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거스트 앳 아키코즈 크리스토퍼 마코토 요기, 2018

by.노혜진(스크린인터내셔널 기자) 2018-12-10조회 6,292
어거스트 앳 아키코즈 스틸

올해 로테르담 국제 영화제에서 월드 프리미어한 <어거스트 앳 아키코즈August at Akiko’s>(크리스토퍼 마코토 요기, 2018)는 연초에 봤음에도 연말이 된 지금까지 나에게 생생하게 남아있는 영화다. 하와이 배경의 음악 영화인데, 하와이 출신의 음악 애호가이자 하와이 국제영화제 수석 프로그래머인 앤더슨 리가 일찍이 작품을 보고 귀띔해줬던 덕에 미리 로테르담 영화제 ‘관객과의 대화’ 사회를 보기로 자청하고 갔었다. 

긴 설명 없이 “작은데 잘 만들었어. 데뷔 장편 영화고. 한 번 봐봐”라던 앤더슨의 말에 믿음이 갔다. 또 그 친구가 추천한 만큼, 화이트워싱 논란을 일으켰던 카메론 크로우 감독의 <알로하Aloha>(2015) 같은 영화들과는 달리 하와이의 모습을 좀 더 현실성 있게 그리기도 하겠지 싶었다. 실제로 가보면 관광객을 포함한다 쳐도 하와이에는 백인이 소수라는 느낌이 확연히 들 정도로 아시아 태평양계의 인종이 많다. 토속 하와이인들뿐만 아니라 수 세대 전서부터 하와이에 이민 가서 정착한 아시아계 가족들, 앤더슨네와 같이 좀 더 최근에 들어간 가족들 등등 다양하다는 걸 볼 수 있다. 

이 영화를 만든 크리스토퍼 마코토 요기 감독도 일본계 하와이 출신이다. 증조부모가 19세기 말 20세기 초 일본에서 하와이의 사탕수수 농장에 일하러 갔다가 끔찍한 노동 조건과 부당한 계약에 혹사를 당했다고도 한다. 호놀룰루에서 태어난 크리스토퍼는 도시 소년으로 잘살았지만, 그 전 가족 중에 하와이섬을 야반도주한 증조할머니뿐만 아니라 자살한 여러 명과 마약 중독과 학대의 역사가 있었다는 것은 가족 사이의 소곤거림으로 알게 됐다고 한다. 

그러나 아시아계 가족인 만큼 이런 트라우마의 역사는 드러내놓고 회자된 이야기들은 아니었다고 한다. 감독은 전 세대들이 고생하고 고통스러워했던 덕에 잘 살 수 있었다는 걸 생각하면 얼굴 없는 조상이 자기를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해하기도 했다고 한다. 서던 캘리포니아 대학교에서 영화 예술 MFA를 받고 본토에서 생활하게 된 그는 이런 조상들과 끊긴 관계를 탐구하기 위해서 1년 넘게 하와이섬에 살면서 영화 준비를 했다고 한다.  

올해 유난히 한국 영화 관객과의 대화가 많았던 것 같은 로테르담에서 나는 숨이 턱에 걸려 뛰어다니다가 <어거스트 앳 아키코즈>는 상영 당일이 돼서야 관객과 함께 처음 보게 됐다. 관람 전 심기를 잠시 말하자면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다. 속된 말로 빡친 상태였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피부 상피까지, 여러 가지 일을 둘러싼 고질적인 문제들부터 시작해서 그날 영화제 센터에서 꽤 떨어진 극장을 찾아가는데 나타나지도 않아놓고 차비를 청구한 우버 예약 차량에 이르기까지, 크고 작은 일로 빡친 상태였다. 

그런데 그런 상태에서 관람을 시작한 <어거스트 앳 아키코즈>는 이런 내 안의 모든 불협화음을 더욱더 심하게 진동시키다가 궁극적으로는 무장해제 시켜버렸다. 좀 상투적인 표현을 쓰자면 <어거스트 앤 아키코즈>는 ‘힐링 영화’다. 

음악가 '더티 비치스Dirty Beaches'로도 알려진 알렉스 장 후앙타이가 주연이다. 대만 태생으로 하와이에서 성장기를 보낸 그는 영화 속에서도 ‘알렉스’라는 이름의 30대 중반 음악가 역이다. 인생의 뭔가 안 좋은 전환점이나 방황기를 맞은 것 같은 모습으로 오랜만에 하와이에 도착해서 할머니 집을 찾아가지만, 당황스럽게 집은 사라졌고 모르는 사람의 새집이 공사 중이다. 

