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조, 산책하는 침략자 구로사와 기요시, 2017

by.정지연(영화평론가) 2019-02-20조회 13,420

숏을 찍는다는 것

“하스미 선생님께 여쭙고 싶은 게 있습니다. 사실 최근에 고민이 하나 생겼는데요. 숏을 찍을 때, 한 컷을 찍을 때 어느 정도의 힘을 들이는 게 좋을까 하는 겁니다. (중략) 영화는 숏이 생명이지요. 제가 가진 기술이란 그것밖에 없어요. 그것 외에 제가 잘하는 게 없는 거죠. 그렇지만 숏으로 어디까지 승부를 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드는 거에요.”

“열심히 숏을 찍으려는 노력은 어디까지 전달될까요.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모르는 채로 두는 게 좋은 건지, 억지로라도 알아달라고 이야기를 하는 게 좋은 건지 항상 고민됩니다.”

올해 가장 흥미롭게 읽었던 책 중에 한 권인 『영화 장화』에 나오는 대목이다. 이 책은 일본 영화 평론가 하스미 시게히코와 그의 제자이자 일본 영화계의 작가주의를 대변하는 영화감독 구로사와 기요시 그리고 아오야마 신지가 나누는 긴 대담집이다. 하스미 시게히코의 일본 영화 내 영향력은 대단했다. 70-80년대 그가 대학에 개설해 강의했던 “영화 표현론”은 영화를 분석적으로 바라보고 이해하는 새로운 방법을 제시했고, 그의 평문들은 젊은 영화광들에게 거의 교본처럼 낭독되었다(심지어 그의 글을 노래로 만들어 불렀다). 당시 이 수업을 통해 구로사와 기요시와 아오야마 신지가 영화계로 입문하였다. (나는 이 두 감독에게 도대체 하스미 시게히코의 강의 방식과 내용이 무엇이었기에, 그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열광했는지 물은 바 있다. 아오야마 신지는 관념을 구체화시키는 쇼트를 발견하고 그것이 어떻게 영화 속에 구축되는지, 그 구성원리를 발견했던 방식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다. 최근에 만났던 구로사와 기요시 역시 쇼트의 원리에 관해 이야기 했다. 경제적이고 기술적으로 가능한 쇼트를 통해 영화의 의미와 형식을 축적해 나가는 방법들, 그것은 그가 현재 일본 대학에서 영화과 학생들을 가르치는 방법론이기도 하다.) 

『영화 장화』에서 이들이 나누는 대담은 때론 당혹스러우리만치 담대하고 솔직하다. 그들이 존경해마지않는 감독과 작품들에 대해서는 찬탄과 동경을 쏟아내지만, 반면 그들이 결코 동의할 수 없는 영화와 감독들에 대해서는 혹독한 비판과 조소를 마다하지 않는다. 영화에 관한 날카로운 시선과 언어들을 가진 이들의 거침없는 이 대화는 오래전, 스승과 제자로 만나 긴 시간을 함께해온 이들이 나눌 수 있는 아주 사적이고 주관적인 취향의 고백이자, 이론과 현장을 넘나들며 체화되고 정립된 영화 존재론에 관한 근본적인 질문과 고민들, 변화하는 영화의 위상과 환경에 대한 불안과 매혹을 모두 포함하는 이야기들이다.

그러다 불현듯, 가장 겸손한 이야기를 풀어나가던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이 자신의 오랜 스승에게 새삼 진지하고도 근원적인 질문을 던진 것이다 “쇼트를 만든다는 것.” 무려 사십여 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영화를 만들고 고민해왔던 세계적인 거장에게도 영화는 여전히 변화와 질문으로 가득 찬 모호한 대상인 것이다.

예조

숏을 찍을 수 있는 자

하스미 시게히코는 구로사와 기요시를 당연히 ‘숏을 찍을 수 있는 감독’이라고 칭한다. 단순히 이야기를 전개하는 기능적이고 기술적인 컷들이 아니라, 의미와 형식을 갖춘 가장 영화적인 언어를 구축할 수 있는 예술가인 것이다. 구로사와 기요시에게는 분명 그만의 언어와 모드가 존재한다. 설혹 크레딧을 보지 않고 마주하게 된 영상이라 할지라도, 보는 순간 ‘기요시의 영화구나, 내적 불안과 위기를 파고드는 기묘한 세계가 곧 시작되는구나’를 알아보게 하는 그런 영화적인 언어들이 있다. 웨스 크레이븐 감독이 영화관 체험을 어둠과 빛이 교차하며 시작되는 부두교 주술사의 환각적 제의에 비유하듯(영화관에 드리워진 어둠 사이로 스크린에 빛이 투사되는 순간, 부두교 주술사의 제의가 시작될 때 비현실적 사태를 기대하는 참여자의 흥분이 시작되는 것과 흡사하다고 비유하는 것), 구로사와 기요시 영화는 늘 시작과 함께 새로운 세계로의 진입을 알리는 묘한 매혹과 설렘, 긴장과 공포를 수반한다. 

