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생충 봉준호, 2019

by.정지연(영화평론가) 2020-01-17조회 13,575

<기생충>(봉준호, 2019)이 칸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하자 국내외에서 극찬에 가까운 호평들이 쏟아져 나왔다. 기대는 고조됐다. 더군다나 이번 영화는 <설국열차>(2013)나 <옥자>(2017)를 경유해 다시금 온전히 대한민국, 그 토착적 세계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나. 봉준호 감독의 영화는 유독 한국적 삶을 풍속화처럼 포착해낼 때 지니는 생기와 활력, 치밀하고 지적으로 구조화된 영화적 세계 속에서 몽타주처럼 충돌하는 캐릭터들의 동물적이고 모순적인 에너지들의 조합(용맹과 불안, 선함과 악함, 잔혹과 연민)이 매혹적이다. 흡사 제목에서부터 김기영과 이마무라 쇼헤이의 검은 마성과 육식동물의 괴이한 에너지를 연상케했던 이 작품, <기생충>에 대해 지금 시점에서 또 하나의 찬사를 보내는 것은 이젠 지루한 일일 것이다. 다만, 이 영화를 본 이후에도 지워지지 않았던 몇 가지 잔상들, 혹은 질문들은 남아 있다.

상징 혹은 페티시

“돌은 왜 그렇게 껴안고 있냐?”
“이거요? 얘가 나한테 자꾸 달라붙는 거에요. 진짜로요. 얘가 자꾸 날 따라와요.”

폭우와 함께 역류하던 검은 오수가 기택의 가련한 반지하를 삼켜버리던 그 순간, 기택의 가족은 뭐라도 챙겨 이 집을 빠져나가야 하지만 정작 건져낼만한 무언가를 찾지 못한다. 기정은 다 체념한 듯 성난 짐승처럼 검은 물을 뿜어대는 변기를 누르고 앉아 담배나 태워야하고, 기택은 비루하기 그지없는 물건 몇 가지를 챙겨 어깨에 지고 두리번거릴 뿐이다. 그런데 이 순간 기우는 특별한 것에 사로잡힌다. 얼마 전 민혁으로부터 건네받은 산수경석, 그 수석이다. 재물과 합격운을 가져다준다는 그 돌을 건네받았을 때 기택은 “참으로 시의적절하구나”라고 감탄했고, 기우는 “상징적”이라고 응수했다. 삶의 모든 흔적들이 검은 물속으로 가라앉던 그 순간, 기우는 하필 그 산수경석 하나를 쥐고 나와 대피소에서 잠을 청할 때  조차 끌어안고 있던 것이다. 

봉준호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각인의 기제로서 그 돌이 중요하다고 언급한 바 있다. “민혁은 초반에 사라지지만 계속 관객 눈앞에 어른거려야하는데 그 장치가 돌이다. 기우는 돌을 들고 있지만 사실은 깔려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 <기생충>에서 돌이 처음 이 집안으로 들어오던 순간에는 집중하지만 그것이 어떻게 사라졌는가는 잘 기억하지 못한다. 에필로그에 가까운 이 영화의 후반부에 산수경석은 망상에 가까운 기우의 내래이션(새로운 계획)이 시작되는 즈음, 어느 계곡 물 속에 조심히 놓여진다. 살해현장에 있었을 그것이 어떻게 기우의 손으로 되돌아갔는지, 왜 그 돌은 기어이 기우의 “계획”이 또다시 언급되던 순간에 계곡에 놓여져야만 했는지 감독은 구지 설명하지 않는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적 매력 중 하나는 이러한 서사적 구조 속에서 발견되기도 한다. 쉽게 눈에 띄진 않지만 치밀하게 서사적 변곡 지점에서 반복적으로 작동하는 어떤 모티브가 있는 것이다. 가령 <마더>(2009)에서 엄마의 처연한 춤사위와 작두질(오프닝 타이틀 시퀀스, 후반부 고물상 노인의 살해 후 형사의 방문, 엔딩 관광버스)이 그러했던 것처럼 이 영화에서 ‘산수경석’ 혹은 그저 무거운 돌덩이에 불과한 이것은 계획과 실패, 망상과 현실, 상징과 페티시가 작동하는 결정적 순간마다 기묘하게 움직인다.

