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울지 않아 피오트르 도말레프스키, 2020

by.남동철(부산국제영화제 수석프로그래머) 2020-12-11조회 6,825
난 울지 않아 스틸
<난 울지 않아>(피오트르 도말레프스키, 2020)는 부산국제영화제 이전에 산세바스찬영화제 신인감독 경쟁부문에 선정 됐지만 영화의 가치에 비해 충분히 주목 받지 못한 작품이다. 올해 부산국제영화제를 준비하면서 봤던 수 백 편의 영화 중엔 <난 울지 않아>보다 뛰어난 영화들이 있었지만 <난 울지 않아>만큼 마음을 움직인 영화는 없었다.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단 한번 150명의 관객과 극장 상영하는 것으로 잊히기엔 너무 아까운 영화라는 생각이 든다.  

설정은 이렇다. 17살 폴란드 소녀는 하반신 장애를 지닌 오빠와 그런 오빠를 돌보느라 애를 먹는 어머니와 살고 있다. 아버지는 오래 전 돈을 벌러 아일랜드로 갔고 소녀에게 자동차를 사주겠다는 약속을 했다. 하지만 아버지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는다. 아니 지켜질 수 없다. 노동현장에서 사고가 일어나 죽었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시신을 모셔와 장례를 치러야 하는데 아일랜드까지 가서 이런 일을 처리할 사람은 딸 밖에 없다. 어머니는 장애인 아들을 돌봐야 하는데다 영어를 못한다. 딸은 외국인 노동자로 타지에서 살다 갑자기 죽어버린 아버지의 시신을 병원 안치실에서 마주한다. 아버지의 얼굴은 형체를 알아 볼 수 없게 짓눌린 모습이다.
 

딸은 아버지의 신원을 확인할 수 없다. 망가진 얼굴과 부서진 핸드폰 같은 소지품만으론 아버지가 맞는지 알 수 없다. 소지품을 보여주며 시신이 아버지의 것이 맞는지 확인해달라는 의사의 재촉에 소녀는 말한다. “당신은 아버지의 호주머니에 뭘 넣고 다니는지 아시나요?” 아버지의 죽음을 대면하는 딸의 이런 반응은 당연하다. 돈을 벌러 외국에 가서 수년간 본 적 없는 아버지에 대해 어린 딸이 뭘 얼마나 알 수 있을까? 영화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간다. 소녀는 아버지가 일했던 해운회사 현장을 찾아간다. 아버지가 죽었던 그날, 아버지는 작업장에 있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다. 다른 사람의 출입카드를 사용해서 대신 일을 하다 사고를 당했고 이런 사고의 경우 보상 받을 길은 없다. 현장 감독관은 말한다. “공식적으로 너희 아버지는 그날 여기서 근무하지 않았다. 무단 침입을 했다 사고를 당한 거라 보상받을 길이 없다.” “그럼 우리 아버지는 공식적으로 아직 살아 있는 거겠네요.” 소녀는 무엇보다 아버지가 자신에게 남겨둔 돈에 관심이 있었지만 아버지의 죽음을 세 번 대면하면서 돈 이상의 무언가를 찾기 시작한다. 처음은 병원에서 짓이겨진 아버지의 얼굴을 보고, 두 번째는 시신을 화물처럼 취급하는 장의사를 만나고, 세번째는 현장 감독관이 내미는 냉정한 사건 보고서를 읽는다. 여기서 아버지는 참혹한 시체이자 80kg 화물이며 무단 침입하다 재수 없이 죽은 사람이 된다.
 
자리를 뜨려던 딸이 현장 감독관에게 묻는다. “제 아버지는 어떤 사람이었나요?” “글쎄, 말이 별로 없었고 열심히 일했지. 이렇게 말할 수 있으려나.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었다고.” 사실 현장 감독관은 아무 것도 모른다. 매일 현장을 찾는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해 일일이 깊은 관심을 갖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는가? 아버지에 대한 딸의 궁금증도 실은 자동차를 사주겠다는 약속만 아니었으면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아버지의 돈을 찾게 됐을 때 소녀는 시신을 옮기는데 드는 돈을 최소로 하고 남은 돈을 자신의 차를 사는데 쓰기로 결심한다. 소녀는 아일랜드 직업소개소의 소장에게 이런 계획을 얘기한다. “아버지도 제가 차를 사기를 바랐을 거예요.” “아버지가 뭘 바랐는지 니가 어떻게 알지? 아버지의 중간 이름이 세바스찬인지도 몰랐으면서.”
 

