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연재]말할 곳이 없어서 외로울 때, <피고인>과 <화양연화> 정희진의 혼자서 본 영화 ⑦

by.정희진(여성학연구자) 2018-11-09조회 6,763
피고인 스틸

나는 인간이며, 그것만으로도 비참하기에 충분하다 - 메난드로스

말할 곳을 찾다

인간이기에 그것만으로도 비참하다, 기원전 4세기 아테네의 극작가 메난드로스의 말이다. 기원전부터 인생이 이랬으니, 우리는 안심해도 될지 모른다. 현대는? 미국의 ‘흑인’ 사회학자, 시카고학파의 프랭클린 프래지어(Franklin Frazier)는 이렇게 말했다. “(미국 문화 속에서) 살 만한 동기를 찾든지 죽든지.” 일단, 태어났다면 힘들다. 기본적으로 본인의 생로병사가 있고, 사랑하는 이들의 생로병사를 겪어내야 한다. 게다가 불평등, 부조리, 악의 승리, 차별, 미세 먼지, 양진호 같은 사람들……. 

이제는 오래된 뉴스가 되었지만 브래드 피트가 제니퍼 애니스턴과 헤어지고 안젤리나 졸리와 ‘시끄러운’ 연애 중일 때였다. 그즈음 유명 잡지(<배니티 페어>라고 기억한다)가 애니스턴을 표지 모델로 실었다. 커버스토리의 제목은 “제가 외롭냐고요? 그래요! (Am I lonely? Yes!)” 그래, 나 당신들 생각처럼 외롭다, 그래서 어쩔래? 그런 말투 같았고, 나는 대중 매체가 잔인하다고 느꼈다. 누구나 슬퍼할 상황에다, 유명 여배우만이 겪는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그때 그녀는 누구에게 고민을 말했을까?

인생에는, 배타적인 연인 관계가 아니더라도 사회로부터 혹은 구체적인 누군가에게 따돌림당하고 망신스러운 기분, 어딘가에 하소연하기에도 자존심 상하는 인간관계, 견뎌야만 하는 시간이 있는 법이다. 실연, 상실, 시련……. 이러한 상황이 아주 심할 때는 영화도 책도 음악도 잡히지 않는다. 오로지 이불 속이 우주다. 우울과는 다른 고립감(powerless)이 나를 휘감는다. 

누구라도 손을 내밀어주었으면……. 내가 먼저 전화하기는 엄두가 안 나고 스팸 전화라도 왔으면 싶다. 남들 퇴근 시간 즈음에야 직장 생활을 하는 지인에게 “오늘 만날 수 있어(요)?”, 혹은 심야에 “지금 통화할 수 있어(요)?” 이렇게 전화할 수 있는 친구가 있는가? 충분한 경청과 공감, 위로, 대안 제시까지 가능한 사람이 있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지만 단언컨대, 세상에 이런 친구는 없다. 상담자도 없다. 있더라도 찾기 힘들다. 비용과 시간이 들고, 비밀 유지 걱정 등 다른 대가를 치러야 한다. 

아, SNS가 있다. 트위터를 공개하지 않고 일기장으로 삼는 이들도 있다. 좋은 기능이다. 나는 간혹 내 메일 주소로 일기를 보낸다. 실은, 그냥 끄적거리다 만다. 커서는 깜박이며 재촉하지만, 왠지 모니터 앞에서는 구체적으로 쓰기가 쉽지 않다. 페이스북에서 맺을 수 있는 친구가 최대 5천 명이라고 알고 있다. 온라인에서 5천 명을 ‘달성한’ 이들도 있지만, 지구상에서 진짜 친구가 5천 명인 사람은 없다. 인생에서 모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친구가 셋만 있어도 성공이라는 말이 있는데, 내 생각에는, 한 명도 힘들다고 본다.   

이야기를 들어줄 가장 좋은 대상

간혹 자신을 나의 “독자”라고 소개하는, 모르는 사람의 편지를 받는다. 내게 E메일을 하는 사람들의 글은 대개 이렇게 시작한다. “지금 제가 힘든 상황입니다. 어디 말할 곳이 없어서 선생님께 씁니다. 양해를 바랍니다.” 그들은 쓰고 나는 읽는다. 그리고 나는 그들과 그들의 사연을 잊는다. 편지가 오고 가거나 ‘현실에서’ 만나는 일은 없다. 나, 아니 나의 아이디는 익명의 수신처일 뿐이다. 

