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연재]국가는 어떤 몸이어야 하는가, <작전명 발키리> 정희진의 혼자서 본 영화 ⑧

by.정희진(여성학연구자) 2018-11-29조회 17,347
발키리 스틸
   
연설을 듣는 청중이나 지켜야 할 조국은 여자다. 열정적인 연설은 대중을 오르가슴에 이르게 한다. 정치란 창녀와 같아서 그녀를 사랑하게 되면 그녀가 너의 머리를 물것이다. - 아돌프 히틀러
  
철학은 인간 해방의 머리이며 프롤레타리아는 그 심장이다. - 루트비히 포이어바흐

  
『리바이어던Leviathan』과  <작전명 발키리Valkyrie>

브라이언 싱어가 서른 살에 <유주얼 서스펙트The usual suspects)>(1995) 를 들고나왔을 때 할리우드는 들썩거렸다. 지금은 이미 고전의 반열에 올랐지만 23년 전 이 영화의 파장은 대단했다. 나 역시 예외는 아니어서, 무슨 ‘석학’이 출현한 것 같았다. 이후 브라이언 싱어의 행보는 거침이 없었다. 

유주얼 서스펙트
<유주얼 서스펙트> 케빈 스페이시

그때 주인공인 케빈 스페이시가 어찌나 무서웠던지, 나는 며칠 동안 세상의 모든 컵을 의미심장하게 바라보는 버릇이 생길 정도였다(영화의 작은 소품이 사람을 그렇게 놀라게 하다니!). 이후 케빈 스페이시가 나온 <쉬핑 뉴스Shipping news>(2001) 같은 ‘힐링’ 영화를 많이 보았는데도 여전히 그는 내게 <유주얼 서스펙트> 속 모습으로 남았다. <유주얼 서스펙트>에서 그는 다른 영화에서 한 코믹한 연기조차 누군가의 뒤통수를 칠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최근 미투 가해자로 지목되기도 했지만, 어쨌든 그는 수많은 상을 탄 베테랑 연기자이다.  

젊은 나이에 그런 영화를 만든 브라이언 싱어의 <작전명 발키리>(2008)역시 야심작이다. 톰 크루즈는 말할 것도 없고 <블랙북Black book>(2006)의 캐리스 밴 허슨, 한국 영화 <택시운전사>(2017)의 토마스 크레취만도 반갑고, 케네스 브래너는 언제나처럼 멋지다. 

브라이언 싱어
브라이언 싱어
캐리스 밴 허슨
캐리스 밴 허슨
토마스 크레취만
토마스 크레취만
케네스 브래너
케네스 브래너

2차 대전 말기, 조국을 사랑하는 충성스러운 독일 장교 슈타우펜베르크 대령(톰 크루즈 분)은 히틀러 정권의 전쟁에 신물이 났다. 상부의 지시를 어기고 나치 정권을 비판하다가 아프리카 튀니지 전선으로 좌천된 그는 영국군의 폭격으로 왼쪽 눈, 오른손, 왼쪽 손가락 둘을 잃은 뒤 독일로 돌아온다. 그리고 1943년, 이미 여러 번 히틀러 암살 작전을 시도했던 일군의 장교들과 함께 ‘발키리 작전’을 역이용해 히틀러와 그의 측근을 제거하려 한다. ‘역모’ 실화를 기반으로 한 이 영화는 극적인 정치적 배경에 브라이언 싱어의 재능이 더해져, 두 시간 내내 관객의 심장을 ‘관할한다’.

하지만 영화 <작전명 발키리>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이 텍스트는 근대 국가를 설명하는 데 매우 적절한 교재이다. <작전명 발키리>는 토머스 홉스(1588~1679)의 『리바이어던』과 연동한다. 정확히 말한다면, 『리바이어던』과 <작전명 발키리>는 상호 충실한 해제이다.  
  
메타포로 국가를 만들다

고전의 정의 중의 하나로 “널리 회자되지만 읽은 사람은 별로 없는 책”이라는 말이 있다. 『리바이어던』도 대표적인 예이다. 나는 이 책을 읽은 이들이 생각보다 않지 않을 거라고 ‘확신한다’. 이 책이 인용되는 것만큼 사람들에게 읽혔다면, 절대 몸 이야기를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책을 언급하는 이들은 대개 ‘딴소리’를 한다. 조금 냉소적으로 말하자면, 비서구 국가 혹은 한국의 (남성) 지식인들 중에서 헤겔, 마키아벨리, 칸트, 홉스, 루소 등을 맥락 없이 ‘들먹이는’ 이들이 많은데, 나는 솔직히 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내가 이해한 방식과 너무 다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수염 난 백인 남성’의 지적 권위가 (유학을 다녀온) 비서구 남성 ‘엘리트’에게 ‘내부 통치용’(“그들의 사상을 나만 안다.”)으로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는 얘기다. 『리바이어던』의 경우, 사람들은 괴물에 대한 이야기에 집중한다. 

