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네트 레오 까락스, 2021

by.김병규(영화평론가) 2021-12-06조회 5,056

아네트는 두 발로 걷지 못한다. 침대에 혼자 남겨진 앤(마리옹 코티아르)의 방문을 열고 들어오면서 몇 걸음 걸어오다가 쓰러지고 만다. 앤이 “그대로 계속 걸으렴, 한발 한발씩”이라 격려의 노래를 부르지만 결국 실패한다. 걷지 못하는 대신 아네트는 침대에 눕거나 바닥에 앉아 있고, 이동이 불가피한 상황에서는 누군가에게 안겨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눕거나 앉을 수 없는 무대 위에서는 차라리 중력을 거슬러 공중에 떠오른다. 레오스 카락스는 <아네트>에서 앤과 헨리 사이에 태어난 어린아이 아네트를 마리오네트 인형으로 표현했다. 단순히 촬영하는 데 있어서 실제 어린아이 배우가 노래하고 연기하는 것보다 수월하다는 이유로 결정된 선택은 아닐 것이다. 인형이라는 소품의 의미를 짚어볼 수도 있을 테지만, 그보다 물리적인 차원에서 아네트가 영화에 부여하는 조건을 말해보고 싶다. 흥미로운 것은, 인간처럼 두 발로 걷지 않는 마리오네트 피사체가 필연적으로 불러오는 화면의 부자유이기 때문이다. 

말과 걸음이 금지된 마리오네트 인형이 이야기의 중심에 배치되면서 영화는 불가피하게 숏의 형식을 전환한다. 설계된 장면의 동선을 교정하고, 공간과 다른 공간을 비약적으로 결합하게 된다. 이제 <아네트>의 인물들은 하나의 장면 안에서 자유롭게 말하고 행동하지 않는다. 멈춰 서서 침묵하는 아네트를 품에 안거나, 그녀가 노래하는 모습을 바라보고 반응할 따름이다. 아네트가 닫힌 입을 열고 노래할 때까지 막연히 기다릴 수밖에 없는 영화의 마지막 공연에서처럼 말이다. 녹음실에서 시작해 한밤의 거리까지 이어지는 첫 장면에서의 연속적인 롱테이크는 성립되지 않는다. 앤과 헨리가 바이크를 타고 도로를 이동하는 매혹적인 순간도 마찬가지다. 앤의 죽음으로 경찰 조사를 받던 헨리의 거짓 변명은 이런 차원에서 의미심장한데, 아네트를 두고 다른 곳으로 갈 수 없었다는 그의 말은 영화 전체에 드리워진 역학적인 층위의 속박처럼 들린다. 아네트가 머무는 자리에서 영화는 벗어날 수 없다. 이 마리오네트 인형을 주시하기 시작하면서, <아네트>를 관류하던 통상적인 영화의 규칙은 위태롭게 흔들린다. 아네트라는 인형극의 기호가 실사 영화의 세계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한몸을 이루며, 두 인물이 대화하고 움직이고 행동을 주고받는 통상적인 화면의 규범에서 벗어난 영화의 논리를 요구하는 것이다. 

아네트가 처음으로 무대에서 공연하는 장면을 떠올려본다. 이 마리오네트 인형은 고정된 기반(Grund) 위에 발을 디디는 대신 바닥없는 심연(Ab-grund)을 날아다니면서 노래를 부른다. 좌표를 가늠할 수 없는 암흑 속에서 빛을 발하며 부유하는 아네트의 움직임은 기존의 영화적 공간을 추상적으로 뒤튼다. 아네트는 그 어두운 평면 위를 끊임없이 움직이고 또 움직인다.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텅 빈 어둠을 영화적 무대의 공간으로 재편하는 것은 이 광학적 인형(Optical toy)이 만들어내는 한없이 가벼운 움직임이다. 물리적인 발걸음과 탈것으로 이곳과 저곳을 오가던 영화는 공중에 떠오른 아네트의 신체를 빌려 가상의 스크린에 펼쳐지는 모든 곳으로 움직인다. 아네트의 변형된 움직임이 곧 영화의 변형된 형태가 된다.
 

<아네트>가 구축하는 영화적 세계의 이미지는 혼종적이다. 그 가운데에는 영화의 순수한 형태를 위협하는 서로 다른 무대들의 표상이 있다. 관객들을 웃음으로 ‘죽여주는’ 헨리의 스탠드업 코미디 공연과 사람들을 ‘구원하는’ 앤의 오페라 무대, 그리고 앤의 목소리를 이어받아 노래를 부르는 아네트의 무대는 각각의 상이한 속성과 외형을 드러내며 한 영화의 내부에 이질적으로 접합해 있다. 카락스는 객석을 가득 메운 극장의 관객들을 묘사한 킹 비더의 <군중>(1928)의 한 장면과 헨리와 앤의 공연을 지켜보는 무대의 관중들을 수평적으로 배치하고, 실시간으로 이어지는 라이브 공연의 롱테이크와 스마트폰으로 촬영되어 유튜브에 업로드되는 조각난 영상을 무분별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아네트>라는 독특한 뮤지컬 영화는 영화의 옆자리에 무대와 객석을, 텔레비전과 스마트폰 영상의 이미지를 끌어들인다. 이 혼종적인 결과물은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영화적’인 걸작이 아니다. 반대로, <아네트>는 놀라우리만큼 다면적인 비영화적 장치들로 편재한 비순수 영화의 한 사례다. 

