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가

by.노혜진(스크린인터내셔널 기자) 2021-04-08조회 2,179
작년 한 해는 뭐 하는 한 해였는지 모르겠다. 코로나19 판데믹 때문에 영화업계는 불안과 침체가 주였던 것 같은데 그나마 이래저래 만난 한국 영화들이 2020년을 관통하는 한 줄기 빛이었던 것 같다. 개인적인 기억으로는 1월 말, 2월 초 참가했던 로테르담 국제영화제에서는 윤단비 감독의 <남매의 여름밤>이 밝은 미래 부문 상을 탄 것, 같은 곳에서 다른 한국 영화들의 활약과 함께 작년 칸 영화제 황금 종려상을 탄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흑백 버전 월드 프리미어와 마스터클래스를 엄청난 열기 속에 마친 것으로 기분 좋게 시작한 한 해, 곧이어 2월 초 미국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전례 없이 비영어권 영화로 <기생충>이 최고 작품상을 비롯한 4개 부문 상을 휩쓴 것으로 기분 좋게 시작한 한 해였다.

세계인이 감탄한 가운데 아카데미상 시상식이 (LA 현지 시각 2월 9일) 끝나고 이틀인가 사흘 후, 연상호 감독과 <반도> 단독 인터뷰를 할 때까지만 해도 서울에 있는 투자배급사의 밀폐된 유리 상자 같은 회의실 안에서는 마크스를 벗고 이야기한 것이 기억이 난다. 지금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거의 모든 것이 온라인으로 옮겨진 일상에 오늘도 Zoom 화상 인터뷰가 잡혀있다.) 어쨌든 한국 안팎으로 2016년작 <부산행>이 이례적인 인기를 끌었던 것에 이어 그 후속작인 <반도> 역시 칸 영화제 월드 프리미어 후 여름 성수기 텐트폴 개봉의 수순을 밟을 것에 국제적인 기대가 이미 모아졌던 때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2020년은 정말 신나는 한 해가 될 것만 같았다.  

그런데 이 글을 쓰는 11월 말, 12월 초 시점에서는 이게 다 올해 얘기 맞나 팩트 체크를 해야 할 정도로 다른 세상의 먼 과거 얘기가 돼버린 것 같다. 2월 베를린 국제영화제 이후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COVID-19)’라는 말이나 ‘판데믹이 영화업계에 미치는 (악)영향’에 관한 얘기가 빠지는 기사는 거의 쓴 적이 없는 것 같다. 세계적으로 극장 관객 수는 폭락했고 영화사들은 극장 개봉을 미루거나 OTT로 직행했고, 칸 영화제도 취소한다 만다 한참 끌다가 결국 6월에서야 선정작 발표만 하고 물리적 영화제 자체는 취소하는 형태가 됐고, 앞으로 영화 제작과 상영은 잘해나갈 수 있을까 계속 불안하고 우울한 2020년이 돼버렸다. 

(그래도 일찍부터 세계 여름 동시기 개봉을 준비했던 <반도>는 그나마 코로나19 방역 조치를 잘 취한 한국 외 아시아 몇 개국 중심으로 개봉을 과감히 실행하면서 얼어 있었던 극장가를 어느 정도 녹여주었다. 칸 영화제는 열리지 않았지만 공식 선정작 목록에 오른 <반도>는 그것과 별 상관 없이 아시아 여러 나라에서 이례적인 흥행기록을 또 세웠고, 국제 영화업계는 그 행보에 주목했다.) 

그리고 수개월 간 개막을 할지 말지 고민하던 부산 국제영화제는 조심스럽게 사회적 거리두기 및 방역 조치를 강화한 상태의 축소된 행사를 10월에 개최하기로 했다. 이에 <스크린 인터내셔널>에서는 영화제에 선정된 떠오르는 한국 영화 신인들 몇에 대한 취재를 하게 됐고, 덕분에 신선한 장편 데뷔작들을 또다시 볼 수 있게 됐다. 그 중 뉴 커런츠 부문에 선정된 이란희 감독의 <휴가>가 기억에 가장 남는 영화 중의 한 편이다. 
 
