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가 바꾼 삶은 이렇게 다시 영화가 되었다: 잉량의 <가족 여행>

by.조지훈(무주산골영화제 프로그래머) 2019-01-31조회 7,814
가족여행

2018년 사사로운 리스트

슬럼프가 왔다고 생각했다. 수많은 영화들을 봤지만 감흥이 느껴지는 영화가 드물었다. 머리로는 얼마나 좋은 영화인지 알겠는데, 심지어 영화를 보면서 울컥하기도 했는데 대부분의 영화들은 마음에 남지 않고 사라졌다. 그래서 올해의 사사로운 리스트를 만들기 위해 한 해 동안 보았던 수많은 영화들의 제목을 살펴보면서 막막해졌다. 그러다가 간신히 추려낸 약 20여 편의 리스트에서 한국에서 정식으로 볼 수 없는 영화, 이미 많이 봤을 법한 영화, 다른 분들이 언급할 것으로 예상되는 영화들을 하나씩 빼내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올해 이 사사로운 리스트는 말하자면, 개인적인 올해의 영화 리스트라기보다 영화를 좋아하는 분들을 위한 특별한 추천작 목록 정도로 생각해주면 좋겠다. 

델마
델마

먼저 <델마 Thelma>(2017), 요아킴 트리에는 우울과 불안이라는 인간의 감정을 섬세하고 깊이 있게 다루지만 이것을 주인공의 성장 서사를 위해 소비하지 않으면서도 세련된 영화 언어로 자기만의 영화 세계를 구축해 나가고 있는 몇 안 되는 동시대 감독 중 하나다. 어떤 장르의 외투를 둘러도 그의 영화의 중심에는 인물의 내면이 있다. 따라서 그의 모든 영화는 본질적으로 심리 드라마다. 초능력 소녀가 주인공인 평범한 스릴러 공포 영화일 수도 있었던 요하킴 트리에의 네 번째 장편영화 <델마>가 특별했던 건 이 때문이다. 

어려움을 겪는 주인공을 다루는 모든 영화는 기본적으로 성장영화다. 성장 드라마가 주는 진짜 감동은 주인공이 겪는 고난과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감정이 차곡차곡 쌓이다가, 어느 순간 영화가 관객의 마음을 움직일 때 찾아온다. 좋은 성장영화에는 항상 이런 영화적 순간 존재한다. 그런 의미에서 클레오 자오의 두 번째 장편영화 <로데오 카우보이 The rider>(2017)와 앤드류 헤이의 네 번째 장편영화 <린 온 피트Lean on pete>(2017)은 웨스턴 무비와 로드무비라는 각기 다른 영화적 틀을 빌려왔고, 두 감독의 나이도 성별도 문화적 배경도 다르지만 서로 닮은 구석이 많은 꽤 괜찮은 성장영화들이다. 

살다 보면 도망치고 싶어도 도망칠 수 없는 현실에 부딪힌다. 견딜 수 없는 현실에 대해 누군가는 견딜 수 있지 않으냐고 쉽게 말할 수 있겠지만 당사자가 아니면 그 고통스러운 현실의 깊이를 판단할 수 없다. 영화가 이런 현실에 처한 주인공을 다룰 때 취하는 두 가지 대표적인 방법은 현실에 대한 설명을 아예 생략하고 현재만을 보여주거나 관객에게 고스란히 현실의 고통을 체험케 하는 것이다. 데브라 그래닉의 <흔적 없는 삶Leave no trace>(2018)이 전자의 경우라면 자비에르 르그낭의 <아직 끝나지 않았다Custody>(2017)는 후자의 경우일 것이다. 두 영화 모두 이야기나 이야기를 담아내는 그릇이 특별하진 않지만, 관객의 마음을 흔드는 힘을 가지고 있다. 

올해 국내에서 개봉한 대표적인 해외 전기 다큐멘터리는 <맥퀸Mcqueen>(2018)과 <휘트니Whitney>(2018)였다. 두 영화 모두 재미있게 봤지만 새롭진 않았다. 그럼에도 <휘트니>에 더 관심이 갔던 건 인터뷰 장면에서 감지되는 긴장 때문이었다. <맥퀸>의 인터뷰는 매우 신중했고, <휘트니> 속 인터뷰는 종종 공격적인 동시에 방어적이었다. 두 영화 모두 유명 인물의 일대기를 다루고 있지만 <맥퀸>에 비해 <휘트니>가 상대적으로 영화가 다루는 인물의 깊숙한 내면과 뒷이야기를 담아낼 수 있었던 건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인터뷰어의 태도와 질문, 인터뷰어와 인터뷰이 사이에 만들어진 긴장이 바탕이 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을 것이다. 

