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밤 사자는 잠든다 스와 노부히로, 2017

by.허문영(영화평론가) 2018-03-08조회 15,013
사자는 오늘밤 잠든다 스틸

<오늘밤 사자는 잠든다>를 보고 난 첫 느낌은 그저 행복하다는 것이었다. 빛과 소란과 움직임만으로 이뤄진 온전한 축제를 치른 느낌. 여기엔 장식도 도식도 클리셰도 없다. 계획과 우연, 작위와 즉흥이 일견 무질서하게 조우하는데 어떤 파열도 마찰도 없이 불협화음조차 아름다운 노래가 되는 기적 같은 세계. 장 르누아르와 존 포드와 킹 비더와 자크 베케르와 장 비고의 어떤 영화들에서 우리가 만났던, 생의 송가(頌歌)라고 부르고 싶은 순간들의 파노라마. 영화 속에서 아이들이 만든 어설픈 공포영화를 보고 장(장 피에르 레오)은 “단순하고 아름답다. 영화 만들기의 기쁨이 느껴진다.”고 말하는데, <오늘밤 사자는 잠든다>라는 영화에 고스란히 돌려주고 싶은 말이다. 

하지만 이야기도 축제도 삶도 끝을 피할 수 없다. 모든 건 언젠가 막을 내리고 사라져갈 것이다. 장은 “모든 이야기의 끝은 죽음”이라고 말한다. 끝이 없다면 이야기는 아름다울 수 없고 축제의 신명은 없을 것이며 생은 빛날 수 없을 것이다. 소멸과 죽음의 예기는 축제의 오점이 아니라 동반자다. <오늘밤 사자는 잠든다>라는 축제의 영화는 동시에 죽음에 관한 영화이기도 하다. 

노배우 장은 영화 속 영화에서 지금 죽음을 연기해야 한다. 하지만 그는 어떻게 죽음을 연기해야 하는지 모른다며 투덜거린다. 72세의 이 사내는 실은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다. 그의 불안한 눈빛은 관조와 달관이 아닌 생의 집착으로 가득하다. 아마도 죽음에 너무 가까이 있어 죽음을 연기할 수 없었을 것이다. 상대역 여배우의 잠적으로 그에게 며칠간의 휴가가 주어진다. 촬영지 가까운 곳에 40여년 전 그가 떠나온 여인의 집이 있다.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는, 그러나 여전히 아름다운 텅 빈 그 집을 그는 찾아간다. 그곳에서 영화를 찍으려는 아이들 무리를 만난다. 

<오늘밤 사자는 잠든다>는 도처에 죽음이다. 죽음을 연기하려던 노배우는 죽은 옛 연인의 무덤을 다녀온 뒤 ‘죽음의 위험’이라는 조악한 팻말이 붙어있는 폐가에서 그녀의 영혼을 만난다. 아이들은 귀신이 등장하는 영화를 찍으려 하며, 아이들 중 하나인 쥘은 죽은 아버지를 보고 싶어 한다. 죽음에 너무 가까워 굳어가는 노인과 죽음에 너무 멀리 있어 오히려 죽음을 마음껏 유희하는 아이들이 모여 죽음의 영화를 만들고 죽음의 노래를 부른다. 

극 중에서 아이들과 노인이 함께 부르는 노래 ‘사자는 오늘밤 죽는다 Le lion est mort ce soir’는 그대로 영화제목이 되었고 일본어 제목도 ‘사자는 오늘밤 죽는다 ライオンは今夜死ぬ’이다. 그 노래는 아프리카 줄루족 출신의 솔로몬 린다가 'Mbube'라는 제목으로 처음 불렀고(그는 정글에서 사자를 만났을 때 겁에 질려 ‘사자야, 가만히 있어’라고 반복적으로 흥얼거렸고 이 흥얼거림이 노래가 되었다), 피트 시거를 비롯한 세상의 수많은 가수들이 다시 불렀다. 영어권에선 <라이언 킹>의 주제곡으로도 사용된 ‘사자는 오늘밤 잠든다 The Lion Sleeps Tonight’로, 불어권에선 ‘사자는 오늘밤 죽는다 Le lion est mort ce soir’로 널리 알려졌다. 불어와 일어 제목의 죽음이 영어와 한국어 제목에선 잠으로 바뀐 셈이다.   

잠과 죽음 사이. 죽음을 연기하는 방법을 모르겠다는 노배우 장(장 피에르 레오)에게 극 중 감독은 “죽음은 잠드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장은 “죽음은 조우”라고 말하지만, 무엇과의 조우인가, 라는 아이들의 질문에 답하지 못한다. 장은 옛 연인의 집에 자꾸만 잠든다. 우리는 그의 반복된 잠이 죽음에 이르는 노쇠의 증상인지, 죽은 연인과의 재회를 위한 시도인지 식별할 수 없다. 다만 ‘죽음의 위험’이라는 집에서 그는 자꾸 잠들고, 죽은 연인 쥘리엣을 만난다. 