그렇다면 그 돌은 왜 그 자리로 되돌아가야만 했는가? 서사의 필연성 보다는 감독의 무의식 혹은 의지에 가까운 이것은 정작 ‘상징적’이라고 찬탄하던 기우에게는 ‘물신(페티쉬)’으로 작동하고, 영화적 차원과 관객에게는 그야말로 하층 노동계급의 부재하는 ‘계급의식’과 망상(결코 도달할 수 없음)을 의미하는 ‘상징’으로 기능한다. 물신은 존재할 수 없는 어떤 것을 ‘거기 있다’고 믿는 환상의 구조(프로이드적 의미의 물신)이며 혹은 이데올로기적 효과(맑스적인 의미에서의 물신)이다. 한갓 돌덩어리에 불과한 이것에 대해 기우는 소망을 투사하고 주술적 효과를 기대한다. 당연히 그것은 실패한다.


현자의 돌, 반복된 실패

기우에게 그 돌, 산수경석은 흡사 연금술사들이 소망했던 “현자의 돌(철학자의 돌)”처럼, 결코 이룰 수 없는 소망 혹은 반복된 실패의 상징이다. 그 상징의 한 가운데 민혁이 존재한다. 앨리스의 빨간 토끼처럼 기우네 가족을 절망적 심연으로 안내하고 사라지는 민혁은 봉준호 감독의 말처럼 기우에게 계속 따라붙는 이름이다. 곤경 속에서 조차 ‘민혁이라면 어떻게 했을까’를 되뇌이던 그는 지속적으로 민혁을 모방한다. 그의 말을 따라하고(다혜에게 정식으로 사귀길 청하겠다는 것), 기세를 모방하고(노상방뇨하는 남자를 응징하는 것), 판단을 추정한다. 그러나 기우가 소망했던(물신화했던) 주술적 마법은 작동하지 않고, 그 돌은 그저 기우가 감당하지 못할 계획이나 폭력의 수단으로만 소용되며 그것마저도 번번이 실패한다. 

영화 속에서 기우는 자신의 기세를 증명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그 돌을 두 번 들고 나선다. 처음엔 반지하 창 밖에서 노상방뇨를 하는 남자를 응징하기 위해 들고 나서지만, ‘오버한다’며 제지하는 아버지에 의해 돌은 ‘물벼락’으로 대체된다. (이 응징은 폭우와 수해가 되어 고스란히 그들에게 되돌아온다) 두 번째 순간은 다송의 생일파티, 2층에서 지하로 내려가는 순간에 등장한다. 그 돌이 자신에게 따라 붙어왔다고 믿는 그는 무모한 계획의 수단으로서 그 돌을 들고 나서는 것이다. 그러나 그 돌은 그의 손에서 결국 미끄러져나가고, 감독의 말처럼 그는 결국 돌에 의해 깔리고 만다. 

기우는 실패한다. <기생충>에서 그것은 거의 필연적인 결정처럼 보인다. 영화 속에서 여러 순간 반복되는 “계획”이라는 단어는 실패의 동의어로 간주되며, 심지어 봉준호 감독은 기우가 계획과 소망을 입 밖으로 내뱉는 순간마다 냉혹하리만치 그것은 불가능한 현실이라는 것을 상기시키듯 다음 장면을 이어간다. 이 영화에서 기우가 자신의 은밀한 소망을 입 밖으로 꺼내는 두 번의 순간은 그래서 중요하다. 