반면 EBS다큐멘터리영화제에서 상영되었던 18분짜리 단편 다큐멘터리 <레노와 엔젤피쉬Lenno and the angelfish>(2017)는 현실을 재구성해내는 스토리텔링과 영화적인 편집이 인상적이었다. 올해 여러 가지 이유로 상당히 많은 다큐멘터리를 볼 기회가 있었지만, 짧은 러닝타임에도 불구하고 행동장애를 가지고 있는 10살의 남자아이의 내면과 일상의 긴장을 이 정도로 밀도 있고 생생하면서도 깔끔하게 담아낸 다큐멘터리를 적어도 올해에는 본 기억이 없다. 

넷플릭스가 코엔 형제의 <카우보이의 노래The ballad of buster scruggs>,(2018) 폴 그린그래스의 <7월 22일 22 July>(2018), 알폰소 쿠아론의 <로마Roma>(2018)를 제작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도 그런가 보다 했는데, 오손 웰스의 미완성 유작 <바람의 저편The other side of the wind>(2018)이 넷플릭스를 통해 완성될 거라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문득 앞으로 예술영화도 결국 더 큰 욕망을 가진 자본으로 지속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를 보는 내내 40여 년이 지났어도 모던함을 잃지 않은 오손 웰스의 세련된 영화적 감각에 감탄했지만, 영화를 보고 나서는 어떤 투자사도 수익을 보고는 감히 투자하지 못했을 이 영화에 돈을 댄 넷플릭스의 욕망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마지막으로 올해 리스트의 유일한 한국영화인 김보라 감독의 <벌새>(2018)는, 맥락은 다를 수 있겠지만, 68년 프랑스의 신좌파로부터 시작되어 최근 페미니즘 논쟁에서 종종 회자되는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인 것이다’는 문장을 떠올리게 한다. <벌새>가 정치적인 영화라서가 아니라 정치적인 영화가 되려는 욕망 없이 가장 개인적인 이야기로 한 시대를 온전히 담아냈기 때문이다. 의식적으로 영화를 또는 다큐멘터리를 한국 사회의 부조리와 현실을 담아내는 도구로 활용하곤 하는 최근 독립영화의 어떤 경향 속에 튀어나온 이 영화가 그래서 무척 반가웠다. 

올해 사사로운 리스트에 언급한 10편의 영화 중 8편은 네이버, EBS D-Box, 넷플릭스 등 다양한 플랫폼을 통해 정식으로 볼 수 있고, 영화제에서만 공개되었던 <벌새>는 멀지 않아 극장에서 개봉할 것이다. 혹시 언급된 영화에 관심이 생긴 분들은 찾아보면 좋겠다. 

이제부턴 올해 리스트에 있는 영화들 중 유일하게 특별한 기회가 오지 않으면 다시 볼 수 없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되고도 그 흔한 감상평조차 거의 찾아볼 수 없는, 그러나 영화를 좋아하는 관객들에게 이번 기회를 빌려 꼭 소개하고 싶은 잉량 감독의 다섯 번째 장편영화 <가족 여행A family tour>(2018)에 대해서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영화가 바꾼 삶

2012년 4월, 제13회 전주국제영화제를 1주일쯤 앞두었던 어느 날이었다. 영화제 준비로 어수선한 사무국에 동네 아저씨 같은 차림을 한 까무잡잡한 얼굴의 한 남자가 찾아왔다. 이름도 말하지 않고 연변에서 온 사업가라고 자신을 소개한 이 사람은 ‘상하이에 있는 자신이 아는 사업가가 중국의 잉량 감독이 완성한 영화의 판권을 사고 싶어 한다’고 했다. 그는 영화 제목은 물론이고, 영화의 내용도 잘 모르는 듯했다. 영화를 사면 영화제에서 상영하지 않을 수 있는지를 물었고 자신은 중국 정부가 보내서 온 사람이 아니라고 말했다. 당연히 그의 제안을 단칼에 거절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잉량 감독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정확하게는 알지 못했다.  

