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진 가장, 길 잃은 가족: <바람난 가족> 영화 글쓰기 키트

by.한효진(영화글쓰기키트 수강생) 2019-11-21조회 480
바람난 가족 스틸

한국사회에는 유난히 중년 남자들의 기를 살리자는 식의, 이들을 달래는 분위기가 있다. 캠페인 같은 이 구호는 가장 사적인 집단, 집안에서 시작된다. 결혼 전, 친정엄마는 ‘너가 박 서방한테 잘해야 한다, 남자는 인정과 칭찬을 먹고 산다’고 조언했다. 심심치 않게는 ‘아들 하나 키우는 기분’으로 살아야 가정이 평화롭다며 훈수를 두는 이들도 있었다. 아이들과 놀아주는 아빠들을 보면서 할머니들-현실은 황혼육아로 가장 고생하고 있음에도–은 ‘요즘 남자들 참 딱 하다’고 혀를 끌끌 찼다. ‘시대를 잘못 타고 난 요즘 남자’라는 말은 다시 말해, 연장자 남성이 존중받는 시대는 지났다고 고백하면서도 마지못해 인정하고 있는 것 같다.

창근(김인문)은 625전쟁 당시 어머니와 누이를 북에 남겨두고 아버지와 단둘이 남쪽으로 피난 왔다. 죽음을 목전에 두고 김일성 장군가를 부르며 북에 두고 온 가족들에 대해 극도로 집착하지만, 함께 내려온 아버지와는 그의 부고도 몰랐을 만큼 관계가 온전치 않다. 피를 쏟아내며 괴로워할 때도 그의 곁을 지키는 사람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며느리 호정(문소리)뿐, 아내나 아들은 외면하며 노망난 늙은이 취급을 한다. 창근의 가족은 실패했다. 그리고 그 실패 모형은 대물림 되었다. 아들 영작(황정민)은 변호사라는 번듯한 직업과 화목해 보이는 가정이 있지만, 깊은 관계의 애인 연(백정림)이 있다. 그는 정부도 마다하는 민간인 학살 사건을 조사하며 돈보다 정의를 위해 핏대를 세우지만, 집에서는 호정과 한 침대에 누워있어도 공허한 몸으로 등을 돌릴 뿐이다. 영작이 “짐승 같은 시간은 관두고 제발 사람답게 자존심 좀 지켜 가면서 살자”고 유가족들에게 연설하지만 실은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이다.
 

붕괴된 가족 안에 무너진 가장이 있다. 영화<바람난 가족>에 등장하는 남자들을 보면 가장의 역할은 물론, 어른으로서도 성숙하지 못하다. 창근을 요양원에서 모셔와 약주를 따르는 것도 호정이고, 창근이 피를 토하자 영작은 ‘호정아’를 외치며 자리를 피하기 바쁘다. 아이를 잃고 난 뒤에도 영작은 애인에게 쏟아내서 위로받으려 하지만, 호정은 산을 오르며 홀로 슬픔을 쏟아낸다. 우편집배원은 대책 없이 아이만 많은 무능력한 가장으로 그려지고, 소통이 안 되는 지운(봉태규)의 부자지간은 남보다도 못하다. 이들은 나름대로 가장의 역할을 해내려고 애를 썼겠지만, 현실은 권위 있는 존경받는 아버지의 모습은 아니다. 연이는 대놓고 “남자들은 다 미성숙해. 그냥 다 애’라고 직격탄을 날린다. 

상습적으로 절도를 일삼는 가정주부를 변호하던 영작에게 판사는 묻는다. “가정은 어떤가요?” 영작은 “남편은 회계사인데요. 가정적으로 아무 문제없는 중산층입니다.”라고 자신있게 답한다. 그러나 절도범 주부는 고개를 푹 숙인다. 이 대조 속에서 사회적 위치나 경제적인 능력을 갖춘 남자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가정은 완벽하게 ‘정상적’일 것이라는 우리들의 편견이 오히려 ‘비정상적’인 가족을 만든 것을 엿볼 수 있다. 영화 내내 ‘니들이 광국이를 알아? 주니어 웰터급 5위 광국이가 내 처남이야’라는 우편집배원의 외침은 처절하고도 처량하게 들린다. 챔피언도 아닌, 5위지만. 그리고 내가 아닌 처남이지만. 인정받지 못한 가부장은 그렇게 처남이라도 붙들고 체면을 세워야 했다.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아버지가 가족의 권력자가 된 역사는 복잡하지만 어쩌면 당연하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 들어 부계 중심의 가족은 조금씩 사라지고 가족의 형태나 개념 역시 이전보다 확대되어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과거 전통적 가족 모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여전히 한 뿌리, 핏줄에 집착하며 시대에 맞지 않는 속도를 낼 때가 있다. 그 속도에 밀려 가족 간의 애정은 바싹 메마르고 빈껍데기만 남아 단 한 번의 자극에도 바스락 부서진다.

