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라니스 아나이 베르네리, 2017

by.김영진(영화평론가) 2019-01-24조회 7,361
앨라니스

<앨라니스>는 제 19회 전주국제영화제 상영작이다. 전주에서만 상영되었을 뿐 국내 개봉 계획이 없다. 2005년에 <사랑없는 일년 A year without love>로 베를린 국제영화제를 통해 데뷔했고 <앨라니스>가 다섯 번째 장편영화인 여성감독 아나이 베르네리는 그간 베를린, 토론토, 산세바스찬 영화제 등에서 수상하며 국제적 명망을 얻었다. 올해 전주영화제 준비를 하면서 한국경쟁영화를 선정하는 작업을 막 마치고 다른 프로그래머들이 고른 해외 출품작들을 점검하면서 보게 된 이 영화는 내게 상당한 충격을 주었다. 주로 젊은이들의 박탈감에 주목하며 출구 없는 삶과 사회 시스템에 대한 비관적 전망을 담는 대다수 한국독립영화와는 달리 <앨라니스>는 황폐한 삶의 조건에 포위당해있으면서도 끝내 굴하지 않는 인간상을 담는다. 

이 영화의 주인공 마리아는 ‘앨라니스’라는 가명으로 활동하는 매춘부이며 18개월 된 단테라는 아들을 둔 싱글맘이다. 마리아는 친구이자 동료인 매춘부 지젤라와 함께 사는데 거주지에서 매춘하는 것이 적발되자 살던 집에서 쫓겨난다. 옷가게를 하는 숙모 집에 잠시 머무르면서 매춘 일을 계속하지만 사는 게 녹녹치 않다. 일단 마리아는 다른 매춘부들이 이미 영역을 점유하고 있는 거리에서 영업을 할 수 없다. 하는 수 없이 몰래 고객을 유인해 자동차 등에서 일을 계속하지만 보는 사람도 끔찍한 상황만 계속 이어질 뿐이다. (이를테면 발기하지 않는 늙은이를 상대로 차에서 영업하는 장면이 있다. 자세한 설명은 생략).

마리아가 일하러 나갔을 때 단테를 봐주는 숙모는 마리아를 안쓰러워하면서도 지속적으로 마리아를 비난한다. 네가 이렇게 계속 살 수는 없는 게 아니냐, 어린 아들을 생각하라고 그녀는 다그친다. 숙부는 그런 숙모를 말리지만 내심 숙모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듯하다. 임시로 숙모 집에서 얹혀살 처지의 마리아는 당장 항변하지는 않는다. 대신 매춘 혐의로 경찰에 출두해 심문을 받는 상황에서 마리아는 더 좋은 삶을 찾으라고 훈계하는 담당 경찰에게 거세게 쏘아붙인다. 함께 아이를 책임져야 할 남자친구는 마리아가 임신을 하자 도망친 상태에서 일자리가 없는 고향을 떠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온 이래 자신이 얼마나 살기 위해 처절히 일했는지, 매춘 외에 다른 일자리를 찾는 게 얼마나 불가능에 가까운 상황인지를 말하면서 마리아는 어떤 동정도, 이해도 필요 없다는 태도를 취한다. 

앨라니스

<앨라니스>는 점점 더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공간으로 들어가 때로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일하는 마리아의 생활을 보여준다. 그녀는 잠깐 숙모 집에서 쪽잠을 잔 후 거리로 나와 일을 하고 거주할 곳을 찾다가 애타게 엄마를 찾는 아이에게 돌아와 젖을 물리고 잠시 쉰 후 잔소리하는 숙모를 피해 다시 일하러 나가며 심지어 모두 잠이 든 심야에 옷을 챙겨 입고 거리로 나가 다른 매춘부들의 구박을 받으며 몰래 일을 한다. 어디를 가던 그녀는 자신이 있는 공간을 통제할 수 없다. 이는 영화 내내 반복적으로 쓰이는 거울, 유리창 등의 반사면을 이용한 복합적인 장면 설계로 인해 점층적으로 아이러니 효과를 만들어낸다. 영화 초중반까지 이런 반사면 활용에 기초한 미장센은 공간을 장악하고 있는 그녀의 여신 같은 외형이 주는 위엄을 강조한다. 아이에게 젖을 물린 마리아가 비스듬히 누워 있을 때 반사면의 미장센은 그런 그녀의 모습을 이중 삼중으로 화면에 배치하며 우리는 그 공간의 볼륨에 압도당한다. 반면 그녀가 거리를 헤매며 필사적으로 푼돈을 버는 중반부 이후의 화면들에서 유사한 장치의 프레임들은 언제 깨어질지 모르는 그녀의 연약한 삶의 환경을 냉정하게 증거한다. 

