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어 스트리트 시리즈 리 자니악, 2021

by.듀나(영화평론가) 2021-12-15조회 1,336

올해 리스트에 오른 영화 중 가장 개인적으로 와 닿았던 작품은 홍성은의 <혼자 사는 사람들>이다. 단지 내가 본 영화는 감독이 일반 관객들이 본 영화와 조금 다른 작품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아무래도 나는 주인공 진아가 누리는 삶의 방식이 교정되어야 할 사회문제라고 느끼지 않았으니까. 올해는 될 수 있는 한 아카데미상 후보들을 리스트에 올리지 않으려 했지만 샤카 킹의 <유다 그리고 블랙 메시아>가 가진 역사의 무게와 원초적인 비극성을 무시하고 넘어갈 수는 없었다. 구로사와 기요시의 <스파이의 아내>도 처참한 실제 역사를 담고 있는 작품이지만 고전 멜로드라마와 첩보물을 거쳐 펼치는 정교하고 장르 유희는 다른 의미로 매혹적이었다. 

이어지는 세 편은 판타지와 SF다.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의 <메모리아>가 SF, 그 중에서도 말이 되는 부류에 속한다고 하면 많이들 안 믿을 텐데, 사실이다. 여전히 벽의 페인트가 말라가는 걸 지켜보게 강요하는 거 같은 아트하우스영화 특유의 고집이 눈에 뜨이긴 하지만 보편적인 의미에서 재미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셀린 시아마의 <쁘띠(뜨) 마망>은 얼핏 보면 소박한 시간여행 판타지처럼 보이는 설정을 통해 삼대에 걸친 여자들의 관계를 새로운 평등성을 통해 다시 들여다 본 독특한 작품으로, 이 리스트에 오른 영화 중 내가 가장 많이 반복해 볼 영화가 될 것 같다. 데이비드 로어리의 <그린 나이트>는 아서왕 전설의 A24스러운 재해석으로, 아마 이 리스트의 영화들 중 ‘예술하는’ 것으로 <메모리아>와 경쟁할 수 있는 작품일 텐데, 그렇다고 해서 아서왕 전설의 아이돌을 시치미 뚝 떼고 잔인하게 놀려먹는 사디즘의 즐거움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나머지 영화는 모두 호러다. 단지 앞의 세 편은 장르호러를 의도한 작품은 아니다. 조지 A. 로메로의 <놀이공원>은 개신교 계열 단체의 주문을 받아 제작된 교육영화지만, 유명한 동네 사람이라고 해서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을 만든 사람에게 이런 영화를 맡기면 안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로, 이 영화가 출구 없는 악몽으로 그리는 노년의 삶은 심지어 좀비떼보다 무섭다. 에마 셀리그먼의 <시바 베이비>는 유대계 전통 장례식이라는, 우리에게 낯선 행사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막 졸업을 앞둔 여자 대학생의 주변에서 일가친척들이 만들어내는 시공간의 뒤틀림과 이 과정 중 발생하는 폐소공포증은 친숙하기 짝이 없다. 임신 주제의 영화가 바디 호러로 흐르는 건 흔하지만, 남궁선의 <십개월의 미래>는 여기에 임산부에 대한 한국사회의 덜떨어진 편견과 억압이 더해져서 <에일리언>보다 서너배는 더 무섭다. 대한민국의 출산율에 대해 알지도 못하면서 떠들어대는 인간들은 <시계태엽 오렌지>에 나오는 세뇌장치에 묶어놓고 이해가 될 때까지 이 영화를 반복 감상시켜야 한다. 슬프게도 그들 상당수는 시체가 될 때까지 의자에서 내려오지 못할 것이다. 아무리 정곡을 찌르는 예술작품이라도 모든 사람들을 이해시키지는 못한다.
 

이제 한 편 남았다. 사실은 세 편이다. 리 자니악의 <피어 스트리트: 1666>은 <피어 스트리트: 1994>, <피어 스트리트: 1978>로 이어지는 삼부작의 마지막편으로, 이 세 영화를 분리해 감상하는 건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넷플릭스는 이 영화들을 일주일에 한 편 간격으로 틀었는데, 그 때문에 이 작품을 보는 행위는 8,90년대에 유행했던 미국 미니시리즈의 ‘텔레비전 이벤트’ 감상과 비슷해졌다. 어차피 극장을 통한 적 없는 작품이니 세 영화를 그냥 한 편의 미니시리즈로 보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 원래 의도는 한 달 간격으로 개봉되는 극장용 영화 시리즈였다고 하지만.

예고편만 보면 큰 기대가 안 생긴다. 그냥 예쁘장한 틴에이저들과 연쇄살인마를 한군데 모아놓고 다양한 방식으로 죽은 시체들을 쌓는 놀이를 하는 복고풍의 슬래셔 영화인가? 틀린 설명은 아니다. 그리고 첫 편의 도입부를 보면 좋지 않은 의미로 어리둥절해진다. 잘 만들긴 했는데, 굳이 저렇게까지 성실하게 웨스 크레이븐의 <스크림> 도입부를 재구성할 필요가 있을까? 심지어 <스크림>은 이미 메타 호러인데 여기에 새 레이어를 얹는 게 무슨 의미가 있지?
 