첫 번째 순간. 박사장 가족이 캠핑을 떠나자 기우네 가족은 그 부르주아의 저택을 제 집인양 향유한다. 그 쾌락과 모방의 놀이가 한밤중의 거친 술판으로 이어졌을 때, 기우는 다혜에 대한 자신의 계획을 이야기한다. 물론 그것은 민혁이 그에게 고백했던 다혜에 대한 감정을 흉내 내는 것에 불과하다. “대학교 들어가면 정식으로 사귀자고 하려고요.” 그리고 거기서 더 나아가 기우는 기정에게 “만일 이 집이 우리게 된다면”이라는 소망을 드러낸다. 그러나 그 순간 이들의 부르주아적 삶의 망상은 예의 초인종과 함께 깨져나간다. 이른바 실재(the real)의 침입, 문광의 방문과 함께 새로운 지하공간이 열리는 그 순간 그들이 맞닥뜨리게 된 현실은 또 다른 하층 노동계급과의 적대와 경쟁이다. 그리고 더한 공포는 그들이 끊임없이 착하다, 좋은 분이다, 존경한다, 죄송하다고 읊조렸던 주인의 귀환, 진짜 부르주아의 당도와 함께 펼쳐진다. 선을 넘어버린 한밤중의 환상게임은 이내 당도한 ‘현실’과 함께 이 영화에서 가장 격렬하고 극적인 움직임들을 만들어낸다. 욕설과 폭력, 경쟁과 적대, 굴욕과 비참이 교차하는 이 활극은 부르주아의 교만과 섹스를 치욕적으로 참아내고 숨어야만 했던 거실 탁자를 벗어나는 순간 잠시 멈추는 것 같았다. 그러나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봉준호 감독이 이들에게 상기시키는 현실의 지위는 벌레처럼 기어 나온 저택으로부터 저 아래 반지하로 이어지는 끊임없는 하강 혹은 추락의 스펙터클(폭우와 와이드한 롱숏으로 만들어내는 이미지의 비감), 그리고 그 끝에서 마주하게 되는 절망의 또 다른 현장이었다. 수해로 잠겨버린 반지하의 처참한 몰골. 이들이 직면한 현실의 창은 겹겹이 처참하며, 역설적이게도 이들의 비참은 이 영화의 가장 큰 스펙터클로 전유된다. 

에필로그, 도착하지 못할 편지 

“아버지 저는 오늘 계획을 세웠습니다. 근본적인 계획입니다. 돈을 벌겠습니다. 아주 많이. 대학, 취직, 결혼 다 좋지만 일단 돈부터 벌겠습니다. 돈을 벌면 이 집부터 사겠습니다. 이사 들어가는 날에는 저는 엄마랑 그냥 정원에 있을게요. 햇살이 워낙 좋으니까요. 아버지는 그냥 계단만 올라오시면 됩니다.” 

