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셀린 시아마, 2019

by.권은선(서울국제여성영화제 프로그램위원장) 2019-12-27조회 8,248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스틸

셀린 시아마의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2019)은 두 여인의 짧은 기간 동안의 사랑과 그 기억에 대한 영화이다. 영화는 화실에서 초상화 수업을 하던 마리안느가 ‘치맛단에 불이 붙은 한 여인’을 묘사한 그림을 발견하고, 그림이 환기시키는 추억을 회상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마리안느는 정혼자에게 보낼 엘로이즈의 초상화를 그려줄 것을 청탁받고 외딴 섬에 도착한다. 레즈비언 로맨스로서, 이야기의 중심은 엘로이즈와 마리안느의 사랑과 이별의 과정에 있지만, 엘로이즈와 마리안느의 동성애적 관계의 서사적 진전은 더디게 진행되고 지연된다. 이전에 초상화 모델이 되기를 거부했던 엘로이즈와 ‘산책 친구’로 가장하여 몰래 초상화를 그려야 하는 마리안느 사이의 긴장과 서로를 향한 관심이 서서히 차곡차곡 화면을 채워가지만, 영화는 하녀 소피를 포함한 세 여자의 유대내지는 연대적 관계 묘사에 집중한다. 

애당초 여자들만 있는 공간이었지만, 가부장제의 대리인인 엘로이즈의 어머니가 잠시 집을 비운 후, ‘집’은 다른 공간으로 전환된다. 그 곳은 신분도 계급도 ‘아버지’도 없는 해방의 공간이 된다. ‘아가씨’, ‘화가’, ‘하녀’는 서로에게 살가운 친구가 된다. 하녀는 수를 놓고 아가씨는 음식을 장만한다. 하녀는 앉아 있고 아가씨는 서서 가사 노동을 한다. 셋이서 나란히 식탁에 앉아 음식을 장만할 때, 삼각대형으로 둘러앉아 카드놀이를 할 때, 바닷가로 산책을 나갈 때, 잘 짜인 화면 구도와 카메라 움직임은 그들의 수평성을 강조한다. 이 해방의 공간에서 흥미로운 장면은 세 여자가 함께 책을 읽는 부분이다. 셋은 오르페우스신화를 읽고 있다. 이야기의 절정 부분, 에우리디케가 하데스의 세계, 지하의 세계로 다시 끌려 들어가는 장면에서, 세 여성은 각자의 해석과 의견을 제시한다. 예컨대, 소피는 지상의 입구에 도달하기까지 뒤를 돌아보아서는 안 된다는 약속을 어긴 오르페우스의 행동에 분노한다. 엘로이즈는 에우리디케가 운명에 순응하고 자신의 방식으로 사랑을 지키기 위해서 오르페우스를 불러 뒤를 돌아보게 함으로써, 그녀의 의지로 지하세계로 돌아간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엘로이즈의 해석은 영화의 의미화 층위에서 그녀가 마리안느와의 관계에서 행할 선택에 반향하며, 이후 마리안느의 그림으로 재차 반영된다. 그러나 이 장면이 진정 흥미로운 것은, 그것이 ‘여성관객성’에 대한 영화의 자기반영적 성찰로서 가지는 울림 때문이다. 텍스트에 저항하고, 결을 거슬러가며 독해하고, 행간을 채우고, 의미를 전유하는 과정은, 압도적으로 가부장적인 텍스트들에 둘러싸여 있는 여성들이 자신들의 경험과 분노, 지성을 이용하여 쾌락을 만들어 가는 여성관객성의 핵심을 관통한다. 또한 “결국 서사적 해결은 이야기를 만든 자의 선택”이라는 말을 통해, 스토리텔링 장치의 남성중심적 위치와 그 이데올로기적 지지대를 소환한다. 
 

이러한 세 사람의 유대는 소피의 임신중절 과정을 함께 히는 것으로 확장된다. 원치 않은 임신에, 세 여성은 여성들 사이에 구전으로 전해지는 민간요법에 대한 지혜를 모아 시행하지만 실패한다. 영화의 표제가 된 미술 작품이 탄생하는 밤의 해변 장면은 고혹적이고도 아름답다. 밤에 여성들이 해변에 모이고 이야기를 나누고 노래를 하는 장면은 신비로운 비의적 아우라에 쌓여 있다. 아마도 이곳에서 여성들은 그녀들만의 비밀스런 정보를 알음알음 교환하고 고통을 나누는 듯하다. 셀린 시아마는 여성들의 모임의 비의적 하모니 속에 관객들을 참여시킨다. 그리고 바로 그곳, 여성들만의 비밀의 세계에서 엘로이즈의 치마에 불이 붙는다. 즉 그녀의 욕망이 타오른다. 소파시술 장면은 지금의 관점에서도 놀라움을 주는 것으로서 여성 이슈에 대한 시아마의 깊은 탐구심이 드러나는 장면이다. 지금이나 두 세기 전이나 여성들은 때로는 목숨을 걸고 위험을 감수하며 아이를 유산한다. 가려지고, 기록되지 않고, 재현되지 않은 여성의 역사에 대한 시아마의 소명 의식은, 집에서 엘로이즈가 소파시술 장면을 재연하고 마리안느에게 그리라고 할 때, 자기반영적으로 드러난다. 
 