휴가, 라면을 앞에 두고 다른 노동자와 얘기하는 이봉하

보통 취재를 위한 스크리너 링크를 받으면 당장 관람하지 못한다. 다른 일이 좀 없는 늦은 밤이나 주말에 볼 수 있게 되는데, 그때 가서 링크에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을 발견할 경우, 보내준 이에게 연락하기 곤란한 타이밍이다. 그래서 이메일로 받으면 “잘 받았습니다” 답신을 하기 전에 먼저 스크리너를 잠깐씩 틀어본다. 앞부분 크레딧과 첫 장면 몇 초가 잘 나오나 보고, 무작위로 중간쯤 계속 문제없이 나오나 한두 군데 정도를 틀어본다. 스포일러가 될까 봐 2-5초씩만 틀어본다. 그리고 아무리 그래도 맨 끝은 피한다. 그런데 반갑게도 이번 부산 영화제 기대작으로 받은 스크리너들은 거의 다 불과 그 몇 초 안에 ‘아, 이 영화 좋을 것 같다’ 싶은 것들이었다. 그리고 다 보고 났더니 실제로 이 불안하고 침체된 시기에 영화에 대한 희망을 주는 작품들이 맞았다. 

신기해서 주로 취재 기자로 일하는 나보다 훨씬 많은 영화를 전문적으로 보고 평가하는 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와 평론가 친구들에게 SNS상으로 물었다. 어떻게 몇 초 안에 영화가 좋다는 게 티가 나지? 무슨 연출력의 힘이나 미쟝센의 요소들이 결합하면 총 5초 내에 느낌이 오게 할 수 있을까? 쟁쟁한 영화제 프로그래머들도 제대로 답을 못 해준 건지 안 해준 건지 그저 좋은 영화를 봤다니 기뻐해 주고, 기껏 해 봤자 ‘많이 보다 보면 알아볼 수 있게 된다’ 정도였다.  

주인공인지 아닌지도 알 수 없는 사람들이 3초 동안 나오는데 ‘뭐 하나 동행해 보고 싶다’, 그리고 대단치도 않은 배경과 소리가 나오는 장면을 2초 동안 보는데 ‘저 안에서 호흡해 보고 싶다’는 느낌이 들게 하는 영화들이 있다. 무슨 화학적 반응을 일으켜 그런 느낌을 주는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휴가>도 분명히 그런 영화 중 하나다.
 
휴가, 가족과 밥을 먹는 이봉하

<휴가>는 중년의 해고 노동자 재복이 동료들과 함께 1,882일째 농성하는 날 해고 무효 소송에서 최종 패소하고, 일단 장기 농성을 하던 차가운 노상의 텐트를 떠나 며칠간 재충전의 시간, 남들처럼 ‘휴가’를 가자는 결론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엉망이 된 집에 들어간 재복은 밀린 청소와 정리를 시작하는데 딸들은 너무 오랫동안 가정을 비웠던 아빠가 반갑지 않다. 농성장에서 식사 담당인 재복은 집에서도 따뜻한 밥을 차리지만 애들은 외면하고 늘 먹었던 듯한 라면을 알아서 해 먹는다. 고3인 큰딸은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합격한 대학에 낼 예치금이 필요하고, 작은딸은 롱 패딩 코트를 갖고 싶어 한다. 그래서 재복은 얼마 없는 휴가 동안 돈을 벌기 위해 친구가 관리자로 있는 가구 공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게 된다. 

이 작품은 이전에 단편 영화 <파마>, <천막> 등으로 베를린 국제영화제 외 다수 영화제에서 기대주로 떠올랐던 이란희 감독의 장편 영화 데뷔작이다. 감독은 2012년 실제로 어떤 기타 공장 해고 노동자 밴드 공연을 보고 그 멤버들에 관한 시나리오를 쓸 생각으로 취재하다가 결국 단편 영화를 몇 편 찍게 됐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보게 된 장기 농성자들 중에 12년간 투쟁한 사람이 농성장을 중간에 떠났다가 몇 번이나 돌아온 것을 보면서 궁금해하다가 어떤 일을 하다가 왜 돌아왔는지 이해하려다 이 영화를 만들게 됐다고 한다. 할 일이 있고 ‘일정이 있어서’ 그랬다고 한다. 

이렇듯 재복도 가깝게는 함께 지낸 공장 동료들과 멀게는 더 큰 노조 조직들과의 연대 의식과 책임감으로 농성에 성실히 임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돌보아야 할 가족들이 있어 고민할 수밖에 없는 처지다. 재복은 무덤덤한 것 같으면서도 누군가 억울한 일, 어려운 일을 당한다 생각하면 없는 처지에도 발 벗고 나서서 도우려 한다. 말주변이 없는 듯하면서도 옳고 그름에 대한 소신을 갖고 말할 때는 사람들이 당황해하면서도 설득을 당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봉하 배우는 성실한 곰 같으면서도 섬세한 면을 드러내는 재복을 연기하는데 가슴을 천천히 미어지게 한다. 
 