기우의 소망이 실패할 것임을 확정하는 두 번째 순간은 기우가 아버지에게 쓰는 편지를 통해서이다. 이 편지는 목적지에 도달할 수 없다는 점에서 실패할 것이지만, 더 큰 실패는 그 계획이 역시 부질없고 무모하며 무능한 것임을 확정하는 영화적 수사학을 통해 드러난다. 기우가 아버지에게 새로운 계획을 진술하는 순간 영화는 침잠된 톤으로 어쩌면 기우가 정말로 그 소망을 이루게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후일담 같은 이미지를 제시한다. 부동산 업자의 디테일한 호들갑, 조심스레 지하 계단을 올라오는 기택, 그리고 쏟아지는 햇살아래에서 말없이 이루어지는 재회. 그러나 이내 롱숏으로 아득하게 포착되는 그 재회는 다음 컷과 함께 현실로의 귀환을 촉구한다. 서서히 틸다운 되는 카메라는 반지하, 지상의 발아래 놓인 창과 그보다도 더 아래에 앉아있는 기우를 비춘다. 도달할 수 없는 편지를 읽고 있는 기우의 얼굴에서 우리는 그의 소망과는 정반대의 무력하고 비루한 실패자의 얼굴을 마주한다. 이 영화의 오프닝과 정확히 대구를 이루는 이 장면에서 기우는 여전히 발아래 세상, 양말과 변기 따위가 그나마 이 집의 가장 높은 자리에 위치할 수 있는 그런 현실로 다시금 돌아와 있는 것이며, 기우의 소망 이미지는 망상으로 확정되며 괄호 안에 묶여버린다. <기생충>은 계급상승이라는 비천한 욕망을 허용하지 않으며, 전복의 정치학은 상정조차 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 에필로그를 구성하는 감독의 선택 및 방법에 대한 몇 가지 소소한 궁금증. 박사장에 대한 죄의식을 지닌 기택은 왜 현실적 단죄(사법적 처벌과 수형생활)보다 더 가혹한 지하 공간에 스스로를 감금해야만 했는가. 물론 이 선택은 공간의 정치학과 생존 게임으로 표명되는 이 영화에 있어서 보다 완결적이고 맞추어진 퍼즐(또다시 누군가 그 공간으로 전락해야만 하는 게임)처럼 보인다. 그리고 기우의 웃음. 몇 달 만에 의식을 회복한 기우는 얼마간 계속 웃는 표정을 짓는다. 병원 병상에서, 재판정에서 그리고 심지어 여동생의 영정을 마주하는 그 순간조차 그는 웃어야만 한다. 흡사 <올드보이>(박찬욱, 2003)의 엔딩에서 웃고 있던 오대수의 그것처럼, 기우의 웃음은 그가 직면한 현실과 충돌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기우의 다음 선택지. 그는 왜 그 잔혹한 공간(대저택)으로 되돌아가 그것을 반복적으로 조망해야만 했는가(물론 영화에서 아버지의 모르스 부호는 그에게 전달되어야만 했기에), 왜 에필로그에서 여성들은 지워지고 아버지와 아들의 목소리와 정감에 집중하는가, 왜 산수경석은 그의 부질없는 계획의 반복에도 불구하고 계곡 물 속에 다시 놓여져야만 했는가, 그리고 왜 기우의 망상은 괄호 안에 가둘 것임이 명백함에도 화면 안에서 관객들을 잠시 오인케 하며 재현되어야만 했는가.

사실 이러한 소소한 질문들은 장르적 구조를 침입해오는 현실적 실체들과의 긴장 속에서 생겨난다. 통상적인 장르 영화 속에서라면 사건이나 캐릭터의 극단성, 현실적 인과론 따위는 크게 질문되지 않는다. 장르적 포뮬라와 컨벤션 속에서 영화는 인위적 실체와 쾌락으로 간주되면 완결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봉준호 감독의 영화에서는 자꾸만 장르와 부딪히는 현실의 틈입, 그 사이 공간을 비집게 된다. 장르적 구조 안에서 창조된 현실적(비장르적) 인간의 캐릭터들, 일루전과 인공적 구조물로만 간주할 수 없게 만드는 감독의 집요하고도 정치한 현실적인 질문들. 부조리한 세계를 장르적으로 치환하되 극장 밖까지 짊어지고 가게 만드는 윤리적인 질문들, 불안의 감각들. 이 틈입 속에서 <기생충>은 자꾸만 영화에서 말해지지 않은 어떤 것들 혹은 감독이 구지 선택해서 제시했던 장치들에 대해 그 선택의 의지 혹은 무의식은 무엇이었는지 질문하게 만드는 것이다. 
 