이 책의 분량은 생각보다 짧다. 가장 놀라운 점은 첫 페이지부터 끝까지 거의 단 한 줄도 빼놓지 않고 몸의 은유(body metaphor)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이다. 이 책의 ‘위대한 업적’은 상상의 공동체로서 국가를 실체(entity)로 만들었다는 데 있다. 

국가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국가는 관계와 제도로서 존재하는 것이지, 사람의 몸처럼 주권, 영토, 인구의 총체가 아니라는 이야기다. 국가 내 모든 영토는 평등하지 않다. 모든 국민도 평등하지 않다. 어디가 국가인가? 서울? 전라도 완도? 경상도 언양? 누가 국민인가? 여성? 장애인?…… 영토나 인구 개념은 상정된 것이지 실제가 아니다. 다만, 특정 지역이 국가로 대표될 뿐이다. 어떨 때는 서울이, 어떨 때는 독도가, 어떨 때는 한라산이……. 

주권은 어떠한가. 나는 식량 주권, 검역 주권에는 찬성하지만, 군사 주권에는 회의적이다. ‘국가의 영혼’이라는 주권은 하나가 아니다. 19세기 말 중국은 서구에 의해 완전히 약탈당했지만(영화 <북경의 55일>(1963)을 보라) 공식적으로는 주권을 빼앗기지 않았다. 관타나모? 지금 그곳은 미국의 군사 기지이지만, 쿠바의 영토다. 

『리바이어던』의 역사적 의미는 근대 국가의 개념적 기틀을 제시했다는 데 있다. 마르크스주의 인류학자인 베네딕트 앤더슨의 ‘상상의 공동체로서 민족’은 민족이 상상의 산물이라서 ‘없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인쇄술-표준어의 발달 따위가 국가를 탄생시킨 물적 토대라는 주장이다. 국가에 대한 유물론적 설명이다. 홉스 역시 유물론자였다. 그는 가부장제를 자연적인 산물로 보지 않고 사회적 구성물로 여겼다. 

‘없는 실체’를 ‘존재’로 만들려면 반드시 은유가 필요하다. 글의 서두에 인용한 것처럼, 몸에 대한 은유는 인류의 오랜 인식 방법이었다. 그리고 몸은 사회적 해석을 반영한다. 그래서 머리(정신)와 몸(수족)의 위계라든지, 여성에 대한 비하가 없다면 불가능한 수사가 많다. 서구 철학에서 흔히 말하는 ‘정체(政體, body politic)’는 공동체로서 조직을 유기체(하나의 몸)로서 조직으로 인지하는 데 결정적인 인식을 제공해 왔다. 사회 조직이 인간의 몸으로 비유되는 유기체일 때, 조직은 (지배-피지배) 관계/제도’가 아니라 실체로 간주된다. 권력은 도처에 있지만(is) 누군가가 가진(have) 것처럼 소유 관념으로 인식되어야, 통치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앞서 말한 대로, 오랜 역사 동안 인간은 만물의 척도였다. 몸은 모든 상징체계의 기본 도식을 제공해 왔고 서구 사상에서 정치 조직은 언제나 신체에 비유되어 왔다. 몸의 부분에 대한 의미 체계는 사회 규범을 표현하는 수단이었다. 사회 조직에서 개인의 위치를 표현하는 ‘우두머리’, ‘수족’, ‘오른팔’ 같은 표현은 신체 기관이 위계화되어 있음을 말해준다. 『리바이어던』첫 페이지는 이렇게 시작한다.

 자연 중에서도 가장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창작품이 ‘인간’인데 인체를 모방함으로써 창작품은 한결 더 고급품이 될 수 있다. 정치 공동체, 즉 ‘국가’는 바로 이런 솜씨에 의해 만들어졌는데…… 국가의 주권은 몸 전체에 생명과 동작을 주는 인공적 ‘혼’이며, 각부 장관이나 행정부·사법부의 관리는 인공적 ‘관절’이다. 보상이나 처벌은 ‘신경’…… 고문관(顧問官)들은 ‘기억’에 해당하며, 형법과 법은 ‘인공 이성’이며 ‘의지’이다. 조화는 건강이요, 반란은 병환이며 내란은 죽음이다. 끝으로 이 정치 공동체를 만드는 합의나 동의는 우주를 창조할 때 신이 말씀하신 “이제 사람을 창조하자.”라는 명령과 같다고 하겠다.

이처럼 『리바이어던』은 전편에 걸쳐 국가를 ‘건강한 비장애인 인간’의 신체에 비유한다. 