<난 울지 않아>는 딸이 아버지를 알아가는 영화이다. 여기서 아버지는 이주 노동자이고 가족에게 매달 송금을 하느라 정작 가족과 함께 살지 못하는 남자이다. 딸도 그의 중간 이름을 모르는 평범한 사내. 남들과 똑같이 묵묵히 일하다 죽어도 변변한 보상을 못 받는 폴란드 노동자이다. 영화는 아버지를 발견하는 과정을 통해 딸이 성장하는 모습을 그려낸다. 시신을 화물로 취급하는 장의사처럼, 노동자를 개별 인간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감독관처럼 딸도 아버지를 그저 매달 들어오는 생활비의 발신자로 여겼다. 아버지의 삶이나 아버지의 취미 같은 것에 아무 관심도 없던 딸은 세상이 아버지에 대한 존중을 걷어찰 때 비로소 아버지를 지켜야 할 의무감을 느낀다. 스스로 세상에 나갈 준비가 안 된 존재로 여겼던 딸은 어머니와 아들을 대신하는 가장이 되려고 한다. 세 번째 운전면허 시험에 떨어져서 분을 참지 못하던 그녀는 이제 어떤 눈치도 보지 않고 자신의 길을 운전할 수 있는 어른이 된다.

<난 울지 않아>는 폴란드 감독 피오트르 도말레프스키의 두 번째 장편영화다. 그는 자신의 가족을 비롯해 주변에서 이주 노동자로 생활하는 사람들을 많이 봤고, 거기서 이야기를 시작했다고 한다. 시대적 차이는 있어도 한국과 상황이 많이 다를 거 같지는 않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에 느끼는 호감의 밑바탕에는 한국영화에선 이런 노동자를 다룬 영화를 별로 보지 못했다는 점도 있다. 상업영화에서야 언감생심 노동자를 다룬 영화를 기대하지 않지만 독립영화에서도 노동자의 이야기는 별로 없다. 다큐멘터리에서 다뤄지는 것을 제외하면 <카트>처럼 아주 예외적인 영화만이 있다.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선보인 이란희 감독의 <휴가> 역시 노동자의 이야기를 다룬 보기 드문 예이다. 반면 유럽 영화에선 노동자의 현실을 다룬 영화를 종종 발견한다. 켄 로치로 대변되는 이런 전통은 <빌리 엘리어트> 같은 대중영화에서도 효과적으로 활용된다. 
 

흠결이 없는 완벽한 영화이거나 굉장한 미학적 성취가 있는 영화는 아니지만 <난 울지 않아>의 미덕은 이야기의 전개를 차분히 쫓아가는 디테일에도 있다. 소녀가 병원, 장의사, 아버지의 노동현장을 차례로 방문할 때 그곳의 분위기를 생생히 전달하는 적절한 장면들이 있다. 예를 들어 소녀와 장의사의 대화 장면. 시신의 무게를 묻는 장의사의 질문에 소녀는 장의사의 몸무게를 묻는다. 80kg이라 적어두고 시신을 옮길 가벼운 소재의 관을 소개하는 장의사의 표정은 단순히 사무적인 것을 넘어서 약간 흥분이 된 듯하다. 눈앞에 큰돈을 쓸 고객이 있으니 그럴 만도 하다. 영화는 성실히 디테일을 쌓아간다. 장의사는 시신을 화장하지 않고 옮기려면 3500유로가 들고 화장을 하면 1000유로라고 말한다. 죽음은 무게로 계산되고 다음에 돈으로 환산된다. 철없는 어머니는 화장에 반대하고 딸은 자신의 차를 사기 위해 화장을 서두른다. 정확히 얼마나 필요하고 얼마나 수중에 있는지 얼렁뚱땅 넘어가지 않는 것은 이 영화의 중요한 디테일 중 하나다. 소녀가 아일랜드에 도착해서 담뱃값이 12유로나 한다는 사실에 놀라는 장면처럼 돈의 디테일은 이 영화가 다루는 진실의 실체이다. 돈으로 모든 것이 정리되는 세상에서 아버지의 죽음은 터무니없는 적자였다. 딸은 현장 감독관이 적선하듯 주는 200유로에 감사해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이 영화의 엔딩 역시 적절한 돈의 용처를 통해 카타르시스를 제공한다. 
 

앞서 노동 현실을 다룬 영화가 별로 없다는 지적과 마찬가지로 적지 않은 영화들이 정확한 돈 계산을 하지 않음으로써 현실의 무게를 잊곤 한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빚에 쪼들리는 주인공과 빚을 독촉하는 깡패라는 설정을 자주 만나는데 그럴 때마다 이런 생각이 든다. 저 깡패들이 얼마나 잔인한지를 묘사하는데 쓰는 노력으로 저 주인공의 빚의 액수가 얼마이고 그게 얼마나 절박한 돈인지 묘사하는 쪽이 좋을 텐데, 라고. 평소 이런 생각을 하던 터라 <난 울지 않아>의 디테일이 더 마음에 들었는지 모른다. 가난을 그냥 가난이라고 쓰지 않고 가난의 디테일을 만들어내는 것이 영화적 상상력의 요체이다. <기생충>처럼 홍수에 휩쓸리는 반지하집이든, 가벼운 유골함의 가격으로 표현을 하든 영화적 개성에 맞는 적절한 디테일이 필요하다. <난 울지 않아>는 돈의 디테일에 충실하고 정확할수록 진실에 가까워지는 영화다. 삶의 실체가 거기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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