잉량
잉량 감독

2012년 당시 잉량 감독은 장 위엔, 왕 샤오수와이, 지아 장커 등으로 대표되는 중국 6세대 감독 이후 국제 영화계에 등장한 중국의 대표적인 신진 독립영화감독 중 하나였다. 1977년 중국 상하이에서 태어난 그는 상하이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후 베이징사범대학 예술학과와 중경 영화 아카데미를 졸업했다. 졸업 후에는 방송국에서 조연출 생활을 했지만 그에게 방송국은 창작할 여지가 없는 상업적인 공간일 뿐이었다. 1999년부터 틈틈이 매년 2편 정도의 단편영화를 만들어왔던 그는 2003년에 단편영화 <잃어버린 집 Missing Home>을 완성하여 홍콩국제단편영화제에서 비평가상을 받았다. 이를 계기로 독립영화감독의 길을 걷기로 결정하고 자신의 영화사 ‘90분’을 설립했다. 

이후 2005년, 3만 위안(한화 500여만 원)의 제작비로 장편 데뷔작 <아버지를 찾아서 Taking Father Home>를 완성했다. 이 영화는 도쿄필름엑스, 샌프란시스코, 런던, 밴쿠버 등 전 세계 영화제에 상영되었고 여러 개의 상을 수상했다. 그는 단번에 주목받는 중국의 독립영화감독이 되었다. 이듬해 그동안 받은 상금과 로테르담국제영화제 후벌트 발스 펀드의 지원으로 2006년 두 번째 장편영화 <다른 반쪽 The Other Half>을 완성했다. 이 영화 역시 호평을 받으며 전주국제영화제에서는 우석상을, 도쿄 필름엑스에서는 심사위원 특별상을 수상했다. 2008년에는 세 번째 장편영화 <호묘 Good Cats>를 완성했고, 이후 세 편의 단편영화를 연달아 연출했다. 그중 버스가 강으로 추락한 사고로 가족을 잃은 유가족의 이야기를 한 개의 쇼트로 담아낸 단편영화 <위문 Condolences>(2009)은 로테르담영화제 단편부문 대상(타이거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2005년 데뷔작을 완성한 후 2011년까지 그는 총 3편의 장편영화와 4편의 단편영화를 연출했다. 그의 모든 영화들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에 다큐멘터리적인 요소들을 결합하여 중국의 사회 현실을 날카롭게 풍자하며 비판해왔다. 이러한 그의 영화들은, 실화를 바탕으로 도시의 주변부를 부유하는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그들의 어려운 일상과 복잡한 심리를 담아내고 결국 중국 사회의 부조리한 현실을 비판했던 중국의 6세대 감독들의 강력한 자장 안에 있었다. 동의하지 않는 사람이 있겠지만 그는 6세대 영화감독, 특히 지하전영에서 가장 활발하게 활동했던 시기의 지아 장커의 영화적 자산을 독창적으로 계승한 거의 유일한 중국 감독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의 영화들은 선배들의 영화와 마찬가지로 해외에서 먼저 상영되었고 주목받았지만 정작 중국에서는 환영받지 못했다. 그런 그가 중국에서 독립영화를 만드는 일은 당연히 쉬운 일 일리 없었다. 2008년 이후 그가 단편영화를 주로 만들었던 건 이런 현실적인 이유가 컸다. 

그런 그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전주국제영화제는 1회 영화제부터 세 명의 감독을 선정해 5천만 원의 제작비를 지원하여 세 편의 단편영화를 제작하는 단편영화 제작 프로젝트 ‘디지털 삼인삼색’을 운영해왔다. 당시 전주국제영화제는 매년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 등 대륙별로 이 프로젝트를 진행했는데, 2012년 디지털 삼인삼색의 기회는 당시 전 세계에서 가장 주목받고 있었던 아시아의 젊은 감독 3인에게 돌아갔다. 필리핀의 라야 마틴, 스리랑카의 비묵티 자야순다라, 그리고 중국의 잉량이 그 주인공이었다. 5천만 원의 제작비는 유럽 감독들에게는 단편영화를 만들기에도 적당한 돈이 아니었지만, 아시아의 젊은 감독들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결국 잉량과 라야 마틴은 5천만 원의 제작비로 각각 장편영화를 완성했다.