여기서 놀라운 것은 전화를 걸어본 엄마도 할머니 할아버지가 수년 전에 돌아가셨다는 걸 그때까지 몰랐다는 것이다. “아무도 우리에게 알리지 않았다는 게 믿어지질 않아.” 가족 관계의 근절이 나타나는 순간이다.

사라진 어린 시절 하와이의 모습과의 근절도 느끼는 알렉스는 더욱 방황하는데, 결국 흘러 들어간 곳은 ‘아키코즈 부디스트 베드 앤 브렉퍼스트 (Akiko’s Buddhist Bed and Breakfast)’이다. ‘아키코’라는 일본계 미국인 할머니가 운영하는 민박 시설로 새벽에는 명상도 하고 낮에는 요가도 하는 곳이다. 푸르른 자연 속에 옛 일본계 농장 가옥들을 개조한 B&B는 고양이들이 느긋하게 돌아다니고 개구리들이 밖에서 합창으로 울어대는 곳이기도 하다.

아키코는 항상 머리에 두건을 두르고 열대 꽃을 한쪽에 꽂은 채, 주로 민소매 차림으로 부지런히 돌아다니는 70대다.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다소곳한 일본 할머니는 절대 아니다. 거의 락커 할머니 느낌이다. 인생을 좀 사신 분이다. 긴말을 묻지 않고도 알렉스가 방황한다는 것을 감지하고 나름 마음의 평안을 얻는데 가이드 해주는 역할을 한다.

실제로 호놀룰루 태생의 일본 이주민 3세 아키코 마수다가 영화 속 아키코 역을 맡았다. 배경이 되는 B&B도 실제 그녀의 것이다. 현실과도 매우 비슷한 두 인물의 설정 때문에도 그렇지만 영화는 다큐멘터리 같은 느낌이 들 때가 많다. 감독이 시나리오를 썼지만, 이 두 사람과 많이 협업하고 즉흥 연기도 많이 장려했다고 한다.

어거스트 앳 아키코즈 스틸

알렉스는 자기 안의 갈등과 상실감, 죄책감 등으로 힘들어할 때 색소폰으로 울부짖는 불협화음을 내기도 한다. 그러나 아키코와 함께 앉아 명상을 하다가 그녀가 해주는 기도에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동네 꼬맹이와 놀아 주기도 하고, 공동체 봉사활동을 하기도 하면서 자아 밖으로 시선과 성찰을 돌리기 시작한다. 

영화 속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 중의 하나는 불협화음과 소음이다. 왠지 일본식 불교 명상과 기도를 할 때면 완벽한 정적이 강구되어야 할 것 같은데, 오히려 아키코는 인생의 시끄러움을 끌어안아야 한다는 교훈을 준다. 예를 들어 거의 정글 같은 수풀 속의 가족 묘지를 정돈하러 가는 장면이 있다. 그녀는 사람들과 둘러서서 기도할 때, 고속도로를 달리는 차들의 소음도 ‘삶은 계속된다는 것을 상기시켜주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이런 철학으로 알렉스도 불협화음과 갈등 속에서 맑은 색소폰 소리와 마음의 평화를 찾아 나가기도 한다. 

영화의 제작비는 $100,000 (원화로 1억1천만 원이 조금 넘는 금액)으로 미국 영화치고 초저예산인데, 갖가지 현물 지원과 심지어 밥을 해서 갖다 주는 지역 주민들의 도움까지 있었다고 한다. 예산이 작았음에도 아름다운 전경들과 빛과 소음까지 하와이의 모든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감독과 스태프는 현지 로케이션의 모든 것을 활용한 것 같다. 소위 말하는 “프로덕션 밸류”는 뒤지지 않는 영화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로스앤젤레스 아시아 태평양 영화제에서 촬영상을 타내기도 했다. (이 작품의 조은수 촬영 감독은 <해어화>(박흥식, 2015) 등을 찍기도 한 한국인이다.) 

브루클린에 근거지를 둔 ‘팩토리 25’라는 독립 영화 및 음반 제작〮배급사가 내년 3월부터 미국에서 <어거스트 앳 아키코즈>를 개봉시킬 예정이다. 그렇지만 영화의 제작자들은 아직 해외 배급을 찾고 있는 상황이다.