휴가, 농성 천막 앞에 선 이봉하

이 영화 전체가 그런 것 같다. 덤덤하게 다큐멘터리처럼 인물들을 따라다니는데 섬세한 순간순간과 사건들이 모여서 조용히 가슴을 미어지게 하는 게 있다. 스포일러를 쓰지 않고 이란희 감독이 쓴 시나리오를 칭찬하기 힘들다. 그런데 어쨌든 시나리오를 받쳐준 노신웅 촬영감독과 한동훈 동시녹음 기사와 이연정 편집자의 역할도 꼽을 만할 것 같다. 분명 처음에 2~5초씩 스크리너를 돌렸을 때 매력을 느끼게 한 그 모습들이나 소리들도 감독의 연출 아래 그들의 공이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이 작품 속에 큰딸 현희를 연기한 김정연 배우, 작은딸 현빈을 연기한 이승주 배우, 그리고 작업장의 젊은 동료 준영을 연기한 김아석 배우를 보면서 계속해서 한국 영화의 자라나는 연기자 풀이 메마르지 않음에 희망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됐다. 

영화는 10회차, 2월 18일부터 3월 1일 사이에 촬영했다고 한다. (‘코로나19는 저희가 촬영을 마치자마자 한국이 난리 났었다’는 감독의 기억이 있다.) 주로 인천에서 촬영했는데, 한 회차는 서울 강남역 삼성해고자복직투쟁위원회 농성장에서 찍었다고 한다. 노조를 만들려다가 해고돼 복직을 위해 355일 동안 고공농성한 김용희씨가 아직 철탑 위에 있을 때의 농성장인데, 그 로케이션이 영화 속에 제대로 활용된다.  

감독은 '노동 이슈에만 관심이 있다고 말하기 힘들고 말하자면 가난한 사람, 힘이 없는 사람, 그럼에도 품위를 잃지 않는 사람들에게 관심이 있다. 나도 평생 부자로 살아본 적이 없어서 자연스럽게 눈이 가는 것 같다. 허투루 살지 않고, 최대한 성실하게 인간적인 측면에서’ 도리를 지키며 자기가 책임져야 하는 이들을 보살피려는 재복도 그런 인물이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양극화로 ‘좋은 인성까지도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집안에서 세습되고 있는 생각이 들더라’ 면서 가난한 사람들이 ‘제도를 바꾸려는 노력도 하지만, 어쨌든 제도가 바뀌든 안 바뀌든 살아야 하니까 그럼 우리는 품위를 잃지 않고 살아야 하지 않을까, 뭘 가지고 여유가 있어서 나오는 에티켓 같은 것이 아니라 힘든 와중에도 이 일은 하는 내가 사람이니까 잘하려고 하는 고민’에 대해서 말한다. 

그런 맥락에서도 재복은 누가 보든 말든 착실하게 정성껏 할 일을 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런지 그동안 농성하느라 묵혔던 기술과 경력을 살려 가구 만드는 아르바이트에 임할 때 나름 보람과 즐거움을 느끼는 것 같다. 남들처럼 휴가 때 어디 좋은 데 놀러 가는 것도 아니고 아픈 등에 파스를 붙여가면서 노동하는 것인데도 나름 품위가 있어 보이는 이유일지도 모른다.  

대충 감이 왔겠지만 <휴가>는 블록버스터 상업 영화가 아니다. 저예산 독립 영화다. 인천영상위원회, 한국영상위원회, 영화진흥위원회, 전주정보문화산업진흥원, 전주영화제작소 등 여러 단체의 기획개발, 제작, 후반 작업 등 각 단계별 지원뿐만 아니라, 밥을 날라다 주고 장소를 빌려준 지역 주민들의 성원 등 여로모로 지원이 들어간 작품이다. 

영화업계 역시 양극화되어가는 상황에서 <휴가>와 같은 독립영화들도 품위 있게 지속적으로 만들어질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 부족한 글을 몇 자 적어봤다. 가장 인간적인 작은 단위의 관찰과 동조로 ‘사람으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라는 문제와 함께 좀 더 넓은 폭의 사회 문제도 곱씹어 볼 수 있게 하는 영화는 지원해줄 가치가 있는 것 같다. 그게 지역이나 국가의 단체로서든, 개인 극장 입장권을 예매하는 관람객으로서든, 밥을 날라다 주는 이웃으로서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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