잉량 감독이 4번째 장편영화를 위해 선택한 이야기는 2008년 상하이에서 여섯 명의 경찰이 살해된 실제 사건이었다. 이후 중국 사법제도 개혁의 계기가 되었다고 알려진 이 사건에서 중국 정부는 재판을 빨리 진행시키기 위해 경찰을 살해한 범인의 어머니를 강제로 정신병원에 입원시키고 어머니에게 제대로 알리지도 않은 채 판결 후 7일 만에 사형을 집행했다. 영화는 범인의 어머니가 아들을 위해 탄원서를 쓰고 노력하는 모습을 담담하게 담아내면서 어머니의 시선을 통해 중국의 이러한 독단적이고 불합리한 사법제도를 날카롭지만 은유적으로 비판했다. 제작 당시만 해도 아무도 몰랐던 이 영화는 완성될 무렵 그 존재가 알려졌고, 실제 영화의 내용과 관계없이 소재만으로 중국 정부의 심기를 자극했다. 

잉량 감독을 통해 나중에야 들었지만, 그가 중국 정부로부터 받은 압박은 단순한 압력이 아니라 공포에 가까운 것이었다. 내가 만났던 연변 사업가는 하나의 에피소드에 불과했다. 중국 정부와 상하이 공안은 2012년 2월부터 전주국제영화제가 개최되었던 5월까지 약 4달간 감독에게는 물론이고 중국의 여러 도시에 있는 감독과 아내의 부모와 지인을 수십 차례 찾아가 다양한 방법으로 재편집과 상영 취소, 영화 폐기를 강하게 요구했다. 말이 요구였지 협박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그는 그 모든 회유와 압박을 거부하고 영화 상영을 강행했다. 돌이켜보면 영화의 판권은 영화제가 가지고 있었지만, 당시 감독이 이런 상황을 설명하고 영화제 측에 상영 취소나 영화 폐기를 요청했다면 영화제는 이 요청을 거절하기 어려웠을 것이고, 이 영화는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단 한 번도 이 문제에 관해 망설이는 태도를 보인 적이 없었다. 

아직할말이남았지만
아직 할 말이 남았지만

이렇게 온갖 어려움을 뚫고 세상에 공개된 <아직 할 말이 남았지만 When Night Falls>(2012)은 그의 전체 필모 중 최고의 영화라고 할 만큼 좋은 영화였다. 그는 이 영화에 그동안 축적해온 영화적 자산과 재능을 온전히 쏟아부었고 부조리한 현실을 영화 안으로 끌어들여 자신만의 영화적 감각과 리듬으로 재구성해냈다. ‘다큐멘터리적인 영화’ 또는 ‘다큐멘터리 스타일의 영화’라는 평가를 받으며 영화와 현실의 경계에서 쌓아 올려왔던 그의 영화 세계는 그렇게 완성된 모습을 드러냈다. 첫 상영 이후 곧바로 로카르노국제영화제 국제경쟁부문에 초청되었고, 감독상과 여우주연상을 함께 수상했다. 그리고 전 세계 수많은 영화제에 초청받았다. 2012년 말에는 미국 영화 전문지 필름코멘트가 선정한 미국 미개봉 올해의 영화 리스트에 네 번째로 그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전주국제영화제 이후 다시는 자신이 태어난 중국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영화 한 편은 이렇게 한 영화감독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버렸다.

삶은 다시 영화가 되다 

홍콩에서 가족과 함께 새로운 삶을 시작한 그는 홍콩 영화 아카데미 등에서 학생들에게 영화를 가르치고 태어난 아이를 돌보며 쉽지 않은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가 2016년 로테르담국제영화제가 로테르담 도시 재건 75주년을 맞아 기획한 ‘재건의 시작 This Is Where Reconstruction Stars’ 프로젝트에 참여하여 단편영화 <9월 28일, 맑음 A Sunny Day>를 완성했다. 홍콩 행정장관 선거의 완전 직선제를 요구하며 79일간 이어진 민주화 시위 ‘우산 혁명’이 시작된 첫날, 2014년 9월 28일 오전을 배경으로 한 이 영화는 시위에 참여하기 전에 오랜만에 아버지 집을 방문한 딸의 이야기를 통해 가족의 의미를 성찰케 하는 따뜻한 가족 드라마다. 그러나 잉량 감독은 ‘시위에 참여하려는 딸’이라는 설정과 TV 뉴스, 라디오, 휴대폰 등을 활용하여 당시 홍콩의 첨예했던 현실을 영화에 끌어들이며 영화에 자신의 인장을 새겨 넣었다. 그 자체로도 충분히 감동을 끌어낼 수 있는 가족 이야기는 이렇게 그의 손을 거치면서 당시 홍콩의 현실을 은유하는 사회 드라마로 확장, 변화되었다. 그는 그 어려운 시간을 보내고도, 중국의 외교 정책과 밀접한 관계에 있는 예민한 소재인 ‘우산 혁명’의 순간을 자기만의 시선으로 담아내며 자신의 영화가 여전히 건재함을 증명했다. 