계급 도식과 엑조티즘

<설국열차>와 <기생충>은 전면적으로 계급 문제를 제기한다. 가상 세계를 배경으로 질주하는 기차칸의 위치로 계급을 위계화하고 지배와 피지배, 저항과 억압, 절망과 희망의 문제를 배치했던 <설국열차>와 달리 이번 영화 <기생충>은 동시대 한국사회, 극단적 계급적 분할과 기시감 있는 현실의 풍경들을 절묘하게 교차시키며 서사를 구성한다. 그런 점에서 분명 <기생충>은 한국 관객에게 보다 촉각적인 풍경들이지만, 동시에 계급 재현의 전략에 있어서는 엑조티즘에 가까운 풍경과 타자의 스펙터클을 만들어낸다. 부르주아 엑조티즘(박사장 저택의 와이드한 공간과 값비싼 소품들) 혹은 프롤레타리아 엑조티즘(반지하를 가득 채운 빈곤의 흔적들. 방바닥의 끈적거림, 벌레와 소변)으로 간주될 수 있는 두 계급 공간의 시각적 재현은 이 영화에 응축된 공간의 정치학 혹은 계급 정치학을 위한 미장센이자 표상이지만 한편으론 관람자 위치에서 그 극단적 어느 계급과도 동일시 할 수 없는 미묘한 거리감 또한 만들어낸다. 이 영화가 기택네 가족 특히 기우를 중심으로 안내되는 카메라의 동일시 메커니즘을 작동시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것은 아마 이들이 영화적 사건을 통해 계급 의식을 성취해가는 것이 아니라, 신자유주의의 질서와 이데올로기에 철저히 순응하고 포획된 주체들로 재현되기 때문일 것이다. 본질적 모순이 아니라 지배질서가 유포한 관념과 경쟁의 틀 속에서 말초적으로 반응하고 오인하는 자본주의의 선한 주체(good subject) 혹은 무지한 주체들 말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자본주의 내 본질적인 기생자들인 부르주아들을 선하고 존경할만하다고 오인하며, 같은 계급을 적대한다. 봉준호 감독은 지옥도 같은 신자유주의 대한민국의 보수화되고 무력화된 계급 군상을 포착하되, 그들의 저항이나 연대와는 선을 긋는다. 

그런 점에서 <기생충>은 올해 <미안해요 리키>(2019)로 다시 돌아온  켄 로치 감독의 작품세계와는 확연히 구별된다. 물론 봉준호 감독과 켄 로치 감독은 잔혹한 자본주의(신자유주의)의 폭력 속에서 불행과 생존의 위기로 내몰리는 개인을 묘사하고 그 폭력의 구조를 전제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그러나 켄 로치가 창조하는 영화적 주인공들은 사회적 구조의 희생자들이고 공감과 연대의 명백한 대상이다. 최근작이었던 <나, 다니엘 블레이크>(2016)나 <미안해요 리키> 뿐만 아니라 그의 오랜 필모그라피 속에서 주인공들은 자본주의 구조 내 착취당하고 소모되며 희생되는 개인들임과 동시에 서사와 함께 ‘각성하는 개인’ 혹은 ‘관객’을 유도한다. 다시 말해 자신의 계급성을 인식하지 못하는 전도된 관념들로부터 자신이 발 딛고 서 있는 계급적 의식을 터득하는 과정으로서의 주체들로서 그들은 ‘계급의식’을 성취하는 것이다. (켄 로치 영화 속에서 가장 처참하게 현실을 묘사했던 작품은 <네비게이터>이다.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속에서 하루아침에 경쟁관계로 내몰린 노동자들은 자신의 일자리를 지키기 위해 동료의 비참한 죽음을 방치한다. 그러나 관객은 동료 노동자의 죽음을 방관하고 방치했던 그들을 비난하거나 미워할 수 없다. 극중 인물들의 무력함과 죄의식은 영화가 끝난 후 고스란히 동시대를 살고 있는 관객들에게 전달된다.) 

이상하게도 이번 영화 <기생충>의 캐릭터들이 당면한 비극은 일정부분 타자화된다. <마더>에서 아들을 지키기위해 살인까지 저지른 엄마에게조차 동일시되고 연민했던 것과는 분명 다른 체감이다. 그것은 아마도 이미 대한민국 현실에서 충분히 목도하는 무한경쟁의 각축장, 계급에 무지한 채 이기적인 생존 감각으로 자신보다 더 못한 사람들을 혐오하고 밀쳐내는 일상의 풍경들에 지쳐 영화 속에서 그러한 그들을 다시금 목도하는 과정은 결코 편치 않기 때문이다. <기생충>의 군상들은 정확히 현실을 반영하거나 혹은 인간의 본질을 장르적으로 변형하고 있지만 (계급이기 이전에 인간이 지닌 분열적이고 모순적인 측면들, 그 복잡한 내면들이 특정 상황 속에서 어떻게 행동하고 무엇을 욕망하는지에 집중하는 것), 그것은 분명 불편한 진실이다. 