설정과 맥락을 설명해보자. <피어 스트리트> 시리즈의 원작은 어린이 대상 호러물인 <구스범스> 시리즈의 R.L. 스타인이 청소년 대상으로 쓴 동명 호러 시리즈다. 셰이드사이드라는 가상의 마을을 배경으로 하고 주인공들은 책마다 바뀌며 폭력의 강도는 <구스범스>보다 높다고 한다. 자니악의 시리즈는 셰이드사이드라는 마을, 피어와 구드라는 가문명을 가져왔지만 이야기 자체는 오리지널이다. 셰이드사이드에 대응하는 부촌인 서니베일 역시 시리즈의 창작이다. 서니베일은 <버피> 시리즈의 무대인 서니데일을 연상시키는 이름인데, <버피> 역시 <스크림>만큼이나 이 시리즈에 뚜렷한 발톱자국을 남긴 작품이다. 둘 다 기존장르를 재해석하고 비트는 메타 호러에 속해있기도 하고.

시리즈의 주인공인 디나는 <스크림>보다는 <버피>에 가까운 인물이다. 셰이드사이드 고등학교의 밴드 멤버이고 동성애자, 흑백혼혈이다. 당연히 자신도, 도시전설에 미친 동생 조시도, 마약쟁이인 불량청소년 친구들도 모두 아웃사이더다. 여자친구 샘이 재혼한 엄마를 따라 부촌인 서니베일로 갔기 때문에 디나의 삶은 더 끔찍해졌다. 그런데 전설의 마녀 사라 피어의 저주에 걸린 것처럼 보이는 평범한 사람들이 살인마로 변신하고, 디나 일당은 이들에게 쫓기게 된다.
 

일단 <피어 스트리트 파트: 1994>를 다 보면 잘 만들었다는 생각이 든다. 도입부는 여전히 <스크림>을 지나치게 흉내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정통적으로 보이는 슬래셔의 스토리를 따라가는 동안에도 이 영화가 어떤 게임을 하고 있는지 완전히 감이 오지 않는다. 영화가 삼부작을 염두에 두고 구성되어 있어서 독립된 영화의 무게중심이 관객들의 예상과는 다른 위치에 놓여있고 그 때문에 늘 기대와는 어긋난 방향으로 흐르는 것이다. 폭력의 정도와 살생부의 선정도 예측하기 어렵다. 다음 편의 예고도 예측에 별 도움을 주지 않는다. 영화들이 계속 과거로 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피어 스트리트: 1978>로 시리즈가 이어지면서 영화의 계산이 드러난다. <피어 스트리트>는 ‘진지하다’. 이 영화가 모델로 삼은 <스크림>과 7,80년대 슬래셔 장르의 관계를 보자. <스크림>의 영화광들에게 슬래셔 영화의 살인은 게으른 창작자들이 반복되는 클리셰들을 갖고 만든 어처구니 없고 대충 공허한 이야기의 일부로, 이들을 모방한 영화 속 연쇄살인 역시 잔인무도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얄팍한 게임이다. 하지만 자니악은 비슷한 구성을 따르는 것처럼 보이는 시리즈 영화를 만들면서 이 허구와 현실 사이의 벽을 치워버린다. <피어 스트리트: 1994>에서 일어난 사건 일부를 설명하는 <피어 스트리트: 1978>의 사건은 여름 캠프와 연쇄살인마가 나오는 익숙한 슬래셔 영화의 공식을 따르는 것처럼 보이지만 <피어 스트리트: 1994>의 우주에서 실제로 일어났다. 그리고 우리가 <피어 스트리트: 1994>를 통해 이미 연쇄살인마에게 살해당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신디는 극중 내내 놀랄만큼 생생하게 살아있는 인물로 존재한다. <피어 스트리트> 시리즈를 구성하는 재료들은 대부분 호러 관습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이는 주인공들의 진지함과 입체성을 막지는 못한다.
 

<피어 스트리트: 1666>에서 시리즈의 야심은 심지어 더 커진다. 시리즈 설정의 기원을 파기 위해 북미 대륙 개척시대로 시간여행한 이 영화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지는 사실 대충 짐작은 간다. 사회적 소수자인 여자아이가 주인공인 이야기가 17세기 미대륙에서 일어난 마녀 사건과 연결된다면 그 마녀는 역사가 말하는 것과 다른 사람이고 다른 일을 겪었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영화는 디나와 사라 피어의 소수성을 연결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미국 건국역사 전체를 재검토한다. 허울좋은 공정의 판타지는 파괴되고 수백년에 걸친 차별의 구조가 드러난다. 그리고 주인공들은 온몸으로 이에 맞서 싸운다.

천진난만하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무리 호러 관습으로 이루어진 단순한 세계 속 이야기라고 해도, 그 안에서 자신과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청소년들을 보고 냉소하는 건 유치한 일이다. 그리고 부끄러움 없는 진지함 속에서 영화의 공포, 로맨스, 액션, 드라마는 모두 강렬한 힘을 얻는다. 그 결과물은 놀랄만큼 정통적으로 재미있는 오락물이다. 우리가 할리우드에서 기대하는 게 바로 이런 게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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