여기엔 한 가지 이상한 규칙이 있다. 우리의 기대와는 달리 옛 연인 쥘리엣은 장의 잠 속에서가 아니라 아이들이 등장한 직후에 어김없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아이들이 오자 죽은 옛 연인도 뒤따라온다. 아이들의 소란이 불러일으키는 생의 활력이야말로, 장이 죽음의 의미라고 믿는 조우를 이끄는 것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아이들이 영화 만들기 놀이를 시작하자 비로소 불가능한 조우가 시작된다. 이 영화의 심장은 죽음에 대한 사유가 아니라 아이들의 놀이다. 

스와 노부히로는 지금 죽음을 말하고 있지만 죽음을 찍고 있는 게 아니다. ‘죽음을 연기하는 방법을 모르겠다’는 장의 말은 ‘죽음은 연기될 수 없다’는 말로 들을 수도 있다. 유능한 연기자라면 그가 연기해야 할 모든 감정을 자신의 내부에서 끌어낼 수 있다. 하지만 죽음을 어떻게 자신의 내부에서 끌어낼 수 있는가. 그는 죽은 척할 수는 있지만 죽음을 연기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영화는 죽음을 기록할 수 있지만 재현할 수 없다. 장은 죽음을 끝내 연기하려 하지 않고 영화 속 영화 역시 죽음의 촬영에 실패한다. 그 실패가 <오늘밤 사자는 잠든다>라는 영화의 처음과 끝에 놓여있다. (영화 속 영화를 찍는 첫 장면에서 죽음을 연기할 줄 모르겠다던 장은 영화 속 영화 촬영이 재개된 마지막 장면에서 ‘죽은 척하기’를 거부하고 눈을 부릅뜬다.)
 
오늘밤 사자는 잠든다 스틸

죽음이 그렇다면 놀이는 어떠한가. 놀이는 자기 자신 외에 다른 목적을 갖지 않는, 그 자체로 존재하는 활동이다. “누구든지 마음만 내킨다면 정의, 아름다움, 진리, 선함, 마음, 신 따위의 거의 모든 추상적인 것을 부정할 수 있겠지만 놀이는 결코 부정할 수 없다.”(요한 호이징하) 부정될 수도 한정될 수도 없는, 그 자체로 온전한 놀이는 극영화라는 허구의 세계 안에서 적절한 기능적 자리가 배당된 행위가 될 수 없다. 그러므로 노는 척할 수는 있으되 놀이를 연기할 수는 없다. 죽음과 마찬가지로 영화는 놀이를 기록할 수 있지만 재현할 수 없다. 달리 말하면 죽음과 놀이는 상연될 수 있되 연기될 수는 없다. 

스와 노부히로가 믿는 것은 아이들의 육체이며 아이들의 놀이다. 그는 아이들처럼 놀 수 없고 아이들처럼 영화를 찍을 수 없을 것이다. 다만 아이들의 놀이를 기록할 수는 있을 것이다. 스와 노부히로는 아이들을 놀게 한 뒤 그것을 자신의 카메라에 담는다. 사랑스럽지만 통제할 수 없는 노인 장 피에르 레오 역시 그에겐 또 다른 아이였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필모그래피에서 멈춘 적이 없었던 즉흥 연출과 즉흥 연기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늙고 어린 이 아이들의 놀이에서 발견한 것 같다. <오늘밤 사자는 잠든다>는 죽음을 번민하거나 재현하기를 멈추고(장의 대사를 빌자면 지나치게 진지해지기를 멈추고) 아이들의 놀이를 찍기로 결정한 스와 노부히로 자신의 선택에 관한 영화이기도 할 것이다. 

프랑스 남부 소도시에서 촬영된 이 영화는 모네의 그림을 보는 듯한 빛의 난장인데, 감독 자신의 표현을 빌리면, 그중에서 가장 밝은 빛을 발하는 존재는 바로 아이들이다.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진 아이들의 소란이 이토록 아름다운 음악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믿기 힘들다. 아이들과 노인이 호숫가로 소풍을 떠나며 ‘오늘밤 사자는 잠든다’를 함께 부르는 장면보다 아름다운 장면을 2017년의 다른 영화에서 보지 못했다. 이 아름다움에는 해방감에 가까운 자유의 향기가 있다. 일본의 한 평자는 “이 영화는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을 위한 마스터클래스”라고 말했는데 동의할만한 말이다. 

스와 노부히로는 마치 영화사를 잊은 것처럼, 그리고 자신의 영화 이력조차 잊은 것처럼 우리에게 영화 만들기의 행복감이 영화 그 자체를 통해서 전염될 수 있음을 믿고 이 영화를 만든 것 같다. 그리고 그 믿음은 오차 없이 이 영화를 보는 103분 동안의 상영 시간 내내 우리를 소란의 축제로 이끌고, 생의 감각을 일깨운다. <오늘밤 사자는 잠든다>는 누벨바그보다 더 누벨바그적인 영화, 누벨바그가 한 시대의 사조가 아니라, 영화의 영원한 출발점이어야 한다는 다짐과도 같은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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