<예조, 산책하는 침략자 予兆 散歩する侵略者 劇場版>(2017)의 오프닝도 바로 그렇게 시작된다. 하스미 시게히코와 구로사와 기요시의 표현대로 ‘숏을 찍는 것’으로 시작되는 것이다. 붉은빛의 철제 안전망이 둘러진 공동주택의 현관 앞 계단. 안전망 저편으로는 도시 외곽의 주택들이 보이고, 이내 한 여성이 계단을 올라와 현관문을 열고 집안으로 들어서는 모습을 측면으로 비춘다. (문을 열고 들어선다는 것. 기요시 영화에서 ‘문이 열린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만지는 행위’(접촉)와 더불어 가장 큰 사건의 추동 행위로 쓰인다) 다음 컷은 현관 입구에 놓인 켤레의 남성 구두, 그리고 조금 전 실내로 들어선 그녀의 발과 다리. 우리는 여전히 여성의 얼굴을 볼 수 없지만, 영화 속 여성은 남성 신발을 통해 집안에 남편이 귀가해 와 있음을 알아챈다. 

그리고 이어지는 예의 다음 컷. 이 쇼트야 말고 첫 번째 붉은 철제 안전망이 드리워진 현관 밖 전경을 포착한 장면과 더불어 기요시의 영화적 이미지와 카메라 움직임 모든 것을 망라한다. 기요시의 많은 영화에서 그러하듯, 집안 내부는 여러 격자로 구분되어 커튼이 드리워져 있다. 열린 창밖에서 들어오는 바람에 의해 마치 생명을 지닌 듯 텅 빈 공간에서 너울거리는 커튼의 형상. 창밖에서 비추는 부드러운 햇살과는 대조적으로 죽은 듯이 가라앉은 실내 분위기. 이 화면 내 공간 안으로 현관을 통과한 여성이 거실로 들어와 집 안을 살피다 문득 뒤쪽 커튼 너머를 향해 시선을 돌리고 남편을 부른다. 이때 프레임 외부 공간을 향한 그녀의 시선과 몸짓은 무언가 심상치 않은 것을 발견한 듯 잠깐 멈춘 채 지속되고, 이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화면 밖 공간으로 빠져나간다. 이때까지 관객은 그녀가 무엇을 보았는지 알 수 없다. 그녀가 프레임 밖으로 빠져나간 뒤, 카메라는 천천히 움직여 (흡사 유령적 시선처럼) 그녀가 머물러 응시했던 시점으로 관객을 안내한다. 그녀의 시선이 머물렀던 커튼 너머의 공간에는 한 치의 미동도 없이 서 있는 남자가 있다. 매우 천천히 그러나 불길한 기운을 암시하며 움직이는 카메라 워킹을 통해 발견되는 남자의 형상은 빛의 조작으로 만들어진 그림자와 더불어 기괴하고, 그것은 흡사 기요시의 전작 <회로>(2001)에서 목격했던 유령의 형상을 연상케 한다.(벽이나 난간에 서 있다 얼룩으로 변하며 유령이 되어갔던 형상들). 

잠시 뒤, 멈춰 선 화면 안으로 여성이 다시 들어와 남자의 뒷모습을 길게 바라본다. 유령과도 같은 존재감으로 움직이는 카메라가 운동과 정지, 시선과 응시를 구성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기요시가 시작하는 이 새로운 영화적 세계에서, 저 남자에게 이미 무언가 사건이 도래했으며 여자는 이 짧은 순간에 그 모든 불안을 감지했음을 알게 된다. (기요시의 이러한 쇼트에서 카메라의 시선과 움직임은 할리우드 고전기에 구축된 제도적 재현 양식으로서의 촬영과 편집의 비가시적 메커니즘처럼 인지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철저히 카메라의 유동적 시선과 위치의 전능성을 가시화하며, 영화적 디제시스와 관객, 그 사이에 초월적으로 존재하며 내레이션을 전개하고 분위기를 형성하는 주체가 된다) 