영화적인 것들과 비영화적인 것들이 분열적으로 경합을 벌이는 <아네트>에서 ‘영화적인 것’의 주요한 참조물 가운데 하나는 프리드리히 무르나우의 <선라이즈>(1927)이다. 차 안에서 악몽을 꾸고 깨어난 앤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는 양식적인 제스처, 침대에 앉은 헨리의 불안한 신체 위로 유령이 된 앤의 형체가 겹쳐지는 이중인화의 표현은 무르나우의 영화에 담긴 세부를 직접적으로 상기시킨다. 하지만 무엇보다 두 영화가 강렬하게 공유하는 것은 물에 빠진 여인의 이미지일 터이다. <선라이즈>의 남자와 <아네트>의 헨리는 모두 배 위에서 아내를 물에 빠트려 죽이려는 충동에 사로잡힌다. 카락스는 “해가 뜨고 지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든 있을 법한 범용한 이야기(<선라이즈>의 도입부에 나오는 자막의 한 부분)”를 기묘한 방식으로 반복한다.
 

<선라이즈>에서 주인공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소리의 유혹이었다. 도시에서 온 여자의 휘파람에 이끌려 남자는 집 밖으로 나가고, 소리가 도달하는 곳에서 아내를 죽이려는 계획을 세운다. 다만 <선라이즈>는 무성영화다. 음악이 있고 대사가 있지만 목소리는 없다. 부부를 파멸로 인도하는 음성은 영화에 들려오지 않는다(<아네트>가 참조하는 두 편의 무성영화가 만들어진 시기는 꽤나 미묘한데, <군중>과 <선라이즈>는 최초의 토키영화인 <재즈 싱어>(1927)와 거의 동시에 만들어진 무성영화의 끝자락에 있는 작품들이다). 그와 달리 <아네트>는 유성영화이며 뮤지컬 영화다. 음악과 노래, 목소리가 모든 순간에 있다. 폭풍우에 휩쓸리지만 끝내 구제되어 살아나는 <선라이즈>의 아내와 다르게 <아네트>의 앤은 폭풍우가 치는 바다 위에서 헨리의 손에 의해 물에 빠져 죽는다. 이것으로 연인들의 이야기는 끝나지만, 그러나 그녀의 목소리가 되돌아온다. 두 발로 서서 걷는 것조차 어려운 아네트의 뻣뻣한 신체에 앤의 목소리가 깃드는 방식으로 말이다. 

<선라이즈>의 부부는 죽음의 순간을 벗어나 삶의 두 번째 기회를 얻고 구제와 재회의 빛으로 향하는 결말을 맞는다. 카락스의 <아네트>는 오늘날의 영화가 놓인 조건에서 그것이 불가능함을 역설한다. 고전기의 무성영화가 음성의 유혹을 넘어서는 회복의 몸짓으로 연인의 영화를 완성했다면, 오늘날의 뮤지컬 영화에서 그런 순수한 회복은 이루어지지 않는다(이는 앤의 악몽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헨리의 근원적인 폭력성과도 연관 지어볼 수 있을 것이다). 영상과 소리는 불균질하게 뒤섞여 모든 곳에 비치된다. 빛을 발산할 때마다 아네트의 목소리를 일깨우는 환등 기구는 혼잡스러운 영상과 소리의 상태를 지시하는 과거형의 장치다. 반복해서 말하지만, 카락스는 영화의 주변을 맴도는 서로 다른 매체와 영상의 소란을 산포하고 있을 뿐이다. 그에 조응하듯 앤의 목소리를 이탈한 음성은 아네트에게 깃들어 끊임없이 다른 곳으로 영화를 움직이게 한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다시 한번, 아네트의 신체는 영화의 형상을 전환하는 근거로 자리 잡는다. 

그렇게 카락스는 영화를 둘러싼 모순과 변형을 간직한 마리오네트 인형과 더불어 <아네트>의 마지막 무대로 진입한다. 헨리가 갇힌 형무소의 면회실에 들어선 마리오네트는 어느 순간 인간의 형상으로 탈바꿈한다. 조르주 멜리에스가 발견한 영화의 근원적인 트릭의 원리처럼, 컷이 바뀌면 마리오네트-아네트가 사라지고 인간-아네트가 벽에 기대어 있는 식이다. 영화의 이미지란 언제든지 인형과 인간의 외형을 바꿔치기하고, 아무것도 없는 벽 앞에 피사체를 나타나게 한다. 인형극에는 영화만큼이나 마술적인 속성이 있다고 말한 카락스의 언급은 영화와 인형극을 무람없이 오가는 이 장면에서 매혹적으로 도래한다. 인간-아네트는 헨리 앞으로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두 발로 걸어온다. 앤의 노랫말처럼 “그대로 계속 걸으렴, 한발 한발씩” 헨리에게 다가온다. 영화의 카메라 또한 공중으로 떠오르는 대신 지면에 멈춰 선다. 무대 위의 공연을 포착한 기나긴 롱테이크 화면과 빠른 속도의 몽타주를 오가며 운행되던 영화는 마지막 시퀀스에 이르러서야 마주 앉은 두 사람의 시선을 오가는 숏/역숏의 데쿠파주를 선보인다. 이 자리에서 영화에 남겨진 것은 서로의 얼굴과 시선을 주고받는 영화적 방법의 해체일까, 그것의 갱생일까? 맞부딪힌 두 얼굴이 잠시나마 한 장면에 포개진 뒤 하나의 얼굴은 화면 바깥으로 사라지고, 하나의 얼굴은 등을 돌린다. 그러고 나면 바닥에 떨어진 마리오네트-아네트의 모습이 보인다. 그리고 그 인형이 움직이지 않는 지점에서 영화도 화면을 멈춘다. 카락스가 당도한 영화의 심연이 거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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