타인에게 말하는 행위는 자기 마음의 가시를 돌보는 일과 비슷하다. 어떤 종류의 침묵은 마음속의 가시와 같아서 같이 살 수 없다. 가시가 움직일 때마다 몸을 찌른다. 말하기(speech)를 수치스럽게 생각하거나 억압하는 문화에서는 자살률이 높다.  ‘표현의 자유’가 표현의 폭력이 된 시대지만, 여전히 말하기는 중요하다. 주디스 버틀러는 우리 시대의 문제, 혐오 발화(ex/citable speech)를 일종의 주인 없는 퍼포먼스라고 본다. 혐오 발화는 말하기(citing)를 초과하고, 남용하고, 선을 넘어선(ex/citable) 상황이다. 말하고 싶은 심정이 간절할 때는 말의 초과는커녕, 하고 싶은 말의 용량에 미치지 못한다. 혐오 발화는 그렇지 않다. 넘친다. 차별주의자들은 그 상황을 즐긴다. 

피고인 스틸

“아무에게도 말할 수가 없(었)다” 흔히 듣는 말이다. 고전 <피고인(The accused)>(조나단 카프란, 1988)은 지금 봐도 ‘교과서’다. 작품 자체로도, 성폭력 사건을 다루는 방식과 시각에 있어서도. 조디 포스터. 조디 포스터. 조디 포스터와 페미니즘…… ‘나의 영웅 조디’(라는 다큐멘터리 영화가 있다). 그때는 몰랐다. 나는 20대 초반, 더러운 동시 상영 극장에서 이 영화를 보았다(심지어 쥐가 돌아다녔다). 극장 간판은 선정적이었다. 시간 때우는 ‘싸구려 영화’인 줄 알았다. 조디 포스터가 ‘밑바닥 인생’을 사는 윤간(gang rape) 피해 여성으로, <탑 건(Top gun)>(토니 스콧, 1986)의 캘리 맥길리스가 그를 돕는 변호사로 나온다.  

작품 속 ‘조디’는 가난한 여성의 전형이다. 일찍 가출하여 거리를 전전한다. 술, 마약, 섹스, 길거리의 폭력을 감수하며 하루하루를 사는 그녀는, 성폭력 피해 여성이 겪는 고통과 편견을 고스란히 뒤집어쓴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내게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젠더, 성폭력 이런 이슈들이 아니라 그녀의 외로움과 통화 장면이었다. 그녀 자신도 당하고서야 깨달은 이 상황. 자신도 정리가 안 되고 이해할 수 없고 분노로 미칠 것 같다. 누가 지금 자기 처지를 알아줄 것인가. 

영화에서 주인공이 엄마나 지인, 가족에게 오랜만에 전화를 걸어 짧은 대화를 나누거나 울먹거리며 바로 끊는 장면이 종종 등장한다. 마음 둘 곳 없는 ‘우리의 조디’도 커튼이 드리워진 어두운 방에서 오래전에 떠나온 엄마에게 전화를 건다. 엄마의 삶도 고달플 것이다. 미국 대륙 내 시간 차, 그리고 갑작스런 딸의 전화에 엄마는 “웬일이니”, “잘 지내니” 외에는 할 말이 없다. 조디는 눈물을 훔치며, “아니, 별일 아냐, 엄마 사랑해.” 정도의 대화를 나누고 끊는다. 

피고인 스틸

자신의 상황을 설명할 기력도 없고, 말해봤자 엄마는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두 모녀를 합친 몸만큼 상처도 두 배로 커질 것이다. 이럴 때는 자기 말을 못 알아듣거나 그냥 아는 정도의 사람에게 전화를 해야 한다. 무심한 사람, 무심한 관계가 낫다. 어차피 인생에 해결은 없으므로. 그저 들어주며, 나를 판단하지 않고, 내 걱정을 하지 않을 사람. 내 이야기를 듣고 아무 말도 안 하는 사람. 내 말을 잊어버릴 사람. 

내가 가장 원하는 경청자는 내 이야기를 못 알아듣는 사람이다. 정리하면, 듣는 이에는 두 종류가 있다. 공감과 수용이 가능한 적극적 청자(active listener), 더 나아가 치유(talking cure)가 가능한 소위 ‘전문가’들이다. 하지만 앞서 말한 대로, 대가가 따르고 찾기가 어렵다. ‘전문가’들과 비슷한 범주에서 안전한 사람들이 있다. 이해력과 인간애가 깊은 친구나 멘토 등이 그들이다. 그러나 매번 이들에게 도움을 청하기도 민망하고, 아는 사이이기 때문에 빚을 진 느낌을 떨치기 힘들다. 아는 사이라면 여전히 비밀도 걱정되고, 완전하게 안전한 관계란 없기 때문에 상대방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그래서 사람들은 기도를 한다. 기도는 내가 나에게 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종교가 그것이다. 기도가 그것이다. “주님은 내 안에.” “부처님은 온 천지에.”   

벽에게 말하자

내 안의 무엇인가를 - 주로 괴로움 - 꺼내 놓으면, 짐이 덜어지고 상황도 객관화되고 안정이 된다. 쓰기도 마찬가지다. 고민, 고통, 외로움, 스트레스 같은 일일수록, 말을 하는 것은 도움이 된다. ‘부정적’ 감정이 나쁜 것이 아니다. 괴로움은 삶의 조건이다. 문제는 그것을 제대로 표출하지 못할 상황이고, 언제나 고민은 누구에게 말할까이다.

