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베니어 파트 2 조안나 호그, 2021

by.박도신(부산국제영화제 선임프로그래머) 2021-11-30조회 1,189

2020년 봉준호 감독이 아카데미 감독상 수상 소감에서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다.”라는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말을 인용 한적이 있다. 영국 감독인 조안나 호그의 <수베니어>시리즈는 아마 이 말에 가장 부합하는 작품이 아닐까 싶다. <수베니어: 파트 II>(2021)를 이야기 하려면 <수베니어: 파트 I>(2019)을 빼 놓을 수 없다. <수베니어: 파트 I>과 <수베니어: 파트 II>는 서로 연결 된 스토리로 영화를 전공한 조안나 호그가 대학시절 실제로 겪은 일들을 토대로 한 자전적인 이야기다.

유복한 가정에서 자라난 주인공 줄리는 미래의 영화 감독을 꿈꾸는 영화 학도다. 학교 프로젝트를 완성하기 위해 분주하던 어느 날, 미스터리한 남자 앤소니를 만나게 된다. 만난 지 얼마 안된 앤소니는 줄리에게 당분간 그녀의 아파트에서 머물게 해달라고 부탁하고 그에게 호감을 느낀 줄리는 흔쾌히 허락한다. 같이 생활하면서 점점 앤소니의 묘한 매력에 빠져들게 되는 줄리, 학교 프로젝트를 등한 시 한 채 급기야 앤소니를 위해 부모에게 거짓으로 돈을 꾸기 까지 한다. 하지만 앤소니의 마약 중독으로 인해 이들의 관계는 비극적인 결말을 맺게 된다. 불투명하기만 했던 앤소니와의 관계에서 헤어나지 못한 줄리는 그를 잊기 위해 다시 학교 프로젝트에 매진하기 시작한다. 자신이 경험했던 앤소니와의 과거를 토대로 영화를 만들기 시작 하지만 그 둘의 범상치 않았던 관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스텝과 배우들 때문에 난항을 겪기 시작한다. 전작 <수베니어: 파트 I>이 앤소니와 줄리와의 관계에 포커스를 맞췄다면 후속작인 <수베니어: 파트 II>에선 줄리의 순탄치 않은 졸업작품 제작과정에 비중을 둔다.

<수베니어: 파트 I> 같은 경우 2019년 선댄스 영화제에 해외작품 경쟁 섹션인 월드시네마부문에 처음 소개되어 작품상을 수상하며 평단의 극찬을 받은 작품이다. <수베니어: 파트 II>또한 2021년 올해 칸느영화제 감독주간에 초청 되어 <수베니어: 파트 I> 못지 않은 찬사를 받았다. 2019년과 2021년 부산국제영화제를 포함해 이 두 작품을 초청한 영화제만 해도 40여개가 넘고 노미네이트만 30회 그리고 7차례의 수상을 하며 당해 전 세계 평론가들과 영화제가 가장 사랑했던 작품들이 되었다.
 
수베니어 파트2 영화 장면

평단의 열화와 같은 호평을 받았던 <수베니어 파트: I & II>는 스토리 자체 보다는 캐릭터 하나하나에 중점을 둔 매우 담대하고 솔직한 영화다. 영화제 선정을 위해 이런 독립 예술작품을 수없이 많이 보게 되는데 지나치게 주관적으로 스토리를 구성 하거나 연출 방향을 잡다 보면 너무 난해해지거나 개연성이 떨어져 관객들의 공감을 불러 일으키지 못하는 경우가 꽤 있다. 반대로 관객들을 너무 의식해 자신만의 색깔을 잃어 버리고 스토리가 진부 해지거나 뻔한 결말을 맺는 작품들도 상당히 많다. 그런 면에서 <수베니어 파트: I & II>는 그 경계선에서 완벽하게 중심을 잡는다. 관객들이 이영화를 어떻게 생각할까 보다는 어떻게 하면 본인의 이야기를 좀 더 진솔하게 표현 할까를 더 많이 고민 한 작품이다. 그러면서도 관객들이 캐릭터들에게 집중을 하면서 감독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에 귀 기울이게 만드는 연출은 과연 평론가들의 찬사를 받기에 충분하다.