가족여행

그리고 그로부터 2년 후 그는 지난 6년간의 자신의 실제 삶을 토대로 한 다섯 번째 장편영화 <가족 여행>을 완성했다. 2018년 로카르노국제영화제 국제경쟁 부문에서 월드 프리미어로 상영된 이후 부산국제영화제를 통해 아시아에서 처음으로 공개되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중국 정부를 비판하는 영화를 만든 후 5년간 조국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홍콩에서 살고 있는 중국의 여성 영화감독 양수다. 양수는 홍콩 국적의 남편과 4살이 된 아들과 살면서 차기작을 준비하던 중 대만의 가오슝에서 열리는 한 영화제에 초청받게 되자, 남편의 도움을 받아 대만에서 5년 만에 엄마와 다시 만나기로 한다. 중국의 단체 여행객 틈에 섞여 대만에 온, 그러나 곧 큰 수술을 앞두고 쇠약해진 엄마와 오랜만에 재회한 양수는 서로 떨어져 살았던 시간을 절감하며,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 모를 소중한 시간을 함께 보낸다.  

사실 <가족 여행>은 2017년 대만의 가오슝 필름 펀드의 지원을 받아 완성한 흑백 단편영화 <엄마의 고백 I Have Nothing To Say>과 한 쌍인 영화다. 장편과 단편 시나리오 작업도 동시에 진행되었고, 촬영도 마찬가지였다. 두 영화 모두 양수와 엄마의 재회를 다루지만 <가족 여행>이 딸인 양수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풀어가는 영화인 반면, <엄마의 고백>은 같은 시간을 다른 방식으로 겪은 엄마의 여정을 엄마의 독백으로 담아낸 영화다. <가족 여행>에서 오랜만에 만난 모녀는 애틋한 시간을 보내면서도 자주 소소하게 다툰다. 양수는 양수대로 지난 5년간 힘든 시간을 보냈지만 혼자 사는 나이 든 엄마는 엄마대로 딸 때문에 중국 정부로부터 어지간히 시달리며 쉽지 않은 시간을 보냈기 때문이고, 매일 안부를 주고받으며 영상통화를 했지만 그건 한 공간에서 일상을 부대끼며 사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일이었기 때문이며, 자신의 상황을 헤쳐나가기에도 바빴던 무뚝뚝한 딸은 엄마와의 소통을 남편에게 미뤄두었고, 엄마는 딸의 상황을 헤아려 자신이 겪어야 했던 모든 것들을 말하지 않았기, 아니 말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이 짧은 만남은 오랫동안 떨어져 살면서 소원해진 엄마와 딸이 서로를 이해하고 관계를 복원해가는 시간임과 동시에 서로에 대한 사랑과 서로 다르지만 비슷한 각자의 사랑의 방식을 확인하고 이해하는 시간이다. 

