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편 모두 사사로운 이유에서 선택한 영화들이지만, <
디아만티노Diamantino>(가브리엘 아브란테스/다니엘 슈미트, 2018)를 소개하는 이유는 이 리스트의 취지에 가장 어울린다는 생각에서이다. 가장 공감했거나, 탁월하다고 생각한 영화는 아니었다. 여러 유형의 영화들을 참신한 조합으로 선보일 수 있는가를 항시 고민해야 하는 직업의식의 발로에서 <디아만티노>를 봤을 때, 이 영화는 무논리, 무정형, 무감각의 진공상태로 빠져들게 하는 완력이 대단했다. <디아만티노>는 이민 위기, 민족주의, 트럼프, 인공두뇌학, 젠더 바꾸기, 정치적 부패, 인터넷 범죄 및 글로벌 스포츠 비즈니스의 뒤안을 구불구불 훑어간다. 포르투갈 출신의 영화감독 가브리엘 아브란테스와 미국인인 다니엘 슈미트가, 몇 편의 단편영화를 거쳐 공동으로 연출한 첫 번째 장편영화이다. 아브란테스와 슈미트는 허접한 컴퓨터 그래픽 이미지와 설익은 특수효과, 이미지 훼손, 장르 횡단, 불경스러운 상상력을 오가며, 어디서도 본 적이 없는 아방가르드 SF 코미디를 창조해냈다.
글로벌 축구 스타 디아만티노 마타모로스(미겔 고미스의 <
타부Tabu>(2012), <
천일야화As mil e uma noites>(2015)에 나온 배우 카를로타 코타가 뇌리에 각인되는 연기를 보여준다)는 타고난 운동능력이 아니라면, 세상 물정에 어두운, 공허한 청년이다. 페널티킥을 실축함으로써, 그가 이루려 했던 마지막 목표인 포르투갈의 월드컵 우승을 이루지 못한 디아만티노는 자신의 지평을 넓히고 사람들에게 믿음을 줄 수 있는 다른 방법을 찾기로 결심한다. 그 자신의 실책 때문에 심장마비로 사망한 아버지를 향한 부채감으로 선한 사역에 복무하기로 작정한 디아만티노는 모잠비크를 탈출한 난민 소년 라힘을 입양한다. 그러나 열심과 정성을 다해 살뜰히 돌보았던 이 소년의 정체는 포르투갈 정부의 비밀 임무를 수행하는 레즈비언 요원 아이샤. 아이샤는 디아만티노의 사악한 쌍둥이 자매가 연루된 돈세탁 작업을 조사하기 위해 저택에 잠입하였다. 여기에 국가의 자부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무적의 슈퍼 팀과 위대한 포르투갈 재건을 위해 디아만티노를 복제하려고 하는 미친 과학자 람보르기니 박사가 준동한다. 더하여 이 미끈한 축구 아이콘의 공상 속에 등장하는 초고층 빌딩 크기의 털북숭이 강아지도 있다.
인물의 유형, 공간, 사건, 묘사의 수준에서 보는 이들을 어리둥절하게 하는 <디아만티노>는 전 지구적인 대격변을 현장에서 경험하는 축구 스타의 고통스러운 환상을 보여준다. 과연 다음 이야기는 무엇일까? 를 걱정해야 할 정도로, 중심을 상실한 채 흘러가는 이 영화의 내러티브를 달리 요약할 방법은 없다. 사건은 빠르게 진행되지만, 전개가 혼란스럽지는 않다. 강인한 육체를 가진 어린아이라고 할 수 있는 주인공 디아만티노는 모든 측면에서 메트로 섹슈얼 슈퍼스타 축구 선수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를 연상시키는 아바타이다. 대리모를 통해 아들을 입양한 호날두처럼 디아만티노는 아프리카 이민자 소년을 입양한다. 그러나 영화에는 다음과 같은 자막이 태연자약하게 달려 있다. “여기서 본 이야기, 모든 이름, 등장인물. 사건은 실제가 아닙니다. 실존 인물, 장소, 제품, 유전적 절차 또는 거대한 강아지에 대해 어떠한 유추도 해서는 안 됩니다.” 뻔뻔스럽기까지 한 이 경고는 스스로를 희롱하려는 듯한 이 영화의 어조를 닮았다.
디아만티노를 어떻게 볼 것인가? 라고 질문한다면 영화를 보는 관객들의 판단은 곤란해진다. 우리의 주변에는 이런 유형의 사람들이 항존한다. 탄탄한 근육과 아름다운 몸을 가진 뇌가 텅 빈 사람. 그는 순수한 인간이거나 자신을 둘러싼 것들에 대해 무지한 저능아이다. 디아만티노는 그가 처한 상황에서 늘 소외된다. 딱한 처지의 난민들을 동정하는 그의 선의는 너무 순수해서 가장(假裝)한 것처럼 보인다. 디아만티노의 순수함과 유치함, 성실함은 이렇듯 심각한 세계와 대비되면서 풍자의 효과를 불러일으킨다. 빚어놓은 듯 단단한 육체는 디아만티노의 자선 의지와 한 몸을 이룬다. 성실한 육체에 깃든 성실한 의지. 디아만티노의 어린애 같은 태도는 경멸의 대상이지만 영화는 순수성의 인격화를 표상하는 이런 태도야말로 가장 위대한 인류의 자산이라고 말하려는 것 같다. 변화하는 캐릭터로서 디아만티노의 전환점은 난민의 위기를 발견하는 순간이다. 개인 요트와 저택에 파묻힌 그가 아는 유일한 고통은 축구경기에서 레드카드를 받는 것이었다. 그러나 별안간 그는 현실 세계의 고통을 알게 된다. 이 부조리극이 어떤 심각한 정치 드라마보다 논쟁적이 되는 것도 이 순간부터이다. 여기서부터 관객들은 그들이 살고 있는 ‘미친 시대’를 목도하게 된다.
