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연재]메가폰을 든 스타 최은희 아름다운 생존: 한국여성영화감독 ③

by.공영민(영화사연구자) 2018-11-07조회 3,959
최은희 스틸

배우 최은희의 이력은 설명이 필요 없을 만큼 화려하다. 1943년 연극무대로 데뷔한 최은희는 1947년 <새로운 맹서>(신경균)로 스크린에 데뷔한 후 1950~1960년대 한국영화를 대표하는 부동의 ‘스타’였다. 따라서 박남옥, 홍은원에 이은 한국영화사상 세 번째 여성감독이라는 칭호는 배우 최은희의 화려한 명성을 장식하는 ‘특별한 이력’으로 소개되는 경우가 많았다. 첫 번째도 두 번째도 아닌 세 번째라는 위치도 그러하거니와 홍은원 감독의 표현처럼 “「신필름」이라는 대 메이커에다 손발이 척척 맞는 스탶들을 거느리고 진행을 했”고 박남옥 감독이나 홍은원 감독의 “고통 같은 것은 느낄 필요도 없이 여유만만하게 작품을 탄생시켰”1) 기에 최은희의 감독 이력은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했다. 감독 데뷔 당시에도 하락하는 인기를 만회하기 위한 ‘선전효과’로 크레디트에 이름만 올린 것이라는 세간의 의심과 비판이 따라붙기도 했다. 이러한 시선에 대해 최은희는 ‘인기의 하락’과는 선을 긋되 자의보다는 신상옥 감독의 꾸준한 권유로 연출을 결심했다고 밝혔다. 연출 배경에 대해 줄곧 소극적인 태도를 취했지만 때로는 연기자로서 새로운 공부를 하기 위해 결심했다는 동기를 부연하기도 했다. 이러한 배경 때문에 데뷔작인 <민며느리>(1965)를 시작으로 <공주님의 짝사랑>(1967), <총각선생>(1972)까지 ‘감독 최은희’보다는 ‘스타 최은희의 감독작’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녔다. 이에 대해 최은희 자신은 활동 당시 특별한 감독의 변을 내놓지 않았다. 시간이 한참 흐른 후 회고에서도 ‘신상옥 감독의 권유’가 가장 큰 동기였다고 재차 밝혔다.2)

“메가폰을 든 스타 최은희”3)에 대한 시선과 평가는 최은희 개인보다는 ‘1960년대 중반 한국영화계의 상황과 신필름 그리고 스타 최은희의 이미지’라는 큰 틀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 속에서 감독 최은희는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일까? 공교롭게도 감독 최은희는 신필름의 위기와 변화 국면마다 등장했다. <민며느리>가 발표된 1965년 한국영화계는 200여 편에 가까운 제작편수, 청춘멜로드라마‧스릴러액션‧만주활극액션 등 다양한 장르 영화들의 인기, 새로운 스타들의 등장으로 호황을 누리는 것처럼 보였지만 생필름의 부족, 컬러영화와 와이드스크린의 도입 그리고 물가 상승에 따른 제작비 증가로 영화산업 내부에서는 위기가 고조되고 있었다. 또한 배급‧상영 환경에 비해 과잉 생산되는 제작편수로 한국영화 내부의 경쟁은 더욱 더 치열해진데다 <007> 등 스파이 물을 중심으로 한 외국영화와의 경쟁력에서도 뒤처지는 형편이었다. <성춘향>(신상옥, 1961) 이후 승승장구하던 ‘대 메이커’ 신필름 조차 부채로 위기에 처한 것이 바로 1960년대 중반 한국영화계의 상황이었다. 신필름은 경영 위기에 처하자 홍콩과의 합작영화 제작, 문예영화 제작, 인기 드라마의 영화화 등으로 새로운 활로를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때 흥행을 위한 홍보 아이디어로 떠오른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최은희의 감독 데뷔였다. 

최은희

‘스타 최은희의 감독 데뷔’는 신필름의 시스템 하에서 안전한 방향으로 기획되었다. 신필름은 최은희의 스타 이미지를 활용할 수 있는 사극 장르 중에서 인기리에 방영된 이서구 원작의 TV 연속극 <민며느리>를 데뷔작으로 선택했다. 순종적인 성품의 민며느리가 온갖 고초를 이겨내고 꼬마 신랑과 해피 엔딩을 맞이하는 이야기는 전작인 <벙어리 삼룡>(신상옥, 1964)으로 흥행과 비평에서 성공을 거둔 최은희의 고전적인 이미지를 이어갈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민며느리>는 ‘인기 드라마를 영화화해 추석에 개봉하는 최은희 감독‧주연의 신파 사극’의 모습을 갖추고 ‘최은희의 감독 데뷔’에 홍보 포커스를 맞췄다. 원작의 이름값과 신필름이라는  브랜드를 생각한다면 영화의 제작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다. 인기 드라마 원작과 감독 최은희에 중심을 두는 대신 주‧조연 배우진은 상대역인 아역 장원배 외에 황정순, 한은진, 박노식, 김희갑, 서영춘으로 최소화하고 단역배우들은 신필름 연기실의 연구생들을 동원해 제작규모를 줄였다. 결과적으로 톱스타 최은희의 감독 데뷔는 큰 화제가 되어 <민며느리>는 1965년 추석 대목 프로 12편(한국영화 6편, 외국영화 6편) 중 한 자리를 당당히 차지했다. 기대한 ‘선전 효과’는 그리 크지 않아 흥행에서는 평균 수준인 5만 여명을 동원하며 현상 유지에 만족해야 했다. 하지만 최은희의 감독 데뷔는 간판스타 최은희의 건재를 알리는 동시에 새로운 기획에 도전하는 신필름이라는 이미지를 얻을 수 있었다.