계급과 폭력, 사회적 시스템의 문제는 이 영화가 공개되기 전부터 봉준호 감독이 언급했던 작품들 속에서도 다양하게 묘사되어 왔다. 20세기 초반에 프랑스에서 벌어졌던 파팽자매 살해사건(하녀로 들어간 어린 자매들이 영문 없이 여주인과 그 딸을 참혹하게 살해한 사건. 이들은 살해의 이유에 대해 명백하게 밝히지 않았으며, 다만 재판정에서 “우리도 그들의 피부를 갖고 싶었어요”라는 말을 함으로써, 이른바 계급 살해의 대표적인 사건으로 언급된다.)을 모티브로 하고 있는 클로드 샤브롤의 <의식>(1995)에서 하녀의 돌발적 살해행각은 계급적 착취를 교양주의와 호혜의식, 선의로 위장하고 있는 부르주아의 위선에 대한 폭로로서 자행된다. 조셉 로지의 <하인>(1963) 역시, 사회적으로 주어진 계급적 지위가 집안 내부 공간에서 어떻게 주인과 노예의 역할과 위계를 만들어내는지 묘사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특히 이 영화에서 부르주아 여성이 하인을 모멸하기 위해 그의 냄새를 노골적으로 지적하고 비하하는 순간은 <기생충>에서 계급 냄새로 환기되는 것과 겹쳐진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감독의 계급 정치학이 가장 명료하게 드러나는 순간은 중반부를 지나, 폐쇄적인 집안 내부에서 주인과 하인의 관계가 역전되면서부터이다. 집안 내부에서 계급이 지워지는 순간, 노동능력이 없는 부르주아는 무능함과 의존성, 유약함으로 간주되고, 실질적 자기 재생산이 가능한 노동계급-하인은 권력을 쥐게 된다. 미카엘 하네케의 <퍼니 게임>(1997)은 계급 호러 그 자체이다. 이 영화는 감독의 “스릴러 장르에 대한 패러디”라는 말처럼 장르적 컨벤션을 위반하고 재구성하는 형식적 기교를 과시하지만 더욱 섬뜩한 것은 오히려 살해극의 동기가 오로지 ‘계급 적대’ 그 자체만으로 한정되기 때문이다. 이른바 ‘억압된 것의 귀환’이라는 호러 장르의 공식을 계급 정치학으로, 장르 패러디로 구성한 것이다.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은 소재나 문제의식이라는 측면에서 위에서 언급한 영화들과 일정 부분 흥미로운 지점을 공유하지만 새로운 장르 자의식과 형식적 수사학을 구성하는 지점으로 나아간다. 장르적 요소들을 탈구시키지만 하네케처럼 과시적이거나 관객심리를 공격하지 않으며, 켄 로치처럼 계급의식을 성취하거나 연대하진 않으나 무력하고 비참한 상황에 내몰린 그들에 대해 연민하고 응시한다. 조셉 로지의 <하인>처럼 공간의 정치학과 흡사 제 3의 시선을 구성하는 유려한 카메라 워킹을 캐릭터화 하지만 캐릭터들의 내적 심리에 보다 밀착하고 동기화한다. <기생충>은 표면적으로 명백하고 이분법적으로 도식화된 계급세계를 묘사하는 듯하지만, 감추어진 지하 너머 그 심연의 공간처럼 자신만의 형식 언어가 층층이 구조화된 세계이다. 그 구조의 심연 속에서 영화사의 궤적을 향유한 시네필의 흔적을 발견하게 되는 것, 또한 그것이 어떻게 오리지널리티를 지닌 자신만의 수사학으로 성립될 수 있는가를 해석하는 것은 꽤 흥미로운 작업이다. 역시 시네필의 영화는 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읽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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