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을 차리자! 생각을 하자! <비밀은 없다> 정희진의 혼자서 본 영화④

by.정희진(여성학연구자) 2018-09-27조회 11307
비밀은없다 손예진

수 세기 동안 여성은 남성 사회가 켠 가스등 때문에 자신의 경험과 직관을 부정당해왔다. ‘미친 여자’는 오로지 남성의 경험에 의해 판정되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이 바로 우리 자신에게 미스터리였다니! 이제 우리는 스스로를 보살필 의무가 있다. 여성의 인식과 자신감을 믿자, 서로에게 가스등을 켜지 말자.
- 애드리언 리치


<비밀은 없다>와 <미쓰 홍당무>

어느 맞벌이 부부의 이야기다. 대개 그렇듯 아내‘만’ 바쁘다. 아침 일찍 일어나 식사 준비 중이다. 기지개를 켜며 남편이 다가와 묻는다. “내 여권 못 봤어? 12시 비행긴데, 큰일이네”. 

이 경우, 아내의 ‘바람직한’ 반응은 무엇일까. “(쿨하게) 그걸 왜 나한테 물어?”여야 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격하게) 아니, 그걸 지금 말하면 어떡해? 어젯밤에 말했어야지! (그랬으면 내가 찾아놨지……)” 남편은 화를 냈다. “너는 찾아주지도 않을 거면서, 왜 소리부터 지르냐. 맨날 이런 식이라니까.” 억울한 아내는 더 크게 소리를 질렀다. 

남녀 불문, 자기 물건은 자기가 간수해야 하고 더구나 시간을 다투는 일이라면 더욱 그렇다. 그런데 남자는 자기 여권 찾는 일이 아내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아내 역시 남성의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그걸 왜 나한테?”가 아니라 “왜 이제야!”라고 안타까워한다. 결국, 모든 잘못 - 여권 안 챙김 + 그걸 아내에게 물음 - 은 남편이 했는데도, 아내는 ‘소리만 지르는’ 부부 갈등의 원인 제공자가 되었다. 

비밀은 없다의 손예진

명절을 앞두고 내 친구가 계속 문자를 보낸다. 다급하고 불안한 말투에다 자기 분열적인 내용이다. 친구는 소위 전문직에 종사한다. 이번 연휴에 진급과 관련한 논문을 써야 하는데, 시댁에 가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린다. 시댁에 안 가는 대신 백만 원을 보냈단다. 시집에서는 별말이 없다. 남편의 직업은 사회운동가이지만 수입은 없다. 친구가 생계를 책임지고 있는데도, 자기 본업에 집중을 못 하고 있다. 동시에 집중을 못하는 상황에 대해 분노가 치미니까 시집과 남편 욕을 하다가, 사회를 비난하다가, 자책하다가 결국은 매번 “내가 정신을 차려야지.”로 문자를 마친다. 남성 생계 부양자라면, 명절에 ‘처가집’ 방문으로 이토록 스트레스를 받았을까?

위의 사례들은 성 역할 규범(norm)이 어떻게 가해자와 피해자를 바꾸는지를 잘 보여준다. (결혼한) 여성으로 산다는 것은 이렇게 복잡하다. 언제나 정신을 차리고 생각을 해야 한다. 생각이 없어서가 아니라, 생각을 너무 많이 해야 하기 때문에 ‘생각을 해야 한다’. 여성을 위한 언어가 없는 세상에서는 ‘바로 그 자리’에서 언어를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세상에 잘 적응하지 못한다. 내가 경험한 것과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사회와 주변 사람들과 충돌하는 일이 잦다. 평소 나 자신에게 가장 자주 하는 말은 “정신 차리자.”, “정신을 차리자.”, “정신 줄을 놓으면 안 돼.”, “가만, 생각을 하자.” 나는 거의 매일, 이렇게 중얼거리고 다짐을 거듭한다. 객관적으로 그럴 만한 상황인가. 아니면 내가 예민한 건가? 핵심은 그게 아니다. 이런 말이 ‘저절로’ 나온다는 사실이다. 나는 사회가 틀렸다고 생각한다. 부정의하다고 생각한다. 약자에게 가혹하다고 생각한다. 당하지 않고 살려면, 혹은 당한 이유라도 알려면 ‘정신을 차려야’ 한다.   