단 한 번의 외유로 끝날 줄 알았던 최은희의 감독 이력은 1967년 <공주님의 짝사랑>으로 이어졌다. 두 번째 연출작 역시 신필름이 직면한 새로운 위기 상황에서 등장했다는 것이 의미심장했다. 신필름은 1966년 안양촬영소를 인수하며 명실상부한 메이저 스튜디오의 모습을 갖췄지만 무리한 확장으로 다시 한 번 심각한 경영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거대한 스튜디오의 운영과 영화법에 따른 제작쿼터 달성은 메이저 영화사인 신필름에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신필름이 제작 편수를 늘리기 위해 설립한 자회사인 안양필름이 <공주님의 짝사랑>의 제작을 맡았다. 신필름은 새롭게 출발한 촬영소와 영화사 그리고 신필름 연기실이라는 시스템 속에서 <공주님의 짝사랑>을 제작하며 다시 한 번 ‘감독 최은희’라는 브랜드를 활용했다. 따라서 <공주님의 짝사랑>은 <민며느리>에 이어 ‘신필름의 건재와 새로운 출발’을 홍보하기 위해 기획된 작품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최은희 현장사진
민며느리 촬영 중인 최은희 감독

<공주님의 짝사랑> 역시 사극 영화였지만 데뷔작인 <민며느리>와는 차별화된 지점을 보여주었다. 제목 그대로 짝사랑에 빠진 공주님이 적극적으로 사랑을 쟁취하는 과정을 소동극으로  <공주님의 짝사랑>은 온전히 스타 최은희의 브랜드에 기대었던 <민며느리>와는 사뭇 다른 방향으로 기획되었다. 첫 번째는 선택과 집중을 들 수 있다. 신필름은 사극 장르 안에서 신파보다는 로맨틱코미디를 채택하고 주연배우에도 떠오르는 스타였던 남정임을 캐스팅해 보다 젊은 관객을 흥행 타깃으로 삼았다. 최은희는 배우의 역할을 과감하게 포기하고 감독의 역할만 맡았다. 두 번째 변화는 제작규모에 있었다. 궁중사극이라는 배경을 활용한 다양한 로케이션과 스튜디오 촬영, 화려한 의상과 소품, 신필름 연기실 연구생들을 활용한 군중 신 등에서 <민며느리>에 비해 눈에 띄게 커진 스케일이 드러났다. <공주님의 짝사랑>과 <민며느리>를 비교하면 2년 사이 규모가 성장한 신필름의 제작 시스템을 엿볼 수 있었다. 특히 화려한 의상과 소품이 돋보이는 다양한 군중 신들에서는 한홍 합작영화 <달기>(최인현‧악풍, 1964)와 <대폭군>(임원식, 1966)의 한국 촬영을 계기로 대형 사극영화의 제작 노하우가 쌓였다는 것을 증명했다.  
 
영화의 규모와는 별개로 <공주님의 짝사랑>의 홍보는 여전히 ‘스타 최은희’에 포커스를 맞췄다. 하지만 <민며느리>가 감독 못지않게 주연배우인 최은희를 강조한 것과는 달리 <공주님의 짝사랑>은 주연을 맡은 신예 남정임, 김광수와 발랄하고 이색적인 러브 스토리를 강조하며 젊은 관객에게 어필했다. 대신 최은희라는 브랜드는 ‘제2회 작품’을 발표한 전문 감독으로 자리했다. ‘감독 최은희’는 남정임 외에도 한은진, 조미령, 전계현, 강미애 등의 스타진과 함께 이 영화를 ‘여성영화’로 홍보하는 데 중심 역할을 했다. 신필름은 개봉 전 ‘여류인사 초청 시사회’4)를 개최해 <공주님의 짝사랑>이 여성 감독과 여성 배우 중심으로 제작된 영화라는 것을 강조했다. 결과적으로 흥행에서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스타 최은희의 브랜드를 유지하는 동시에 젊고 새로운 이미지를 내세워 관객층을 확산하려던 신필름의 기획은 어느 정도 성공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총각선생 촬영중
총각선생 촬영 중인 최은희 감독

