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여자들 켈리 레이차트, 2016

by.장영엽(씨네21 편집장) 2018-02-20조회 7,506
어떤 여자들의 한 장면, 로라 던
첫번째 에피소드의 로라

예년에 비해 사사로운 영화리스트를 선정하기가 몹시 힘들었던 한해였다. 챙겨보고 싶은 영화들을 충분히 보지 못했던 까닭도 있었겠지만, 마음에 크게 와닿은 영화도 드물었다. 그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보니 다소 지쳐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이건 단순히 영화를 수적으로 많이 본다는 물리적인 체험의 피로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갈수록 영화를 보는 데 너무 많은 에너지를 낭비하게 된다는 생각이 든다. 자극적인 소재와 긴 러닝타임, 현란한 속도의 뭇 영화들은 때때로 현기증을 일으켰다. 그런 2017년의 영화로 켈리 레이차트 감독의 <어떤 여자들>을 선정한 건 간결하고 담백하지만 필요한 모든 것들을 담고 있는, 영화의 힘을 체감할 수 있게 한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어떤 여자들>은 황량한 벌판을 가로지르는 기차의 모습으로 영화의 포문을 연다. 이 기차의 목적지가 어디인지, 무엇을 싣고 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분명한 건 기차가 어디론가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이며, 관객이 볼 수 있는 건 그 여정의 일부라는 사실 뿐이다. 이는 곧 <어떤 여자들>이 주요 등장인물에 대해 취하고 있는 태도이기도 하다. 그들의 과거와 미래는 켈리 레이차트의 관심사가 아니다. 오직 지금, 여기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 그녀에겐 중요하다. 영화는 미국 북서부 몬태나주에 살고 있는 네 여성의 현재를 조명하는데, 본인도 모르는 새 한번쯤 스쳐지나갔거나 지인을 공유하고 있는 그녀들은 영화의 마지막까지 어쩌면 알 수도 있었을 법한 ‘어떤 여인들’로 남는다. 끝내 연결되지 못하고 단절된 그녀들의 삶은 몬태나 특유의 황량하고 음울한 정서와 맞물려 미국 서부에 대한 낯선 풍경화로 기억될 듯하다. 

<어떤 여자들>은 세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되어있다. 첫번째 에피소드의 주인공은 변호사 로라(로라 던)다. 그녀는 상해배상 사건을 두고 윌이라는 이름의 의뢰인에게 시달리고 있는 중이다. 승소 가능성이 희박한 사건을 두고 8개월째 어거지를 쓰던 윌은 로라가 소개시켜준 나이 지긋한 남자 변호사 앞에서 순한 양이 된다. “내가 남자라면 정말 좋았을 텐데. 내가 법을 설명해주고 사람들이 듣고서 알겠다고 말하면 정말 일하기 편했을 거야.” 로라는 한탄한다. 설상가상으로 그녀는 모든 것을 잃고 총기 인질극을 벌이는 윌을 설득해야 하는 역할을 맡는다. 
 
어떤 여자들의 한 장면, 지나
두 번째 에피소드의 지나

두번째 에피소드는 몬태나 근교에 새로운 집을 짓고자 하는 지나의(미셸 윌리엄스) 이야기다. 켈리 레이차트의 대표작 <웬디와 루시>, 서부극을 여성의 관점으로 재해석한 <믹의 지름길>에 이어 미셸 윌리엄스는 다시 한번 레이차트의 여성 캐릭터로 분했다. 그녀가 맡은 지나는 강한 생활력과 결연한 의지를 가진 여성이다. 하지만 그녀의 가족은 붕괴 직전이다. 지나의 남편과 딸은 그녀에게 전적으로 의지하면서도 지나의 행동에 불평을 일삼거나 훼방을 놓는다. 그럴수록 지나는 새로운 집에 쓰일 사암을 구하는 일에 더욱 더 집착한다. 

세번째 에피소드에는 두 여성이 등장한다. 몬태나 도심과 멀리 떨어진 목장에서 말을 돌보는 제이미(릴리 글래드스턴)와 그녀가 듣는 학교법 특강의 파트타임 강사 베스(크리스틴 스튜어트)가 그들이다. 우연히 두 사람은 특강이 끝난 뒤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으며 이야기를 하게 되고, 제이미는 베스에게 호감을 느낀다. 하지만 돈을 벌기 위해 왕복 8시간의 거리를 운전하며 낮에는 로펌 변호사로, 밤에는 파트타임 강사로 일하는 베스에겐 타인에게 신경쓸 겨를이 없다. 
 