이경미 감독의 <비밀은 없다>에서 국회의원 출마에 나선 엘리트 정치인의 아내로 나오는 연홍(손예진 분)은, 선거 운동 와중에 딸이 실종되는 사건을 겪는다.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는 상황. 혼란과 분노…… 사건의 실체에 다가갈수록 믿을 수 없는 진실이 드러난다. 그녀는 운전대를 잡고 “정신을 차리자”를 반복한다. 정신을 차리고(?) 다시 생각한다. 그 장면을 보면서 나는 운다. 이 영화,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미쓰 홍당무(Crush And Blush)>(2008년) 가 나왔을 때, 한국 영화에서 드문 여성 캐릭터의 등장에 찬사가 쏟아졌다. <비밀은 없다(The Truth Beneath)>(2015년)의 손예진과 <미쓰 홍당무>의 공효진은 같은 캐릭터다. 

미쓰홍당무의 굥효진과 서우
미쓰 홍당무

“우리 엄마는 아무것도 모르니 내가 보호해주어야 한다.”는 극 중 손예진의 중학생 딸의 대사처럼, 두 영화의 주인공은 남성성의 원리로 돌아가는 세상 물정을 모른다. 다만, 연홍은 나름 든든한 남편을 둔 기혼여성으로 김밥을 맛있게 만드는 전업주부이고, ‘미쓰 홍당무’는 미혼에 새벽부터 영어학원에서 다니는, 세상사에 열심인 현직 교사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남성 사회, 젠더 법칙, 출세, 인간관계 원리, 진짜 돈 버는 방법 등등 공적 영역이 작동하는 원리를 모른다. 

두 여성 모두 나이브하면서도, 주변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며, 자기 주변 상황이 복잡해지는 것이 싫다. 한편으로는 주변을 돌보는 착한 여성들이다. 자기중심적이기도 한데, 이기적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자기 정돈과 자기 단속에 바빠서 다른 데 신경 쓸 여유가 없다. 간혹 자신이 소외되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 약간의 신경증과 불안 증세가 나타난다. 어쩌면 이 여성들의 신경증 정도에 따라 영화의 장르가 달라질지 모른다. 안면 홍조증인 여자가 신경질을 내면서 거리를 돌아다니면 코미디가 될 것이요, 중산층 가정의 미모의 불안한 여자가 남편을 의심하면 스릴러일 것이다. 이 영화들의 주인공이 남성이라면 어떨까. 그럴 수도 있겠지만, 일단 <미쓰 홍당무>는 ‘외모’를, <비밀은 없다>는 ‘모성’을 다룬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세상은 비밀로 가득하다

<비밀은 없다>가 작품성과 대중성에 비해 흥행이 안 된 이유 중에 제목을 꼽는 이들이 꽤 있었다. 제목이 평범하다는 것이다. 사실, 평범함을 넘어 진부했다. 아니,  틀렸다. 세상에는 비밀이 많다. 제목이 인상적이지 않아도 입소문이라도 났으면 좋았을 텐데. 어쨌든 사람들은 이 영화의 제목처럼, 비밀은 없다고 생각한다. 입이 ‘싼’ 사람에 의해 종국에는 다 드러난다는 것이다. 

노! 그렇지 않다. ‘모르는 사실’과 ‘없는 사실’은 다르다. 모르는 사실은 없다. 모를 뿐이다. 세상은 비밀로 가득하다. 지와 무지의 경계는 권력이 정한다. 권력이 있는 모든 곳에는 비밀을 둘러싼 정치가 있다. 비밀, 고통, 권력이 삼각형을 이룬다. 비밀로 인해 이익을 보는 자, 억압을 당하는 자, 손해를 보는 자, 고문을 당하는 자……. 비밀(언어, 사실, 정보, 역사……)은 권력 관계의 정점이다. 