신필름이 내리막길에 있던 1972년 최은희는 세 번째 작품 <총각선생>을 연출했다. 신일룡, 나오미가 주연한 이 영화는 최은희가 감독한 첫 번째 현대물이었으며, 제작도 신필름이 아닌 새한필름이 맡았다. 그럼에도 여전히 홍보는 ‘스타 최은희의 제3회 감독작’에 맞춰졌다. 한 가지 덧붙여진 점이 있다면 앞 선 두 편의 영화에서 신필름 연기실의 연구생들을 동원했던 것처럼 <총각선생> 역시 최은희가 교장으로 재임하고 있던 안양영화예술고등학교의 학생들을 총출연시키며 감독 최은희 뿐만이 아니라 연기를 지도하는 ‘교육자 최은희’의 이미지를 강조했다는 것이다. <총각선생>은 2만 여명을 동원하며 흥행에 실패했다. 최은희와 신상옥의 관계가 파국을 맞고, 그들의 납북사건이 일어나며 남한에서 최은희의 감독 이력은 끝을 맺었다. 그리고 1984년 북한에서 발표한 <약속>까지, 최은희의 감독작은 총 4편으로 마무리되었다.

감독 최은희라는 브랜드가 비록 신필름이라는 시스템과 기획에서 탄생되었고, 최은희 자신조차 연출 배경에 대해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긴 했지만 제작 상황과 작품의 캐릭터를 통해서 최은희 개인의 욕망을 엿볼 수 있다. 감독 데뷔를 앞둔 당시 최은희는 배우로서 여러 가지 편견과 한계에 직면해 있었다. ‘선전효과, 내리막길에 들어선 인기, 나이’ 등이 ‘감독 전향’의 이유로 제기되었다. <맨발의 청춘>(김기덕, 1964)으로 시작된 청춘영화의 붐과 고은아, 남정임, 문희 등 대형급 신인 배우들의 등장은 한국영화의 세대교체를 알리는 신호들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배우 최은희의 입지는 점점 줄어들고 있는 것이 사실이었다. 새롭게 대두된 젊은 관객들에게 최은희는 여전히 ‘성춘향’을 상징하는 대 배우였을지는 몰라도 유행을 주도하는 청춘스타는 아니었다. 신필름에도 최은희라는 스타 브랜드가 장점이 되기도 했지만 대중에게 고착된 지고지순한 여인상으로서 최은희의 이미지는 단점이 되기도 했다. 최은희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신에게 주어지는 역할의 한계 때문에 연기의 깊이와 폭을 넓힐 수 없다며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그녀는 “천편일률적으로 남편에 순종하고 어떠한 고생도 감수하는 주체성이 없는 단순한 도덕적인 여인”을 벗어나 “극한 상황에 처한 적나라한 여성의 역할”5)을 꿈꿨다. 

이러한 상황에서 주어진 감독이라는 길은 어쩌면 연기에 대한 갈망을 풀어낼 수 있는 새로운 기회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따라서 영화를 통해 적극적인 여성의 모습을 보여주려는 배우이자 감독 최은희의 욕망을 읽을 수 있다. <민며느리>의 경우 비록 순종적인 민며느리라는 캐릭터의 한계가 있지만 세밀한 설정과 연기를 통해 마냥 수동적이지만은 않은 역할을 만들어냈다. 황정순과 한은진의 캐릭터에도 적극적인 여성상을 녹여냄으로써 신파영화의 어머니상에 변주를 주었다. <공주님의 짝사랑>의 경우 궁중법도에서 벗어나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개척하려고 하는 주인공의 모습은 어쩌면 배우 최은희가 꿈꾸던 또 다른 자아를 표출한 것일지도 모른다. 남성과의 대등한 관계를 위해 스스로 공주의 자리를 내려놓는 영화의 결말은 “픽션의 세계인 영화에서”나마 최은희가 보여주고 싶어 했던 “주체성 있는 적극적인 여성”6)을 구현해냈다는 데 의미가 있을 것이다.    

1)  홍은원, 「한국의 여류영화감독들-한국은 여류영화감독의 선진국」, 『영화』, 1981년 1월호, 영화진흥공사.
2) 「중앙대학교 첨단영상대학원 강의」, 2000년 3월 24일.
3)「메가폰을 든 최은희」, 『주부생활』, 1965년 10월호, 학원사.
4) 『경향신문』 , 1967년 7월 19일자 5면.
5) 「나의 순정파 연기는 모든 여인상의 모태」, 『주부생활』, 1966년 1월호, 학원사.
6)  위의 글.

최은희
모스크바영화제 여우주연상 수상 당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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