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 너머에 박홍민, 2020

by.이용철(영화평론가) 2021-01-15조회 4,630
박홍민은 지금까지 세 편의 장편영화를 만들었다. 내용은 단순하다. 그는 비극적인 가족 이야기나 멜로드라마를 주로 다룬다. 신작 <그대 너머에>도 다르지 않다. 영화 두 편을 찍고 멈춘 상태인 감독 경호가 지연이란 이름의 젊은 여성과 만난다(박홍민의 영화에서 여자 주인공의 이름은 항상 지연이다). 그녀는 어머니의 이름이 인숙이라고 밝힌 뒤 경호가 자신의 아버지가 아닌지 묻는다. 놀라 과거를 부정한 경호는 지연의 뒤를 몰래 따라가 인숙과 20년 만에 재회한다. 도입부의 줄거리만 들어도 <그대 너머에>에서 <물고기>(2011)와 <혼자>(2016)의 세계가 반복되고 있는 건 맞다. 영화 속에서 반복을 즐기는 스타일은 영화와 영화 사이에서도 마찬가지다. 박홍민은 ‘죽음, 귀신, 령, 꿈, 기억, 인연, 불안, 무의식’의 세계에서 좀체 벗어나지 않는다. <그대 너머에>를 연작이라 부를 수는 없지만 전작들과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이유다.

<혼자>처럼 공간의 구성에 신경 쓰는 법이 여전한 가운데, 카메라가 훨씬 매끄러워진 점이 눈에 띈다. 예를 들어 경호가 지연을 따라 놀이터에 도착해 벌어지는 장면이 그러하다. 아마도 경호가 숨어서 바라볼 동안, 지연과 인숙이 대화를 나눈다. 얼핏 보기에 인숙의 시점 아래 지연이 놓인 것 같지만 정확하지는 않다. 지연의 시선이 살짝 어긋나 있어서 흡사 그녀가 사시(斜視)라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한참을 그러다 지연이 자리를 바꾸어 인숙 쪽으로 다가가면, 카메라는 180도로 시선을 돌려 그네에 앉은 두 인물을 포착한다. 문득 인숙이 “나무가 참 앙상하다”라고 말하면 카메라가 그 의도를 따라 시선을 위로 올려 앙상한 겨울 나무와, 그 곁에서 해에 걸린 또 다른 마른 나무를 마저 붙든다. 그 나무를 따라 아래로 내려오면, 지연이 원래 앉았던 벤치 위로 인숙과 지연이 나란히 앉아 있다. 그들은 언제 맞은편으로 옮긴 것일까. 사소하지만 복잡한 배려가 깊이 밴 이 시퀀스는, 집으로 가는 지연을 인숙의 등 뒤에서 바라보는 것으로 끝난다. 인숙의 주관적 시선 아래 전개될 것 같던 시퀀스가 인숙의 시선을 가장하는 척하면서 마치는 거다. 이 시퀀스의 카메라 움직임은 사실, 영화의 도입부에서 경호와 지연이 만나는 시퀀스의 그것을 변주한 것이다. 아무리 반복을 즐기는 박홍민이라고 하더라도 왜 그가 굳이 어려운 방식으로 미장셴을 구축하려는 것인지 궁금했다. 매끄러우나 의미는 더 모호해지는 이러한 방식에 대한 답을 구하자면 1시간 정도 영화를 더 보아야 한다.
그대 너머에, 영화 스틸1