‘여성’이 알면 안 되는 진실이 있고, 민초들이 자각하면 안 되는 팩트가 있다. 페미니즘과 마르크스주의가 왜 그토록 미움을 받(았)겠는가. 이것이 인간의 역사다. 말할 것도 없이 권력자들은 비밀을 통제하고 관리한다. 그래서 피억압자들에게 앎, 깨달음은 해방이기도 하고 기꺼운 고통의 시작이기도 하다. 만일, 여성들이 밥하는 일이 여자의 ‘운명’(성 역할)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세상이 어떻게 되겠는가. 남성들은 삼시 세끼 준비 스트레스로 평생을 전전긍긍하느라 역사를 창조하지 못했으리라. 최저 임금 액수가 정규 고용을 필요로 하지 않는 당대 자본주의의 본질을 은폐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실히 깨달은 이들이 있다면? 이들이 매복하고 있다가 어딘가를 습격한다면? 

<비밀은 없다>의 연홍은 비밀을 알아내고 사회를 습격한다. 그렇다고 이 영화가 복수극은 아니다. 거듭 말하지만, 이 영화의 주제는 자신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한 사회를 살아내야 하는 사람들은 늘 “정신을 차리고 생각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연홍 같은 캐릭터가 불안해 보이는 이유는, 매 순간 이 구호를 외쳐야 하기 때문이다. 정신이 자기 자신을 위해 작동하도록 뇌의 방향을 수시로 회전시켜야 한다.

믿었던 것과 알게 된 것 사이에서

약자의 경험과 지배 언어의 간극을 그린 고전으로 잉그리드 버그먼과 샤를 부아예가 주연으로 나온 1944년 작 영화 <가스등(Gaslight)>을 꼽는 데 주저하는 이는 없을 것이다. 이 영화는 어떤 인식론과 접속해도 의미 만점의 텍스트다. 원작은 패트릭 해밀턴의 2인 대사의 희곡인데, 영화는 조지프 코튼과 안젤라 랜스버리를 등장시켜 사회의 역할을 강조한다. 내용은 간단하다. 부인의 유산을 노리는 남편은 가스등을 조작하여 깜빡이게 하고, 아내는 자신이 본 가스등과 믿어주지 않는 남편 사이에서 혼란을 느낀다. 그녀는 남편의 의도대로 정신병자가 되어 가지만 결국 자기가 본 것을 믿는다. 

가스등
가스등(Gaslight)

이 작품은 이후, 이 글의 첫머리에 인용한 애드리언 리치를 필두로 수많은 메타포와 문학 작품, 논문을 낳았다. 거짓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을 정신병자로 만드는 장치, 인식 과정의 성별 정치학과 사회성, 자신만의 언어는 어떻게 획득 가능한가 등 수많은 쟁점을 제공한다. 미국의 심리 상담가 로빈 스턴은 이 영화를 소재로 쓴 책 「가스등 이펙트」에서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들의 인식론적 곤경을 ‘가스등 효과’라고 명명했다. 여성들은 “그의 말이 맞을지도 몰라.”라고 말하며 방황한다. 남자는 개인이 아니라 세상을 대변한다. 책의 부제는 ‘보이지 않는 조종에서 살아남는 법(How to spot and survive the hidden manipulation)’이다. 그렇다. 문제는 내가 누군가에게 조종당하는 현실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구상의 모든 인간은 성별, 계급, 인종 등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다른 삶을 산다. 인간은 각자 하나의 섬이다. 서로를 역지사지(易地思之)할 수 ‘없다’. 어렵다. 역지사지는 상대와 다른 땅(위치)에서 생각해보는 것이다. 섬에서 땅으로의 이동이 쉽겠는가. 같은 여성이라도 강간을 경험한 여성과 그렇지 않은 여성은 젠더에 대해 생각이 다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공부란 타인과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인간적인 행위라고 생각한다.

홀로코스트, 4.3 사건, 호모포비아 억압처럼 타인이 상상하기 힘든 폭력을 경험한 사람은 말하기의 여러 ‘단계를 거친다’. 일단, 자신이 경험한 것이 믿기지 않는다. 자기도 못 믿는데 어떻게 타인에게 이야기하겠는가. 자기 검열과 정치적, 사회적 검열은 연속선을 이룬다. 그래서 평생을 특정 사건의 후유증(aftermath, 餘波)으로 보내는 인생이 존재하는 것이다. 