 “화폐는 국가의 혈액”, “식민지는 국가가 출산한 자녀”(제8장), “주권자에게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은 회충처럼 신체를 괴롭히는 자”, “피정복민은 종기”, “안일함은 기면증”, “폭동은 폐병”, “국가를 개혁하려고 불복종하는 사람들은 국가를 파괴하는 것, 이것은 마치 노쇠한 아버지의 회춘을 갈망하여 아버지의 몸을 절단하여 이상한 약초와 함께 끓였으나, 아버지를 젊은 사람으로 만들어내지 못한 펠레우스(Peleus)의 어리석은 딸들과 같은 것이다.”(제13장) 

이처럼 국가를 유기체인 인체에 비유하면 국가 권력에 대한 비판과 저항은 인체를 절단하는 행위와 다름없게 된다. 모든 국가의 외부는 무정부 상태라는 전쟁 중에 있으므로 언제 침입할지 모르는 외부의 적을 생각할 때, 국론을 분열시키는 것과 같은 힘의 공백을 노출하는 행위는 있을 수 없으며 국가는 어떤 일이 있어도 보존되어야 한다는 논리다.

정상 국가는 장애인의 몸으로 표상되어야 한다

국가주의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행정부는 국가보훈처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은 국가주의에도 도달하지 못한 사회다. 한국 사회는 특히 국가를 위해 헌신한 이들에게 존경이 없는 기회주의자들의 나라다. 여기서 내가 반민특위 사건을 들먹이며 흥분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한국 사회는 윤리적이지 않다. 윤리적인 국가는 보훈(報勳)에 충실해야 한다. 공동체를 위해 희생한 이들에게 복지를 제공하고 경의를 표하는 것은 공동체 유지와 후세대 교육을 위해 필수적이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정상 국가는 건강한 비장애인 남성의 몸으로 재현되지만, 실제 정상 국가는 외적과 투쟁을 거쳐 쟁취한 공동체이므로 부상당한 몸이 정상이어야 한다. 다시 말해, ‘상이용사(傷痍勇士)’나 장애인의 몸이 정상 국가를 상징해야 한다. 하지만 그런 국가는 거의 없다.

발키리 스틸

<작전명 발키리>의 주제는 반역이 탄로 날 듯한 아슬아슬한 장면에서 제시된다. 관객의 심장은 쿵쾅거린다. 그때 슈타우펜베르크 역의 톰 크루즈는 자신의 신체를 ‘전시’함으로써 위기를 모면한다. 한마디로 “당신들, 나처럼 조국을 위해 눈과 팔을 잃었나? 감히 내 앞에서 할 말이 있는가?” 체포 직전의 그는 자신의 훼손된 몸으로 히틀러 측을 압도한다. 

나는 이 장면에서 감동받았다. 나는 이런 상황이 가능한 사회를 꿈꾼다. 전통적인 국제정치학에서는 전쟁 없는 상태를 ‘현상 유지(the status quo)’라고 표현하는데, 부정적/비정상적인 의미로 쓰인다. 국가는 계속 전쟁 상태에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정의로운 정체(政體, body politic)는 토머스 홉스의 『리바이어던』에 묘사된 비장애인의 몸이 아니라 부상당한 장애인의 몸이어야 한다. 지난번 이 지면에서 다룬 영화 <설국열차>(2013)에서 언급한 리더의 조건 중에, 다친 몸이 아닌 자는 지도자가 될 수 없다는 내용도 같은 맥락이다.

한편 이 영화를 통해 독일은 또 한 번 뿌듯(?)했을지 모른다. 독일과 일본은 2차 대전의 전후 책임 문제를 두고 극단적 비교 대상이 되곤 한다. 하지만 이는 생각보다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이 글에서 다룰 사안도 아니다). 독일도 ‘군 위안부’나 전시 성폭력 문제에 대해서는 가해/피해 사안 모두 언급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 톰 크루즈의 아내 역으로 나오는 네덜란드 배우 카리서 판 하우턴이 열연을 펼친 폴 버호벤 감독의 <블랙북>은 2차 대전 후 연합군 국가들이 ‘적국의 남자와 섹스한 자국 여성’들을 어떻게 대하는지 잘 보여준다. 

슈타우펜베르크의 존재는 독일의 자부심이다. 그의 이름을 딴 거리도 있다. 나치 정권은 대중의 협력 없이 불가능했고 빌헬름 라이히는 『파시즘의 대중 심리』를 통해 해석을 시도했지만, 어쨌든 히틀러에게 직접적으로 저항한 독일인이 있었다는 것을 역사적으로 상기하는 일은 대단히 중요하다. 일제의 식민 지배에 사과하는 일본인, 베트남전에서 한국군이 벌인 만행에 문제 제기를 멈추지 않는 한국인, 나치에 항거한 독일인……. 자국의 범죄에 대해 사과와 반성을 멈추지 않는 사람들. 인류가 국민이기 전에 인간인 이유다. 물론 최근 한국 사회의 일부 좌파와 페미니스트가 ‘난민 반대’를 주장하기도 했지만.

발키리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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