‘새라 킴’이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진 한국계 미국인 프로듀서 김사화는 “우린 특히 한국과 일본에서 한정적으로라도 극장에서 상영할 수 있으면 정말 좋겠다. 이 영화와 그 속에 담긴 힐링의 메시지들을 최대한 나누고 싶은 욕망이 있다”고 전한다.

스틸

-에필로그-

워낙 연초에 본 영화라 이 글을 쓰기 위해서 다시 한번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결국 2018년 11월 도쿄 필멕스 심사위원으로 와서 쟁쟁한 경쟁작 10편을 진하게 보는 와중에 <어거스트 앳 아키코즈>를 다시 보게 됐다. 

이날 숙소로 들어오기 전에 본 것은 230분짜리 <코끼리는 그곳에 있다An elephant sitting still>(후 보, 2018)라는 작품이었다. 멀리 만저우리에 있다는 코끼리를 꿈꾸는 네 명의 주인공이 중국의 소도시에서 하루 동안 겪는 일련의 우울하고 화나고 끔찍한 사건․사고들을 따라가는 수작이다. 중국의 현재 자화상을 그렸다며 베를린 국제 영화제 월드 프리미어 당시부터 찬사를 받은 영화다. 소설가 후 보의 감독 데뷔작이기도 하다.
 
주인공들은 절망적인 상황 속을 벗어나고 싶어 하면서도 서로 ‘하지만 어디 가도 아무것도 변하지 않아. 다른 곳으로 떠난다 해도 인생은 다 이래’ 식의 담담한 대사를 읊기도 하는 영화다. 29세의 젊은 나이로 이 영화를 완성할 즈음, 후 보 감독이 자살했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그렇지만 영화 마지막 장면이 끝나고 엔드 크레딧 올라갈 때, 그의 웃는 모습이 담긴 추모 사진이 나오는 순간, 우린 방금 어느 한 사람의 성명서를 본 것인가, 삶의 무게와 아픔을 못 이기겠다는 자살 편지를 본 것인가 싶기도 했다. 근 4시간 동안 그의 영화와 함께 호흡한 끝에 압도적인 충격과 슬픔이 몰려왔다.  

히비야의 밤거리를 헤매다시피 하여 숙소로 돌아왔다. 와이파이가 자꾸 끊기는 일본 부띠끄 호텔 쪼끄만 방구석에서 <어거스트 앳 아키코즈> 재관람을 해야 한다는 것이 고맙기까지 했다. 

이 영화에 나오는 갈등과 부조화는 <코끼리는 그곳에 있다>의 것과는 현실적인 측면에서 구체적으로 다르다. 그러나 우리에 갇혀 빠져나갈 수 없을 것만 같은 절망감이나 혼란스러움은 누구나 겪을 수 있다. 이 두 영화에는 사뭇 다른 형식으로 나타나지만 공통적으로 느껴지는 것이 있다. <코끼리는 그곳에 있다>에 나오는 코끼리의 거친 울부짖음은 <어거스트 앳 아키코즈>에 나오는 알렉스의 색소폰 울부짖음을 연상케 하기도 했다.

다른 것이 있다면 알렉스의 색소폰 소리는 거친 울부짖음 끝에 차차 맑은 조화를 찾아낸다는 것이다. 영화를 재관람하면서 다시 치유 받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너무 안타까웠다. 평소 우울증에 시달렸다는 후 보 감독도 영화를 만들고 나서 아키코즈 부디스트 베드 앤 브렉퍼스트 같은 델 경험할 수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하와이의 햇볕과 터프한 할머니의 온기, 다른 곳에 가면 가끔은 기적 같은 만남을 가질 수도 있다는 것을 발견했더라면 말이다. 중국 영화인들이 대면하고 있는 억압인 상황을 생각하면 너무 안이한 상상일 수 있다는 것도 알지만 말이다.

애달픈 젊은 예술가의 죽음을 애도하며, 하와이의 푸르른 숲과 그 속에 있는 민박집에 마주 앉아 눈 감고 명상을 하며, 기도를 하듯 노래도 하고, 색소폰도 불고, 눈물도 흘리는 두 사람 알렉스와 아키코를 생각하며 동경에서의 새벽을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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