말을 하려면 자기가 경험한 것, 본 것을 믿어야 한다. 특히 가시화되기 힘든 사건들은 믿는 정도가 아니라 인식론적 확신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스스로도 안 믿긴다.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믿으면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프로이트적 의미의 전통적인 방어기제, 부인(否認, denial)이다. 

어떻게 선거에 출마하고 ‘나를 사랑하는’ 남편이 학교 교사랑 섹스를 하고, 교사는 그게 약점이 되어 자기 딸에게 시험지를 유출하고, 그로 인해 아이가 살해된 현실. 믿어지겠는가. 더구나 이 모든 사건 자체가 그녀가 살아왔던 삶의 궤도 밖에 있으며, 상상조차 하지 못한 세계다. 

모든 것이 무너졌다. 엄마를 지켜주겠다는 딸은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다. 트라우마의 생존자들이 경험하는 것은 자기 분열이다. 자신이 본 것과 인식 사이의 분열, 자신의 인식을 타인에게 말할 때 ‘수위’를 조절해야 하는 분열, 말한 다음에 가까운 사람에게마저도 추궁당하고 의심받을 때 ‘나는 제정신’이라고 자신을 증명해야 하는 분열……. 이때 자신을 보호하는 유일한 말이 “정신을 차리자”이다. 이것은 방언이다. 사투리가 아니라 자기만이 알아듣는 주문(呪文)이다. 말로써 자신을 붙잡는 것이다.  

비밀은 없다의  손예진과 김주혁

장애인, 여성, 동성애자, 난민으로 사는 것은 힘들다. 사회가 이들의 말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이들의 경험을 이해하지 않기 때문이다. 장애인이나 여성의 일상은 공적 영역의 규범에서 제외된다. 페미니스트의 곤란 혹은 문제점도 이것이다. 나는 내가 만나고 도움을 ‘준’ 가정폭력, 성폭력, 성 산업 피해 여성들의 이야기를 오래 듣고 ‘많이’ 썼다. 그런데 같은 여성주의자들조차 믿지 않는다. 

고통받은 개인의 경험과 사회의 대화가 가능한 지점은 흐릿하고 아슬아슬하다. 마치 위험한 물건이 들어있다는 자루에 손에 넣는 기분이다. ‘지나치게’ 진실에 집착하면 파문(破門)당한다. 

이 영화에서 “정신을 차리자.”, “생각을 하자.”는 할 일이 많을 때 나오는 말이 아니다. 내가 본 것과 남(편)이 말하는 것 사이에서 불일치할 때 나온다. 삶에서 가장 두려운 상황은 자신을 믿을 수 없을 때다. 그럴 때 세계는 혼돈(dis/order)의 연속이다. 질서(order)는 ‘저들의 것’이다. 저들의 질서가 나를 점령하고 있기 때문에 나만의 삶의 방도를 마련해야 한다.  

불안이 정상이다. 불안은 몸의 외부와 자신의 몸이 불일치할 때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이성(理性)이다. “안정되어 보인다.” 나는 이 말, 이런 사람을 싫어한다. 정확히 말하면, 사람들이 안정을 욕망하는 현실이 싫다. 안정만큼 계급적인 단어도 없을 것이다. 넉넉하고 아쉬움이 없고 모든 것이 자기 뜻대로 되며 사랑받고 아프지 않은 상태, 어떤 부정의에도 분노하지 않는 우아한 세계. 불일치와의 투쟁이 필요 없는 삶. 이런 인생이 가능한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사실상 가능하지 않은 상태다. 동시에 피억압자를 ‘비정상’으로 내모는 말이다. 

악이란, ‘객관’은 원래부터 내 것이라고 믿는 ‘정신 승리자들’의 세계다. 승리는 싸워서 쟁취해야 하는 것인데, 승리를 갖고 태어났다고 믿는 한가한 사람들 때문에 현실은 왜곡된다. 극 중 연홍이 자기 경험을 말하면, 사람들은 대개 이렇게 말한다. “에이, 그럴 리가.”, “루머겠지.”, “미쳤구만.”…… 그러니 ‘우리는’ 오로지 자신만의 판단을 믿고 마법을 걸 수밖에 없다. “정신을 차리자.”, “생각을 하자.” 외롭고 서러운 일이다.

비밀은 없다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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