<혼자>의 주인공 수민이 다큐멘터리를 준비하는 감독인 것처럼, 경호가 두 편의 영화를 찍은 감독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창작자로서 경호는 감독 박홍민과 좀 더 결부된 인물이다. 그는 의식의 물화에 매진하는 박홍민을 닮았다. 그는 쓴다, 고로 존재한다. 지하층의 어두운 방에 앉아 그는 세 번째 영화의 바탕이 될 시나리오를 쓴다. 그런데 그가 쓰는 시나리오의 내용은 지연이 전달해준 이야기 그대로다. 그는 자신이 시나리오를 쓴다고 생각하지만, 그의 노트북에 적혀 있는 이야기가 과연 그의 머릿속에서 나온 건지 확실하지 않다. 심지어 그가 자리를 비운 동안, 그의 노트북은 자동 피아노처럼 그가 할 말과 행동을 미리 알고 있다는 듯이 문자로 연주한다. 경호는 인숙이 쓴 수천 장의 노트에 기록된 인물일까? 사정은 인숙이나 지연도 비슷하다. 지연은 자기가 글 속의 인물인지 애초에 태어나지 않은 아이인지 스스로 질문한다. 기억을 유지하기 위해 미치도록 써 글로 남기는 인숙은 기억이 흐릿해질 때마다 자신과 경호, 자신과 지연의 관계를 의심한다. 경호, 인숙, 지연의 사정은 기실 박홍민 영화에 나오는 모든 인물에게 적용된다. 박홍민의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은 자신이 유령이 아닌지 반복해서 묻는다. 그 질문은 자기 실존을 확인하는 순간까지 끝나지 않는다.

골목에서 지연이 경호에게 하는 말은 ‘유령 선언’이다. “어차피 어딜 가더라도 아저씨를 알아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예요.” 경호는 자기가 실존한다는 증거를 자기 시나리오 안에서 찾으려 한다. 그는 인숙이 지어놓은 의식의 세계 안으로 들어가기를 문자 그대로 시도한다. 방법은 간단하다. 지연이 하는 방식을 따라, 그는 자기 머리를 인숙의 머릿속으로 세게 밀어 넣는다. 머리를 쥐어 잡으며 일어난 그는 인숙의 집, 즉 인숙의 의식을 방문하고, 인숙 또한 의식의 입구에 달린 문을 열어 그를 받아들인다. 상황을 다시 정리하면 이러하다. 인숙의 의식 세계라 할 집 안에서 경호와 인숙이 만나 이야기를 나눌 동안, 인숙이 종종 낯선 존재로 인식하는 지연은 문밖을 지키고 섰다. 그런 까닭에 인숙의 집에 걸린 액자에서 지연의 자리는 지워져 있다. 경호와 대화를 나누던 인숙은 어느 순간 기억이 흐릿해지자 기억을 정리해둔 수천, 수만 장의 노트의 바다 위에서 거칠게 몸부림친다. 집 곳곳에 가득 쌓인 노트 곁에서, 지연은 물론 경호와 인숙은 그들의 유령성을 재확인할 따름이다. 그들이 존재한다고 믿었던 공간은 쓰라린 고통과 함께 허구의 세계임을 드러낸다.

인물들이 유령성을 확인하는 순간 속에서, 그들을 바라보는 내 의식을 건드리는 건 어떤 비디오에 녹화된 이미지다. 경호는 인숙의 방에서 오래전에 자신이 찍어둔 비디오 테잎을 발견한다. 경호와 인숙이 비디오를 보면서 대화를 나눈다. 개미 한 마리가 나무 위로 기어가는 중이다. 개미에 관해 이야기했던 기억을 나누다 인숙이 “카메라를 움직여 봐봐, 아래로, 아래로”라고 주문한다. 그러면 카메라가 시선을 땅 쪽으로 이동해 모래 위를 걷는 또 다른 개미를 바라본다. 이건 좀 이상한 상황이다. 보통 비디오를 보다 이동을 요구할 때, 그 이동은 시간의 순서상 앞이나 뒤를 의미한다. 그런데 인숙이 비디오에 찍힌 공간 내에서 아래로 이동할 것을 요구하자, 그게 이상하지 않다는 듯이 카메라는 그 요구를 따른다. 비디오에 찍힌 이미지는 고정되기 마련인데, 인숙의 기억 속 주문에 맞춰 경호가 과거에 찍어놓은 이미지가 자유자재로 새로운 이미지를 추가한다. 고정되었던 이미지 내부에서 인숙의 기억이 요구하는 대로 새 이미지를 꾸미게 되고, 기억을 더듬던 인숙의 손으로 옮겨 간 카메라는 20년 전의 경호의 모습을 되살려낸다. 시간을 당기고 늘여서 그 사이로 무언가를 삽입이라도 하겠다는 투다. 게다가 카메라를 인숙에게 넘겨주는 건 경호의 손이 아니다. 그렇다면 그게 기억의 손이란 말인가. 이어 인숙의 기억이 사라질수록 경호의 이미지도 흐릿해진다. 남은 건 이미지뿐인 이 세계에서, 인물의 부유하는 의식 속에서 유일하게 실존하는(혹은 실존을 돕는) 건 카메라다.