“엄마 난 입양된 거 몰랐을 때가 더 좋았던 거 같애. 왜 얘기해 줬어? 애들이나 다른 사람들이 놀릴 때마다 난 자꾸 엄마 생각이 나는지 모르겠어.”

수인(장준영)이는 영작과 호정이가 입양한 아들로 혈연으로 맺어진 전형적인 의미의 가족과는 거리가 멀다. 수인은 자신이 입양된 아이라는 것을 알게 된 순간 자꾸 ‘엄마 생각’이 나는데 여기서 엄마는 호정을 말하는 건지, 수인을 낳은 엄마를 말하는 건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수인은 가슴으로 낳은 엄마를 따라 가족의 일원으로 다시 자리를 잡는데, 무엇이 진짜 가족인지 헤매고 있는 다른 남자들과 차이를 느끼게 한다. 겨우 욱여넣은 가장의 자리와 관계를 중심으로 맺어진 가족 사이에서 휘청거리던 영작과 호정은 결국 수인의 죽음으로 무너지고 만다.

“내 인생이 왜 이렇게 엉망이 된 건가. 처음에는 모든 잘못을 다 네 아버지한테 뒤집어씌웠지. 나는 요즘에야 진짜 내가 어른이 된 기분이야. 내 인생 내가 책임지는. 인생은 솔직하게 살아야 되는 거더라. 그렇지 않으면 그게 사는 게 아니야. 하루를 살아도 사는 거같이 살아야지. 나는 이런 내가 좋아.”

영화 내내 가족들은 한 공간에 함께 있으면서도 시선은 서로 엇갈리고 눈을 마주치지 않는데, 창근의 장례식 이후 한 이불에 누워 얼굴을 마주한다. 이 한 컷으로 이들이 한때는 좋았던 가족이었음을 상기시킨다. 병한(윤여정)은 15년 만에 섹스를 하고 처음으로 오르가즘도 느끼며 산다고 고백하며 40년간 남보다도 못했던 가족을 벗어나 이제 진짜 삶을 살겠다 선언한다. 그리고 남들 시선을 의식하지 말고 솔직하게 살자고 다독인다.    
 

2003년 작 <바람난 가족>(임상수, 2003)은 시어머니, 아들, 며느리 모두 바람이 난다는 다소 자극적인 내용을 담으며, <처녀들의 저녁식사>(1998), <눈물>(2000)을 잇는 임상수 감독의 세 번째 작품이다. 이미 <처녀들의 저녁식사>로 여자들의 솔직한 성 담론으로 한 차례 센세이셔널을 일으켰던 만큼 <바람난 가족> 역시 또 한 번 여자들의 ‘발칙한’ 영화라 홍보되었다. 막상 영화가 개봉되자 가볍게 배우들의 몸 감상에 나섰던 관객들이 어쩐지 찝찝한 마음으로 극장을 나섰고, 예상대로 호불호가 분명히 나뉘었다. 영화 속 가족들의 모습이 판타지가 아니라 지극히 현실을 담고 있었고 누구나 하나쯤 갖고 있을 가족 콤플렉스를 미화 없이 직설적으로 늘어 논 까닭일 것이다. 

가장들이 기가 죽어서 <바람난 가족>처럼 불량 가족이 되는 건 아닐 터. 결국은 서로가 완벽한 타인임을 인정하고 병한의 말처럼 ‘내 인생 내가 책임지는’ 어른으로 살아야 가족이 된다. 그리고 의미가 없는 낭만일지라도 결국은 사랑이 기본이고 답이다. 뒷머리를 멋쩍게 긁으며 쭈뼛대던 영작을 아웃시켰던 호정은 아마도 지금쯤 15살 아이를 키우며 기가 센 가장이 되어 즐거운 나의 집을 만들고 있을 것 같다.

연관영화 : 바람난 가족 (임상수 , 2003 )

연관영화인 : 임상수 일반 : 감독 1962 ~

연관영화인 : 봉태규 배우 198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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