여자가 한참이나 남자를 말없이 응시하고 나서야, 뒤늦은 대답을 하며 뒤돌아서는 남자는 조금 전의 이상한 기운과는 달리 금새 일상적인 모습으로 돌아와 아내를 맞이한다. 여자는 남편의 응답을 듣고서야 방향을 돌려 현관 옆에 있는 주방으로 건너간다. 카메라는 천천히 그녀의 동선을 쫓아 그녀가 주방에서 물건을 정리하는 모습을 비춘다. 조금 뒤 남편이 그녀 곁을 지나 화면 밖 방안으로 빠져나가면, 조금 전 밝은 테라스와는 대조적인 어둠에 가라앉은 주방 안 그녀 모습 좌측으로 천천히 이 영화의 타이틀 “예조, 산책하는 침략자”가 제시된다. 타이틀이 사라지면 여자는 문득 하던 동작을 멈춘 채 의심 어린 시선으로 남편 쪽을 바라보다 천천히 테라스로 발길을 옮긴다. 그리곤 남편이 서 있던 자리에서 그가 바라보고 있었을 무언가를 응시하는 그녀의 모습을 카메라는 길게 비춘다. 이때 시작되는 그녀의 내레이션,  “그것은 정말 사소한 위화감으로 시작되었다”

기요시의 전형적인 롱테이크 쇼트라 할 수 있는 이 세 번째 컷은 아파트 실내 공간을 좌우와 전후경으로 구분하는 카메라 워킹, 테라스의 밝은 빛과 주방과 복도의 어두움, 등장인물의 생명력 있는 움직임과 죽은 듯 미동도 없이 서 있는 정지된 순간의 대비. 아파트 외부 공간에서 들려오는 각종 소음들(외화면 소리, 그러나 논리적 근거가 없는 소리들까지 망라하는 기괴함. 기요시는 외화면 공간의 소리 활용에 대해 질문하자 인과론적 출처가 없는 소리들을 영화적으로 활용하는 것을 즐긴다고 이야기한 바 있다. 가령 현장의 스텝들이 실수로 자아내는 소리들, 엔지 사운드, 건물 밖에서 영문 모르게 들려오는 기계음 같은 소리들을 그는 녹음하여 보관하고 영화에 삽입하며 재창조하는 것이다)과 내화면 사운드를 조율하며 그로테스크하고 언캐니(uncanny 두려운 낯설음)한 기요시 특유의 영화적 세계를 안내한다.
  
예조와 산보

발터 벤야민의 근대적 주체, ‘산보자’ 개념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이고 있는 이 작품은 우리나라에서도 최근 공연된 바 있는 미에카와 모토히로의 동명 작품 <산책하는 침략자 散歩する侵略者>(2017)를 모티브로 하고 있다. 개념을 상실하는 인간을 통해, 인간의 본질, 불안과 해방에 관한 은유와 풍자를 담고 있는 이 작품의 기본 설정은 구로사와 기요시 작품과도 잘 맞닿아 있다. 그러나 원작을 각색하기보다는 스스로 시나리오를 써왔던 그의 작품 성향대로 기요시의 <산책하는 침략자> 시리즈는 오롯이 그만의 작가주의적 세계 안으로 흡수되어 재창조되었다. 특히 전작 <산책하는 침략자>가 외계인들의 개념 수집과 살상, 침략과 그 후의 과정까지 묘사된다면, <예조, 산책하는 침략자>는 전작에 등장하지 않았던 다른 인물들을 중심으로 침략의 예조(징조)와 과정, 그리고 침략 직전까지의 과정을 이면화처럼 제시한다. 전작이 침략자를 전면에 내세웠다면 <예조>는 발생하지 않은 사건, 혹은 드러나지 않은 실체를 직감적으로 감지하고 보통의 사람들과는 다른 능력을 가진 지구 여성의 관점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따라서 전작은 타자의 시선에서 바라본 인간 존재에 대한 개념적 이해 과정이라면, <예조>는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회피하거나 방어하자고 하는 인간 내부의 불안과 공포, 윤리적 갈등에 좀 더 초점을 맞춘다.