<혼자>와 비교해 더욱 풍성해진 박홍민의 ‘골목 오디세이’는 ‘98분 44초부터 102분 25초’에서 폭발한다. 이 장면은 <혼자>의 ‘47분 56초부터 56분 28초’ 사이에 전개되는 지옥의 골목 신과 하나의 세트를 구성한다. <혼자>에서 아무리 걸어도 골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수민을 카메라가 어김없이 잡아내던 것처럼, <그대 너머에>의 카메라는 골목 사이로 잠긴 인숙을 기어이 끄집어낸다. 박홍민의 세계가 구저분해 보이는 건 주요 공간이 가난한 동네의 골목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박홍민은 골목과 집의 집합이 꾸며낸 이미지가 중세 도시의 그것이라도 되는 양 다룬다. 골목은 중세의 여명이 깃든 전근대의 공간이다. 그리고 놀랍게도, 카메라는 앞서 인숙과 지연이 나눴던 대화를 기억해 두었다 하나의 이미지 - 골목으로 재현한다. 놀이터에서 인숙은 옆에 앉은 지연이 낯선 인물인 것처럼 예전 기억을 전했다. “꿈이랑 똑같이 딸을 잃어버린 날, 온 동네를 찾아 헤매다가 내가 혹시나 하고 집에 가봤는데 지연이가 울면서 마루에 앉아 있더라고요” 221초에 걸쳐 인숙은 지연의 이름을 부르며 골목 사이를 돌아다닌다. 골목은 공간 전체를 미로처럼 연결하지만, 정작 그것을 잇는 자기 모습은 보이지 않는 이상한 길이다. <혼자>에서 수민이 지연에게 말하기를, 골목은 머릿속, 뇌 안에 있는 주름 같다고 했다. 아무도 보이지 않고 움직이지도 않는 고요한 마을의 서쪽 모퉁이 집에서 나온 인숙은 골목 사이를 돌고 돌아 동쪽 아래 어귀로 불쑥 등장한다. 경호의 비디오가 인숙의 기억을 물질로 바꿔놓은 것처럼, 221초의 여정은 인숙이 딸에게 해줬던 이야기를 생생하게 물화한다. 나는 그 221초의 이미지를 올해의 장면이라 부를 것이다. 

90년대 이후 대중영화에서 골목은 주요한 공간의 지위를 잃어버렸다. 미로로서의 골목과 가난한 멜로드라마라는 점에서 나는 배창호의 <꼬방동네 사람들>(1982)의 도입부를 기억했다. 택시 기사가 된 주석(안성기 분)이 오래전 헤어진 검은 장갑(김보연 분)을 알아보고 뒤를 쫓는다. 그런데 검은 장갑을 뒤따르는 일이 만만하지 않다. 철거민들이 모여 사는 작은 동네에 불과한데, 골목에서 골목으로 이어지는 길은 좁으면서 끝이 안 날 것 같은 미로에 다름이 없다. 갖가지 짐을 이고 든 검은 장갑은 골목 너머로 사라졌다 나타나기를 반복하고, 카메라는 신비하고 매력적인 물체에 매혹된 듯이 그녀의 뒤를 따른다. 영화가 자아내는 분위기는 사뭇 다르지만, 나는 박홍민의 골목 멜로드라마가 <꼬방동네 사람들>의 21세기 버전처럼 보인다. 하층민의 삶에서 벗어나지 못한 요즘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골목에서 건져낸 멜로드라마. 범죄의 일기였던 전편에 비해 다소 따뜻해지긴 했으나, 박홍민의 멜로드라마는 우울하다. 노스탤지어를 제거했을 때 장르 영화는 얼마나 잔혹해지는가, 그게 박홍민이 현실을 바라보는 방식이다. 무릇 현실은 실존을 넘어선다. 영화를 완성하고 죽은 감독은 다시 유령이 되어 인적이 드문 충무로의 극장 주변을 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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