그래서 이 영화에는 오랜만에 만난 모녀가 서로 얼싸안고, 반가워하고, 소리 내어 웃거나 우는 장면 따윈 없다. 그저 담담하게, 하지만 아주 세심하게 두 인물의 복잡한 감정과 심리를 포착하면서 그들의 여정을 따라갈 뿐이다. 영화에 이렇게 밀도 높은 인물의 감정이 담길 수 있었던 건 감독을 포함한 세 명의 작가가 신중하고 꼼꼼하게 쓴 시나리오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주연 배우들의 공이 크다. 양수를 연기한 공저(Gong Zhe)는 전문 배우는 아니었지만 매일 양수 입장에서 일기를 쓰며 인물의 감정에 몰입하면서 이방인의 정체성을 절감하며 살아가는 한 영화감독의 복잡한 감정을 세밀하게 표현한다. (그의 일기는 나중에 정리되어 영화에 담겼다.) <아직 할 말이 남았지만>(2012)에서 살인자의 어머니 역을 맡아 로카르노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고, 오랫동안 로우 예 감독 영화의 프로듀서를 맡아온 베테랑 배우 나이 안 Nai Ahn은 전작과는 완전히 다른 엄마 역을 맡았지만 그야말로 원숙한 연기력으로 고집스럽게 자신의 길을 가려고 하는 딸을 둔 엄마의 심정을 사실적으로 연기해낸다. 말레이시아 독립영화에서 주로 악역을 소화했던 테오 펫(Teo Pete)는 고집 센 양수의 곁을 지키는 이해심 많은 남편 역을 맡아 이야기의 한 축을 지탱하는 중요한 역할을 훌륭하게 해낸다. 잉량 감독은 세 배우의 연기 앙상블을 통해 자칫 너무 감상적이거나, 너무 무거울 수 있는 영화의 톤을 적절한 수준에서 안정적으로 유지한다. 

<가족 여행>은 기본적으로 픽션이다. 잉량은 자신의 개인사와 분리시킬 수 없는 이 영화를 더욱 픽션스럽게 만들기 위해, 그리고 영화와의 거리를 두기 위해 처음에 남성이었던 주인공을 여성으로 바꾸었고, 대만에서 가족을 만난다는 설정도 자신의 경험이 아닌, 3명의 작가 중 한 명이자 영화에서 중국 단체 관광객의 인솔자로 출연한 배우이기도 한 아내 펭샨의 경험에서 빌려왔다. 그러나 영화 속에서 양수와 엄마가 겪은 에피소드들은 지난 6년간의 자신의 경험과 기억으로부터 가져온 것이 대부분이다. 특히 이 영화에는 2012년 이후 만든 그의 모든 영화들이 호명되는데, 양수가 만든 정부 비판 영화는 제목을 바꾸고, 다시 찍은 장면을 썼지만 <아직 할 말이 남았지만>과 같은 영화이고, 양수가 만들고자 하는 차기작은 장편영화이긴 하지만 <9월 28일, 맑음>과 같은 영화다. <가족 여행>에서 차기작을 위한 오디션을 보는 장면에 등장하는 배우는 <9월 28일, 맑음>에서 실제 아버지 역을 맡았던 배우다. 따라서 <가족여행>은 픽션영화이긴 하지만 2012년 이후 잉량 감독의 인생과 그가 만든 영화들의 총합인 동시에, 잉량 감독의 영화 인생에 있어 중간 결산과도 같은 논픽션 영화라고도 할 수 있다.