무엇보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시선 그 자체에 대한 영화이다. 영화는 질문한다. 여자가 여자를 그린다면, 여자가 여자를 응시한다면, 어떤 변화가 생성될까. 셀린 시아마가 한 인터뷰에 밝혔듯이, 1770년대 당시 여성 화가는 거의 존재하지 않거나 혹은 마리안느처럼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림을 발표하였다. 여성 화가들에게 초상화는 배타적으로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한에서 허용되었다. 역사적으로 초상화는 남성 화가의 전유물이었다. 초상화에는 초상화가의 시선이 구조적인 형태로 자리 잡게 되고, ‘결혼을 위한 초상화’라는 분명한 목적은, 보는 자(화가와 관객)의 위치를 남성으로 못 박는다. 이 때 포즈를 잡는 여성은, 남성의 시선을 경유하여 자신을 바라본다. 정혼자의 마음에 들만큼 예쁘게, 정혼자의 성욕을 불러일으킬 수 있도록 에로틱하게, 몸을 비틀고 ‘적당히’ 노출하도록 요구받는다. 남성 화가는 바라보고 행위하고, 여성 대상은 자신(의 이미지)를 바라본다. 그녀는 남성의 응시를 내면화함으로써 자신의 이미지를 구성한다.

‘포즈’란 시선이 오고가고 부딪히는 과정이며 포즈를 체화하는 몸은 시선의 전쟁터이다. 엘로이즈가 이전 화가에게 포즈를 거부했던 것, 그리고 화가가 엘로이즈의 얼굴을 그리지 못하고 뭉개놓았던 것이 엘로이즈가 남성 화가의 일방향적 응시에 저항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유추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화가는 자신의 응시의 좌절과 그 분노감을 그림의 구조 속에 새겨놓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엘로이즈와 마리안느의 작업은 응시를 주고받음의 상호작용과정으로 전화시킨다. 마리안느의 시선 뿐 아니라, 엘로이즈의 시선이 카메라와 대사를 통해 명료화된다. 마리안느와 엘로이즈는 응시를 통해 서로의 미세한 표정의 움직임과 버릇, 그리고 사랑의 기미를 포착한다. 이때 셀린 시아마가 전경화하고 있는 것은 시각문화예술 전반에서의 시선의 문제 그 자체이다. 그것은 시선의 구조화를 둘러싼 영화 장치의 젠더 관계를 질문하고 드러내고 새롭게 구조화하는 것이다. 여자가 여자를 바라보고, 사랑의 눈으로 응시하고, 상호적으로 주고받는 과정은, 엘로이즈의 몸에 마리안느의 얼굴이 겹쳐지는 누드화로 인장된다. 이는 서구의 회화 역사에서 보기 방식의 양식화를 통해 남성 관객 위치를 새겨 넣는 지배적 형식으로서의 누드화를 레즈비언의 에로틱한 시선으로 일순간에 전복시키는 순간이다. 귀족 가문의 거실에 엘로이즈의 초상화가 놓일 것이라면, 그 누드화는 공적 초상화 밑면의 ‘네가 이미지’, 즉 음화(陰畫)이자 레즈비언 음화(淫畫)인 것이다.     

시각화와 관련하여,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에서 가장 인상적인 비전은, 초상화같이 포착된 결혼식 드레스를 입은 엘로이즈의 이미지이다. 그 비전은 모순적 상황과 내적 갈등이 깊어지는 순간들에 마리안느에게 출몰한다. 검은 어둠을 배경삼아 정면에 시선을 둔 채 서있는, 엘로이즈의 전신을 담은 그 ‘초상’은 흡사 유령 같다. 깊은 어둠이 엘로이즈의 형상을 허공에 매단 듯한 느낌을 자아낸다. 이 비전은 마지막 장면에서 이야기의 실제 안으로 봉합됨으로써 일종의 플래시포워드로 재위치화 되는데, 이 이미지 역시 결혼 초상화의 밑면에 자리한 네거티브 이미지이다. 이 유령 신부의 이미지는 여성들의 생기, 여성들의 성애적 관계의 죽음으로서의 결혼의 의미를 드러낸다. 가부장제 사회 안에서 결혼 제도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의 의미는 유령으로서의 삶이다.  
 

꽤나 긴 길이의, 내레이션이 동반된 에필로그는 십중팔구 진부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의 에필로그는 떨리는 화표면의 진동을 통해 보기 드물게 감동적인 영화적 순간을 만들어 낸다. 두 사람의 이별 후 다른 화가의 시선과 손으로 그려졌을 엘로이즈의 초상화를 보며 관객들은 그 시각화의 과정을 예측하게 된다. 엘로이즈가 자신의 삶을 어떻게 정의 내리고, 어떻게 재현되기를 원하였으며, 초상화가와 어떤 시선의 협상을 하였는지를. 아울러 그것은 여성 섹슈얼리티의 한 측면을 강력한 힘으로 증언하는데, 이성애 실천 가운데 말소 되지 않는 동성애적 욕망의 존재이다. 그것은 마지막 장면에서 가장 ‘영화적인’ 방식으로 전달된다. 비발디의 음악을 매개로 한 엘로이즈의 얼굴 클로즈업은 기억의 한 챕터에 넣어두었던 여성 성애의 주이상스의 현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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