그렇기 때문에 이 두 작품은 큰 틀에서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는 영화이다. ‘언어’라는 외부적 질서를 통해 자아를 인식하고 주체성을 학습하며, 동물적인 생존 본능으로 위기에 반응하는 인간들은 때로는 소멸해도 무방할 이기적이고 폭력적인 존재이며, 또 때로는 치명적인 자기 결함과 트라우마, 불안과 공포로 점철된 나약한 존재이고, 또 때로는 외계의 타자조차 감화시켜내는 사랑과 공존의 존재이자, 윤리적 존재이기도 하다. 언어와 주체성, 자아와 타자, 의식과 무의식 등 정신분석학과 구조주의 기호학의 기본 개념을 영화적인 사건으로 묘사한 듯한 이 작품에서 외계인들이 수집하는 기본 개념이 가족, 소유, 자아, 노동, 과거, 미래, 공포 그리고 사랑으로 시작되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그런데 이러한 언어게임을 통해 주체 혹은 인간을 설명하려는 시도는 기요시 영화에서 이미 낯설지 않다. 그의 걸작인 1997년작 <큐어 CURE, Kyua>에서 우리는 이미 언어와 목소리라는 권력을 통해 타인을 지배하고 공포와 욕망, 불안과 적대를 끄집어내며 ‘나는 누구인가’를 질문했던 기요시의 테마를 본 적이 있다. 정신의학을 공부하다 초월적 능력을 지닌 극 중 연쇄살인범 마미야는 빛과 목소리를 통해 타인을 지배하고, 그들 내면의 억압된 적대를 폭력과 살인으로 끄집어낸다. 그와 동시에 윤리적 갈등을 제거한다. (<큐어>에서 최면에 걸린 인간들은 억압된 불만을 끄집어내 살인을 저지르고도 윤리적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다) <큐어>의 명장면 중 하나는 경시청에서 경찰 간부와 마미야가 벌이는 설전이다. 마미야는 자신을 비난하며 취조하는 경찰간부에서 반복적으로 ‘당신은 누구인가?’를 질문한다. 경찰 간부(오스기 렌. 이번 영화<예조>에서는 후생성 간부로 출현해 외계인과 비슷한 심문을 벌인다.)는 그 질문에 자신의 직함과 이름을 대지만, 마미야는 지속적으로 같은 질문을 반복한다. 현대 사회에서 누구나 자신을 설명하며 이름과 직함을 대지만, 그것이 과연 인간의 본질적인 자아를 설명할 수 있는 것인가?

<예조>에서 외계인들은 인간의 ‘개념’을 수집하는 방법으로 <큐어>에서의 그것처럼 언어적인 목소리의 권능을 이용한다. 빛과 목소리를 통한 질문들, 그리고 무력하게 응답하고 순응하는 인간. 특정 개념이 상실된 이후 대부분 인간들은 오늘날 인간 사회의 ‘정상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기이한 행위와 불안 혹은 해방적 쾌감을 맞보게 된다. 그리고 여기에 하나 더 보태어, <예조>는 외계인들의 가이드로 활동하는 자들의 윤리적 불안을 역시 중요한 테마로 다룬다. 개념을 빼앗을 대상을 선정할 수 있는 권력. 그러나 그 선택 능력은 이내 타인의 삶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치며, 그들의 죄의식이 육체적 통증으로 발현하는 과정을 묘사하는 것이다. 

예조

언캐니와 유령 그리고 영화

<예조>의 초반부, 주인공 예츠코의 공장 동료가 그녀에게 불쑥 이상한 이야기를 꺼낸다. 집에 유령이 있다는 것이다. 눈에 보이면 안 되는 존재, 그런데 늘 곁에 머무는 존재, 얼핏 아는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어 더 공포스러운 존재가 집안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상함을 느낀 예츠코는 다음 날 동료의 집을 직접 방문하게 되고, 동료가 유령이라 지칭했던 존재가 그녀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 동료는 ‘가족’ 개념을 빼앗긴 이 영화 서사의 첫 번째 희생자이다.