소통의 소중함이라느니, 대화를 통한 해법, 털어놓으라……. 나는 이런 말을 신뢰하지 않는 편이다. 어쨌든 아예 모르는 이에게 그리고 말이 전혀 통하지 않는 이에게 말할 때가 상호 도움이 되는 경우가 많다. 반응이 없는 것이 좋다. 나는 이 ‘반응 없음’이 훨씬 관계를 좋게 만든다고 생각하고, 실제로 자주 경험한다. 

나는 엄마와 아빠의 ‘두 사람의 딸’이지만, 엄마와는 ‘여성으로서’ 관계였고 아빠는 그냥 ‘아는 사람’이었다. 엄마는 나와 겹치는 젠더 문제에다 개인적으로 극히 예민하신 분이고, 아빠는 그 반대다. 그래서 나는 아빠에게 전화하는 것이 편했다. 아빠는 내가 아무리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충격적인 이야기를 해도 “그러냐.” 한 마디뿐이셨다. 그러고 나서 오로지 당신 일상, 당신 주장만 하셨다. 나는 아빠의 무반응과 철저한 이기주의가 좋았다. 아빠랑 통화하면, 내가 ‘문제’가 아니라 아빠가 문제라는 생각이 들어서 위로받았다.

가족? 절친? 파트너? 그들은 나를 잘 아는 사람인가? 의외로, 대부분 그렇지 않다. 우리는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에게 ‘벽창호’니 ‘벽하고 이야기하는 게 낫다’고 말하지만, 정말 벽에게 말하는 것은 효과가 있다. 말이 통하지 않는 것도 축복이다. 말이 통하면 나중에 상대방에게 “내가 너 때문에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라는 공치사나 직접적으로는 아니더라도 “넌, 아직도...? 지겹다”는 핀잔을 들을 가능성이 많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 나는 ‘걱정거리’인 인간이 된다. 나는 매일 고민이 있을 뿐이지, 트러블 메이커가 아니란 말이다!

조디 포스터가 <피고인>에서 엄마에게 전화할 때의 심정. 우리는 이해할 수 있다. 인생의 곤경에서 고립되어 있을 때, 타인과 연결 자체만으로 상황이 ‘정리된다’. 전화를 끊고, 세수를 하고, 마음을 다잡아본다. 

화양연화 스틸
화양연화

왕가위의 <화양연화(花樣年華)>(왕가위, 2000). 쓸 자신이 없다. 포기. 다만 <피고인>과 <화양연화>는 무관한 영화처럼 보이지만, 결정적인 공통점이 있다. 두 영화에서 주인공이 말하는 방식과 상대는 영화의 주제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인생의 고통, 고독, 고립, 말할 수 없음, 어쩔 수 없음……. 내 생각에 <화양연화>의 주제는, 인생의 본질인, ‘어쩔 수 없음’이다. 두 사람, 어쩌겠는가. 

<피고인>에서 조디 포스터는 타인과 다름없는 엄마에게, <화양연화>에서 양조위는  벽에 대고 말한다. 민폐도 없고, 누구에게도 부담 주지 않으면서 말하기의 목적을 달성한다. 앙코르와트에서. ‘들어 달라’가 아니라 ‘나는 말했다’가 중요하다. 

할 수 있는 이야기보다 할 수 없는 이야기가 훨씬 많다. ‘국가 안보’ 문제여서 말하지 못하는 코미디 영화가 얼마나 많은가. “말하자면 복잡한” 이야기(미국 영화 대사 중에 가장 많이 나오는 말 중 하나가 “complicate”다), 말하면 안 되는 나의 불법 행위……. 진실에 목을 매는 상대방이 알면 안 되는 진실이 얼마나 많은가. 이때는 이야기를 못 알아듣는 상대가 가장 좋다. 아는 사람보다 벽에 대고 말하는 것이 낫다. 타인을 찾기보다 나에게 먼저 말하는 것이다. 

사족이지만, 두 작품의 공통점이 또 있다. 모든 영화 감상은 자의적이고, 보는 이의 상황에 따라 감동도 크게 다르다. 둘 다 외롭고 아플 때 보면, 더 많이 보이는 영화다. 작품과 ‘비슷한 경험이 있다면 더욱 좋다’. 난 동일시했다. <피고인>, <화양연화>를 보고 나는 머리가 흔들리도록 울었다. 인생에는 ‘안 되는 일’이 천지다. (어떤 말은) 말해서 무엇하리. 지금 나는 말할 사람을 찾기 전에 숨을 고르고 글을 쓰거나 청소를 한다. 
 
피고인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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