은영과 승진의 삶의 양태가 닮아도 더 닮았다. 김덕중은 대화에 관한 영화로 <컨버세이션>을 만든 것처럼 보이지만, 기실 그가 완성한 것은 ‘대화의 영화, 영화의 대화, 대화의 작동 원리’에 대해 고심한 결과물로서의 영화다. 나는 말장난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앞서 말했던 공원 장면에서, 승진이 물었다. “그래서 애수가 뭔데?” 필재가 대답했다. “슬픔과 비슷한 건데 설명하긴 어려워” 나중에 승진은 또 말한다. “너도 애 생기잖아, 아마 애수가 철철 넘쳐흐를걸?” 대화가 다 풀어놓지 못하는 것, 그것을 기어코 대화를 통해 이뤄내도록 창조해내는 것, 그것이 곧 인물의 관계를 만들어내고, 이윽고 인물이 대화를 통해 도달한 미지의 공간이 <컨버세이션>이다. 어느 날, 김덕중 앞으로 은영이란 인물이 도착한다. 프랑스 유학을 다녀온 그는 결혼해 딸 하나를 두었다. 겉도는 친구들의 대화 속에서 유일하게 자기의 외로움을 솔직하게 털어놓는 사람이 그다. 김덕중은 다른 시간의 레이어에 놓인 그를 상상한다. 때론 그를 시간 밖으로 내던지기도 한다. 그가 부재하는 시간 동안, 그와 인연을 맺을 다른 사람들의 레이어가 겹겹이 쌓이다, 다시 은영의 레이어와 교차한다. 다른 시간과 다른 공간 속에서 다른 머리를 하고 다른 옷을 입은 여러 은영과 여러 승진이 그 사이를 떠돈다. 그 작업을 통해 김덕중은 은영에게 하나의 순간이 될 시간과, 그 시간의 대화를 빚어낸다. 현재에서 과거의 가능한 결과를 찾아낸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지만, 그것이 영화에선 가능하다는 것을 김덕중은 영화적으로 설명하고 구현해 낸다. 어떤 서두름도 없어서 더욱 놀랍다. 

*무슨 까닭인지 글을 마칠 즈음 <스프링 피버>가 떠올랐다. 하지만 나는 두 영화를 비교하는 짓 따위는 하고 싶지 않다. 게다가 김덕중은 로예와 전혀 다른 감성의 감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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