친숙하지만 낯선 존재, 이 언캐니한 공포는 1950년대부터 숱하게 변주되며 만들어진 <신체 강탈자의 침입 Invasion of the Body Snatchers >(1956)의 설정으로부터 시작된다. 형상은 같지만 분명 다른 존재, 돈 시겔로부터 시작되는 <신체 강탈자의 침입>에서 외계인에게 가족의 신체를 강탈당한 사람들은 영문 모를 이질감과 친밀감(언캐니. 두려운 낯섬. 분명 같은데 같지 않은 듯한 느낌이 주는 공포) 속에서 존재의 불안과 공포를 훨씬 크게 체감한다. 이러한 설정은 <예조>에서 비슷하게 변주된다. 어딘지 익숙하기 때문에 더 큰 공포. 예츠코의 동료가 ‘유령’이라고 단정한 그것은 기요시 영화의 공포를 연장한 개념이기도 하다. 예전에 진행됐던 기요시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나는 유령을 본 적은 없지만, 내가 영화 속에서 유령을 표현할 때는 ‘죽음’이라는 개념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다. 죽음은 현실세계에서 항상 일어나는 일이고 우리 바로 옆에 있지만, 그러나 우리는 죽음 이후의 세계를 알지 못한다. 죽음은 결국 세계의 양면성을 상징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영화라는 픽션의 양면성을 상징하는 것과 일치하는 것이라고 본다. 아까 영화란 무엇인가를 질문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가장 현실적이면서 현실에는 없는 것이, 바로 죽음과 영화의 양면성이다. 유령은 죽음을 눈에 보이는 형태로 나타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유령이라는 것의 어려운 문제는 그것이 인간인가 아닌가 하는 점이다. 즉 인간이 죽어서 유령이 되는 것인가? 아니면 인간의 연장으로서 유령이 존재하는 가. 사실 인간이 살아가는 시간은 길지 않다. 죽고 난 유령이야말로 사실은 인간의 본질일 수 있다. 그래서 유령의 모습이 인간의 모습이고 진정한 본질이다. 또 사실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에 우리 자신을 유령으로 결코 상상할 수 없기 때문에 과연 인간을 유령으로 상상할 수 있는지에 관한 문제가 복잡하게 얽혀있다. 결국 나에게 유령이란, 영화의 존재론이자 인간의 존재론을 고민하게 만들고 출발하게 만드는 지점이라 할 수 있다.” (영화 <로프트> 상영 후 나눈 인터뷰)

그의 이러한 유령적 세계관은 <예조>의 후반부, 외과의사 마카베의 신체를 빌어 존재했던 외계인이 죽음 직전에 하는 대사에서 다시금 드러난다. 이미 타인을 살해하면서 공포와 죽음이 연관되어 있음을 터득한 그는 자신이 죽어가는 순간, “나에게도 죽음이 찾아오는구나,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무서워, 하지만 죽음은 언제든 바로 옆에 있어. 이건 운명이야. 받아들이자”라고 말한다. 구로사와 기요시에게 인간-죽음-유령--영화는 긴밀하게 연결되는 실체이다.

<산책하는 침략자>와 <예조, 산책하는 침략자> 모두는 기요기가 최근 가장 다루고 있는 ‘사랑’의 테마를 관철시키고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기요시와 러브스토리는 어딘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지만, 그는 확실히 <해안가로의 여행 岸辺の旅>(2015)에서부터 삶과 죽음을 초월하는 인간 존재의 힘으로서 ‘사랑’을 묘사한다. 산책 시리즈 모두 결국 인류를 구원하거나 혹은 죽음 앞에선 개인의 공포를 극복하게 하는 유일한 원천은 사랑이라고 그는 피력한다. 그것은 그저 단순한 감상주의나 낭만이 아니라, 이제는 어른이 되어버린 기요시 감독이 느끼는 책무감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 그가 인터뷰에서 했던 어른으로서의 책임감 발언(그가 왜 <밝은 미래> 이후 더 다크한 영화들을 만들어내고 있는가에 대한 질문에 대해, 돌이킬 수 없는 정도로 나빠지는 사회에 대한 불안을 언급했다)은 <산책하는 침략자>에서 소유 개념을 빼앗긴 히키코모리 청년과 가이드가 광장으로 나와 사람들에게 하는 연설 내용, 즉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나빠지기 전에 막아야 한다는 장면과 겹쳐진다. 그러나 영화 속 군중들은 이내 그러한 연설을 외면하고 무시한다. 그런 상황 속에서 극 중 캐릭터들 혹은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이 발견할 수 있는 마지막 희망은 인류의 공존을 위한 사랑일 수밖에 없었을지도 모른다. 

두 편의 장대한 지구 종말 서사로 구축된 개념적 SF 영화 <산책하는 침략자>와 <예조, 산책하는 침략자>는 개별적 사건을 추적하던 그간의 미시적 스릴러 서사를 넘어, 장구한 인류의 근원과 현재 그리고 미래로 확장된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다. 상상하는 모든 것을 디테일하게 시각화하는 디지털 영화의 전능적 시대에, 여전히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 상상할 수 있는 것과 재현할 수 없는 것, 영화적인 시간과 공간의 창조능력, 영화와 현실의 경계를 넘나들며 영화의 존재론적인 언어, 쇼트의 개념과 한계를 사유하는 감독의 흥미롭고 실험적인 인류학 에세이는 여전히 흥미롭고 매혹적이며 원숙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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