그런 점에서 조안나 호그 자신이 겪었던 일 중 사소한 것 하나 놓치지 않으려고 한 흔적이 역력하다. 배우들의 연기를 보면 그렇다. 주로 롱테이크로 처리되는 캐릭터들의 거의 모든 대화는 마치 연출이 되었다기 보다는 실제 상황을 대본 없이 연기 한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조안나 호그 감독은 촬영 전 모든 배우들과 자신의 겪었던 상황에 대해 배우들이 완벽하게 소화할때까지 끊임 없는 대화를 나누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주인공 쥴리가 앤소니를 처음 만나는 부분이나 자신의 졸업 작품의 스토리를 어떻게 끌어 갈지에 대해 나머지 스텝과의 논쟁을 벌이는 장면은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이 꾸밈없고 생생하다. 조연을 맡은 다른 배우들도 마찬가지다. 하나 같이 모두 자신이 어떤 캐릭터인가를 확실히 보여주는 능력이 탁월하다. 관객들이 흥미를 가질만한 극적인 갈등이나 뭔가 감동을 줄만한 의미심장한 대사가 없어도 처음부터 끝까지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그들의 대화를 보고 있자면 조안나 호그 감독이 얼마나 많은 시간을 배우들에게 쏟아 부었는지 짐작을 할 수 있다.

배우 캐스팅에 관련한 일화가 하나 있다. 이 두 작품의 주인공 쥴리를 연기한 아너 스윈튼 번은 대사 없는 카메오로 출연한 것 외엔 연기 경력이 아예 없는 배우다. 재미있는 사실은 그녀는 쥴리의 어머니 역을 맡은 틸다 스윈튼의 실제 딸이라는 것이다. 1986년 조안나 호그 감독의 졸업작품이었던 단편 <카프리스>에 출연했던 틸다 스윈튼은 그 후 조안나 호그와 오랜 친구 사이로 지내왔다. <수베니어: 파트 I & II>의 여주인공역으로 뭔가 신선한 배우를 찾던 감독은 캐스팅 문제를 상의하기 위해 틸다 스윈튼을 찾아간다. 그 자리에서 어머니의 친구에게 인사를 하러 왔던 아너 스윈튼 번을 본 조안나 호그 감독은 (그녀는 친구 딸인 아너 스윈튼 번이 태어날 때부터 알고 있었다) 갑자기 아너 스윈튼 번에게서 자신의 대학생 시절의 이미지를 본 것 같은 느낌을 받았고 그 자리에서 주인공 역할을 제안했다. 아너 스윈튼 번도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수락했다고 한다.
 
영화 수베니어 장면

관객들의 평가를 염두하기 보단 자신의 이야기를 가감없이 솔직하게 표한 것이 오히려 관객들의 공감을 불러 일으키는데 성공한 것 같다. 한마디로 평범함에서 비범함을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자극적인 소재가 난무하는 현재 영화계를 비추어 볼 때 <수베니어>시리즈는 참 귀한 영화다. 흔히 창작을 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색깔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고 한다. 하지만 자신만의 색깔을 가지면서 관객들의 공감대를 불러 일으키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은 일이다. 독립영화 감독들, 특히 신인 감독들일 경우 자신들의 영화를 만들 때 많이 고민 하는 부분일 것이다. 그런 면에서 조안나 호그의 자전적인 작품 <수베니어>시리즈를 독립영화인들에게 강력하게 추천하고 싶다. 물론 뭔가 공장에서 찍어 낸 듯 정형화 된 영화들에 지친 관객들에게도 마찬가지다.

안타까운 점은 이런 작품들이 흥행에 성공 하기에 참 어렵다는 것이다. <수베니어: 파트 I & II> 두 작품 모두 국내에 정식으로 수입되지 않았다. OTT 플랫폼이 대세인 요즘 시대에 관객 또는 시청자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컨텐츠를 확보하기 위한 경쟁이 치열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베니어>시리즈 같이 높은 완성도를 가진 작품들이 단순히 흥행성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소외 받는 것 같아 아쉽다. 물론 감독 본인도 큰 흥행을 바라고 만든 작품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수베니어>시리즈 같은 잔잔하지만 절제된 연기와 연출 그리고 현실적이면서도 인간미 넘치는 작품들이 일반 관객들에게도 소개 될 수 있는 기회가 더 많아 졌으면 한다. <수베니어>시리즈도 조만간 국내에 수입 되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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