어디서도 본 적이 없다고 했지만 <디아만티노>는 오만가지 장르, 작가의 계보를 활발하게 혼성한다.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초기작들을 연상시키는 인물들, 특별히 디아만티노의 쌍둥이 누이는 알모도바르적인 캐릭터의 전형이다. 글을 조각내어 다른 순서로 재조합한 윌리엄 버로우즈의 콜라주 플롯, 리차드 켈리의 <
사우스 랜드 테일Southland tales>(2006)의 허무주의, 존 워터스의 터무니없는 컬트 고전들, 한나 바르베라의 풍자만화, 제임스 본드의 패러디, 심지어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의 성 정치학적 비전에 이르기까지 이질적 요소들의 접붙이기를 펼쳐 보인다. 서사는 고전적 팝 컬쳐, 신앙심이 깊은 시네필리아, 초현실주의 대중문화 아이디어의 융합이다. 아브란테스와 슈미트는 유럽을 잠식한 난민 위기, 네오-파시즘, 블랙시트, 감시 테크놀로지, 빈곤, 스포츠 애국주의, 인간복제와 같은 현대적인 주제들을 한밤중의 소동극 위에 얹는다. 여러 가지 재료를 넣고 흔들어댄 칵테일마냥 각각의 주제는 어떤 초점도 만들지 않고 평평해진다. 감독은 진정성 있게 이들 주제를 다루고 있는가? 이 유치한 ‘병맛 코미디’는 무엇을 표방하려는가?
<디아만티노>는 하나의 상태에서 무작위적으로 확장해나가는 일종의 자유 형식을 채택한 영화이다. 이미지의 전략도 같은 맥락을 따른다. 어수선하고 화려한 색채, 지글거리는 16mm 필름의 터프한 룩, 한편으론 미끄러질 것처럼 블링블링한 상업광고의 비주얼, 의도적으로 장난스럽게 만들어진 CGI 화면을 합쳐 놓은 이 영화의 미학은 스토리텔링만큼 거칠고 우연적이다. 관념보다 이미지를 선호하는 영화감독은 일류가 될 공산이 크다. 숱한 연상을 자유로이 불러일으키면서도 편협한 목적으로 위해 소비되지 않는 이미지를, 이 영화는 보여준다. 총체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만듦새에도 불구하고, <디아만티노>는 2018년 칸영화제 비평가 주간에 출품되어 그랑프리를 받았다. 카오스적인 무논리가 횡행하는 키치 미학에 비평가들이 호응했다는 사실은 아이러니이다. 평론가들의 눈이 어떻게 된 것일까? 영화의 표면에는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폭력적인 체제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곳, 균질화된 표현의 영역 바깥으로 탈주하려는 욕망이 넘실댄다. 남발되는 시각효과는 기술적으로 하자가 있고, 참혹한 수준의 발 연기에 한숨이 나오는 사람도 있겠지만, 영화에는 개성을 더한다. 이 반(反) 미학이 겨냥하는 바는 명확하다. 어떤 영화로부터의 영향도 거부하지 않는, 그 무엇과도 다른 영화를 만들겠다는 것.
<디아만티노>를 본 뒤 며칠간 한 편의 영화가 머리를 계속 맴돌았다. 스탠리 큐브릭의 <
시계태엽 오렌지Clockwork orange>(1971)이다. 물론 두 영화는 다르다. 누군가는 “격이 다르다”고 화를 낼 수도 있다. <시계태엽 오렌지>의 교화되지 않는 앙팡테리블 알렉스와 <디아만티노>의 백치 축구 선수 디아만티노는 불가역적인 강압과 제도적 폭력의 희생자들이다. 하지만 그들의 문제적 성정(性情)은 교정되지 않는다. 알렉스의 내면화된 폭력 성향에 의해, 디아만티노의 순진무구함에 의해 그들은 바뀌지 않는다. 두 영화는 인간의 본성에 대해 철저히 냉소적인 태도를 보이지만, 그것을 조롱하기보다는 인간의 결점을 즐긴다. 심지어 그 결점이, 살면 살수록 나빠져만 가는 이 세상에서 인간을 구제할 수 있다고 말한다. 디아만티노의 백치미는 그 우매한 순수성으로 인해 규범화된 폭력과 정치적 위선을 도드라져 보이도록 한다. 언제나 문제는 상상력이 아니겠는가. 오랫동안 인류를 사로잡았던 예술작품이 보여주었던 것도, 일상을 풍요롭게 할 최상급의 공상도, 그것이 없다면 영화를 볼 이유가 없는 희열의 기원도 모두 상상력에 있다. 행여 <디아만티노>는 모든 관객이 즐거이 볼 수 있는 영화는 아니다. 그러나 열광적으로 그것을 즐기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이상하지만 용감한, 올해의 영화를 뽑으라면, 나는 여기에 한 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