어떤 여자들의 한 장면, 제이미

어떤 여자들의 한 장면, 베스
세번째 에피소드의 제이미와 베스

켈리 레이차트의 영화 속 인물들은 언제나 더 나은 삶을 위해 고군분투한다. 많은 경우 기회는 길 위에 있다. <웬디와 루시>의 웬디가 새로운 일자리를 위해 아이다호에서 알래스카로 향하고, <믹의 지름길>의 세 가족이 삶의 터전을 떠나 오레건의 산길을 걷는 이유다. 하지만 길 위에서의 모든 기회가 성공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레이차트의 관심은 길 위에서 목적과 방향을 잃고 방황하는 인물들에 머물러 있다. 어디로 가야할지 알지 못하는 인물들이 갈팡질팡하는 사이, 레이차트의 카메라는 그들이 몸담고 있는 풍경을 조명한다. 숲과 평야, 강과 사막, 도로와 거리. 21세기 미국영화가 쉽게 간과하곤 하는 인물과 풍경의 관계망이 곧 레이차트 영화의 핵심이다. 다시 말해 레이차트의 영화에서는 어디로 가는지가 아니라 어디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지가 중요하다. 목적지보다 경유지가 중요한 기이한 로드무비, 그것이 켈리 레이차트의 영화다. <어떤 여자들>에서는 제이미와 베스가 등장하는 세번째 에피소드가 특히 이러한 특성을 가지고 있다. 

세번째 에피소드의 여정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전에, <어떤 여자들>의 풍경에는 전작과 다른 중요한 차이가 있다는 점을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올드 조이>(2006)부터 <어둠 속에서>(2013)까지, 레이차트는 대부분의 전작을 미국 서부의 오레건을 배경으로 촬영했다. 하지만 미국 몬태나 출신의 작가 마일리 멜로이의 단편소설 세 편(국내에는 세번째 에피소드의 원작인 「트래비스 B」가 수록된 단편소설집 『지금 두 가지 길을 다 갈 수만 있다면』이 출간됐다)을 원작으로 하는 <어떤 여자들>의 경우 소설과 마찬가지로 북서부 몬태나주를 영화의 주요 무대로 정했다. 사방이 산맥으로 둘러싸여있으며, 미국에서도 인구 밀도가 낮기로 유명한 몬태나의 지형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인지, <어떤 여자들>로부터 느낄 수 있는 단절감과 고독감은 레이차트의 어떤 영화보다 깊고 통렬하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네 여성은 성차별과 무관심이 만연한 현실에서 나름의 방식으로 고군분투하고 있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 묘하게 닮아있는 이들의 삶은 계급과 환경에 따라 여성이 처할 수 있는 상황의 분명한 차이를 보여주는 것 같다. 

영화 속 주요 등장인물들 중 가장 상황이 나아보이는 사람은 로라다. 남성 의뢰인이 직업여성으로서의 그녀를 깎아내리고 신체적 위협을 가하는 순간이 찾아오지만 지식과 전문성을 갖춘 로라는 언제나 권력관계에서 우위에 있다. 무엇보다 그녀는 선택을 할 수 있다. 로라는 걸려오는 전화를 받는 것, 의뢰인의 요청을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 스스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인물이다. 지나는 가족과 정서적으로 단절되어있지만 가장으로서의 경제권을 가지고 있다. 스스로 기회를 찾아 몬태나 근교를 배회하는 그녀는 행복한 가족 대신 멋진 집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가장 암담한 인물은 제이미다. 목장 노동자인 그녀는 사회에서 완전히 소외당한 존재로 묘사된다(그녀의 이름인 ’제이미’는 영화에서 단 한번도 호명되지 않는다). 말에게 사료를 주고, 개와 함께 눈 덮인 설원을 순찰하는 제이미의 곁에는 아무도 없다. 그녀의 유일한 희망이 되는 베스도 첫번째 에피소드의 로라와는 상황이 좀 다르다. 블루칼라 노동자 출신의 어머니와 언니를 둔 베스는 변호사가 됨으로써 제이미의 운명으로부터 지금 막 벗어났지만, 그녀에게 남은 건 눈덩이처럼 늘어난 학자금 대출금 뿐이다. 이처럼 이야기의 시점이 전문직 여성(로라)과 가장 역할을 하는 어머니(지나), 블루칼라 노동자(제이미)로 이동할 수록, 영화의 배경이 몬태나주 리빙스턴의 도시에서 근교를 거쳐 시골로 이동할 수록, 등장인물들의 운명은 한층 어둡고 잔혹해진다. 세번째 에피소드의 후반부, 더 이상 수업에 나오지 않는 베스를 찾아나선 제이미는 어두운 새벽의 고속도로에서 베스가 느꼈을 고독감을 체감한다. 하지만 베스의 마음을 위로해줄 수 있으리라던 희망이 무산된 뒤, 목장으로 가는 길의 황량한 초원 한복판에 멈춰서버린 제이미의 모습이 깊은 여운을 남긴다(이 장면에서 몬태나 주 출신의 신인배우, 릴리 글래드스톤의 표정은 정말 압권이다). 21세기 미국 여성들의 산산이 부서진 꿈, 그 황량한 좌절의 풍경을 켈리 레이차트의 영화는 고요하게 응시한다. 이처럼 남다른 속도와 감각을 지닌 한국 여성 감독의 출현을 2018년에는 기대해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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