영화의 후반부에 마리아는 심야의 거리에서 호객을 하고 다른 매춘부들을 피해 어두운 구석에 숨어 있다가 뭐가 심상치 않은 느낌을 주는 남자의 선택을 받아 그의 집에 가서 매춘을 하는데 관객은 잘못하면 그녀가 죽을 수도 있겠다는 불길한 인상을 받는다. 다행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고 유사 변태적 행위를 강요당한 끝에 겨우 돈을 받아낸 마리아가 다시 거리에 나섰을 때 근처의 매춘부들은 그녀가 자기 영역을 침범했다며 그녀를 붙잡고 단체로 린치를 가한다. 설상가상 상황은 더 악화된다. 이튿날 숙모는 더러운 일을 하는 마리아에게 아이를 맡길 수 없다며 아이를 빼앗으려 들고 마리아는 불같이 화를 내며 그 집을 나온다. 결말은 일시적인 해피엔딩이다. 마리아는 어느 매춘숙에 들어가고 동료들은 마리아와 마리아의 어린 아들 단테를 가족처럼 대해준다. 단테는 이 여자, 저 여자의 품에 안겨 보살핌을 받는다. 마리아는 쫓겨날 걱정 없이, 먹을 게 떨어질 걱정 없이, 아기를 모르는 사람에게 맡길 불안감 없이 당분간 살 수 있다. 

모던 록 가수 앨라니스 모리셋에서 예명을 딴 마리아는 자기 앞에 주어진 어떤 상황에서도 저 홀로 자립하기 위해 분투하며 허튼 동정이나 이해도 거부한다. 자신의 삶에 대해 외부인이 어떤 식으로 정의하는 것을 그녀는 거부한다. 네 삶은 이러하니 저러 해야 해, 라고 누군가 말하는 순간 그녀는 그 상대방과 절교하는 것이다. 그녀의 존엄은 그녀가 하는 일로 측량될 수 없다. 그녀는 스스로 존엄하다. 그녀는 항상 불행하지 않으며 적지 않은 순간에 행복하고 대체로 먹고살기 위해 초조하다. 어떤 때에도 그녀는 자기 자세를 잃지 않는다. 실제 아들과 함께 이 영화에 출연한 마리아 역의 소피아 갈라는 바위 같은 당당함을 화면에서 표상하는데 극단적인 삶의 남루함을 전시하는 사건들 사이에서도 끝까지 기운을 잃지 않는다. 

<앨라니스>의 여주인공 마리아가 드러내는 불굴의 기운과 비슷한 에너지를 한국영화에서도 볼 수 있는데 올해 전주국제영화제 한국경쟁 대상 수상작인 정형석의 <성혜의 나라>가 그렇다. (후일담이지만, 이 영화는 한국경쟁부문 심사위원 중 한 사람인 카를로비바리 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출신 줄리에타 시첼의 열렬한 지지를 업고 대상을 받았는데, 이상하게도 국내에서는 전혀 주목을 받지 못했고 서울독립영화제의 초청도 받지 못했다.) 이 영화는 러닝 타임의 상당 부분 스물아홉 여성 성혜의 고단한 일상을 좇는다. 대학 졸업 후 대기업 인턴사원으로 들어갔으나 성희롱을 당하고 항의가 묵살 당하자 인권위원회에 신고하고 회사를 나온 그는 다른 곳에 취업하는 것이 여의치 않아 파트타임 일들로 생계를 꾸린다. 아버지는 병원에 있고 식당 일을 하는 어머니는 곧잘 성혜에게 돈 융통을 부탁한다.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성혜의 남자친구는 무능한 데다 눈치도 없다. 사방이 무심한 공기로 차 있는 숨쉬기 힘든 상황에서 묵묵히 견디며 노동하는 성혜의 모습은 별다른 극적 주름이 없는데도 깊은 인상을 남긴다. 

성혜의 나라
성혜의 나라

성혜는 자기 삶에 벌써 지쳐있지만 배가 고프면 밥을 먹는 관성처럼 그녀의 노동일과는 변함없이 지속적으로 이뤄진다. 어제와 같은 오늘, 오늘과 같은 내일이지만 기적 같은 사건이 후반에 발생한다. 아직 개봉하기 전 영화이므로 그 전말을 자세히 쓸 수 없지만, 영화는 급격하게 화면의 공기를 바꾼다. 굳은 표정으로 일상의 노동에 전념하던 성혜는 삶의 반전을 맞아 아무도 예상하기 힘든 선택을 한다. 그녀의 표정과 행동은 관성적이고 기계적이던 반복적 굴레를 벗어나 예측 불가능한 생기를 띠고 화면에서 튕겨 나올 듯 발랄해진다. 영화의 2/3까지 애인을 포함하여 찌질하고 저렴하고 대면하기 싫었던 인간 군상들 사이에서 이를 악물고 버티고 있던 성혜는 어떤 명시적인 희망도 품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듯한 결기를 보유하고 있었다. 그녀는 전에 다니던 회사에서 성추행의 전말을 알고 있었으나 침묵했던 동료의 사과를 대신한 친절을 단호하게 거부하며 자신을 사랑한다고 믿는 부모의 의존적인 태도를 무시한다. 대책 없는 관성적 희망으로 자신을 속이면서도 관계에 미련을 갖는 애인에게도 고기와 술을 사준 뒤 이별을 통보한다. 곧 그녀는 삶의 대단원의 반전을 맞이하기 전에도 이미 기존 관계의 관성, 그에 따른 행동 양식과는 선을 그은 채 홀로 감당할 삶에 대해 결전의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성혜는 주변에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거짓 희망을 품지 않는다, 대신 자신의 자립과 존엄을 위해 산다는 태도를 지닌 사람이다. 그는 이를 악물고 자신의 육체적 한계와 씨름하는 가운데 뜻하지 않은 불행과 행운을 동시에 경험한다. 이를 통해 삶의 전기를 마련했고 우리가 상상할 수 없었던, 기성 삶의 체제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선택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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