9월 28일, 맑음
9월 28일, 맑음

잉량 감독은 2012년까지 최소의 예산으로, 자신이 주도하는 최소한의 제작팀과 함께 중국에서 독립영화를 만들어왔다. 그동안 그는 말 그대로 중국의 독립영화감독이었다. 중국의 독립영화는 단순히 자본과 영화의 내용으로 규정되기보다 일반적으로 ‘검열의 유무’로 규정되어 왔다. 잉량도 마찬가지였지만 중국의 많은 독립영화감독들이 해외의 국제영화제들을 주 무대로 활동했던 것은 이 검열의 문제와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중국 정부는 시진핑이 국가 주석으로 선출되었던 2013년 전후로 검열받지 않은 영화의 제작과 상영을 강하게 규제했다. 중국독립영화를 의미하는 ‘지하전영’이라는 단어를 더 이상 찾아볼 수 없게 된 시기도, 2006년 시작된 중국의 대표적인 독립영화제였던 베이징독립영화제가 2012년과 2014년 사이 중국 공안의 방해로 열리지 못하기 시작한 시기도 이 시기와 오버랩된다. 이제 중국에는 정부의 승인 없이 만들어지는 영화도, 개최되는 독립영화제도 공식적으론 존재하지 않는다. 중국의 독립영화를 매핑하기에는 본 영화의 숫자가 적어서 정확하게 말할 순 없겠지만, 그리고 왕빙을 비롯한 몇몇 감독들이 영화가 아닌 다른 분야로 자신의 영역을 확장하며 여전히 활동하고 있긴 하지만, 여러 정황으로 볼 때 잉량 감독의 <아직 할 말이 남았지만>은 우리가 알고 있던 중국 독립영화의 생명이 다할 무렵 만들어진 마지막 중국 독립영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보자면 <가족 여행>은 잉량이 중국에서 만들었던 장편영화들과 완전히 다른 영화다. 여전히 적은 예산으로 제작되었지만 이번 영화는 처음으로 투자의 과정을 통해 제작비를 확보했고, 여러 분야의 전문 스텝이 참여했다. 일반적인 영화제작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것이다. 전작에 비해 영화 곳곳에서 훨씬 더 세심하게 공을 들이고 신경 쓴 흔적들이 많이 보이는 건 이 때문이다. 무엇보다 <가족 여행>은 중국이 아닌 홍콩에서 만든 첫 장편 영화다. 비록 홍콩이 중국의 특별자치구이긴 하지만 영화의 제작 국가는 중국이 아니라 홍콩이고, 그는 이제 중국 독립영화감독이 아니라 홍콩의 독립영화감독이 되었다. 영화 속에서 양수를 이해하고 온 힘을 다해 아내를 지키는 남편이 홍콩 사람인 건 잉량 감독에게 홍콩이라는 제2의 고향이 가진 의미의 표현일 것이다. 또한 대만을 배경을 한 이번 영화에서도 변함없이 대만의 가장 예민한 정치적 이슈인 ‘양안 문제’를 택시 기사와 TV 뉴스를 통해 간접적인 방법으로 영화에 끌어들이고, 양수가 3명의 투자자가 실종되는 사건을 겪으면서도 홍콩의 가장 예민한 정치적 이슈인 ‘우산혁명’을 소재로 한 영화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기어이 영화에 넣어 자신이 추구하는 영화의 진로가 여전히 같은 방향을 향하고 있음을 보여주지만, 그의 이번 영화가 소재와 인물을 다루는 방식은 분명히 2012년 이전보다 훨씬 다듬어졌고, 세련되어졌으며, 이른바 ‘다큐멘터리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던 이전 영화들에 비해 훨씬 더 극영화스러워진 것이 사실이다. 그러므로 <가족 여행>은 잉량 감독이 지금까지와는 다른 영화의 영역에 진입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인생에서 무언가를 선택한다는 건 선택하지 않은 걸 감당해야 한다는 의미다. 잉량 감독은 되돌릴 수 없는 선택을 했고, 지금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것들을 감당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는 자주 지금의 삶이 괜찮다고 말하지만, 그의 복잡한 심정은 영화의 한 장면에서 상징적으로 드러난다. 영화의 마지막, 양수가 지금의 자신을 있게 한 자신의 영화를 아이와 함께 다시 보기 위해 극장에 들어가기 직전, 기자가 묻는다. “당신은 홍콩 사람입니까? 중국 사람입니까?” 그는 대답한다. “나는 이방인입니다.” 망설임 없이 답변하는 양수 뒤편으로 자신과 자신의 영화를 초청해준 영화제의 포스터가 보인다. 그 포스터의 중앙에는 커다란 글씨로 이렇게 쓰여있다. ‘어떤 사람도 아웃사이더로 계속 살 순 없다. No One Can Stay an Outsider.’ 그럼에도 불구하고 잉량 감독이 견뎌낸 지난 6년 동안의 인생의 결산과도 같은, 우리의 아이들에게 바친다고 말하며 끝난 <가족 여행>이 반갑고 감동적이었던 것은, 이 영화가 잉량 감독이 앞으로 다시 한 발짝 전진할 수 있을 기회가 되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누군들 저런 인생을 살았다면 한 번쯤은 진지하게 자신의 인생을 돌아볼 기회를 갖고 싶을 것이다. 잉량 감독은 자신의 아들을 위해 자기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영화로 인생의 한 챕터를 정리해냈다. 영화가 바꾸어 놓은 삶은 다시 이렇게 영화가 되었다. 그는 이제 과거와는 다른 영화를 찍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난 언제나 그의 삶을 응원하면서 다음 영화를 기다릴 것이다. 

가족여행

(보태기) 지난 부산국제영화제 당시 영화 웹진 리버스의 요청을 받아 <가족여행>의 상영을 위해 부산을 방문한 잉량 감독과 인터뷰를 했다. 관심이 있는 분들은 이 인터뷰를 살펴봐도 좋겠다.
(http://www.reversemedia.co.kr/article/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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